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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더니즘의 승리
‘끝이 없는 이야기’라는 부분은 최근 미술 경향에 관한 장을 더 보태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11판을 보완한 것입니다. ‘유행의 변천’이라는 것은 사회의 충격을 주려는 돈 많고 한가한 사람들에 의해 진정 ‘끝이 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미술의 분야에서 글을 쓰기 위해서 어떤 영향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각광받게 된 사람들에 대해 기록한다고 해도 그 미술가가 역사화 될지는 아무도 모르고 아무리 편견이 없고 성실한 비평가가 최선을 다해 최신의 미술사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 당시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물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비평가의 한계입니다.
책의 저자도 훗날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쿠르트 슈비터스를 1920년에 초기의 호감 가는 별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는 ‘다다’라는 그룹의 원시주의와 관련되어있습니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의 진지하고 과장된 태도를 경멸하고 어린아이의 마음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는 미술가들입니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작품 <보이지 않는 잉크>는 전통적인 안료와 캔버스 버려진 버스표, 신문에서 오려낸 것, 등 여러 잡동사니를 붙여서 만든 것인데 ‘다다’ 그룹의 반예술 행위와 관련되어 있고 큰 영향력을 가진 작품입니다.
저자는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미술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뜻을 지닌 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극동에서는 서예가 가장 높은 예술의 분야였는데 이러한 ‘서예 에술’은 시인이 즉흥적으로 영감이 아직 생생할 때 영상을 단번에 화폭에 옮기는 예술입니다. 유럽 회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추상회화가 생겨났는데 이를 ‘액션 페인팅’ 즉 추상 표현 주의 라고 합니다.
이러한 추상 표현주의의 주창자들 중의 하나인 잭슨 폴록의 <작품 No. 31>은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뿌려대는 방법으로 단순하고 자발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순수 회화’의 문제들에 대한 복잡하고 고담적인 관심이라는 20세기 미술의 양립하는 두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켰습니다.
또한 미국 화가인 프란츠 클라인의 <하얀형태들>이라는 작품은 작품의 선뿐만 아니라 여백에도 관심을 가지게 한 작품이고 프랑스의 타쉬스트인 피에르 술라주의 <1954년 4월 3일>이라는 작품은 힘찬 붓질로 이루어내는 농담법의 3차원적 인상과 물감의 아름다운 발색을 이루어내는 작품입니다.
물질의 감촉, 크기, 물감의 부드러움, 거칠음, 단단함 등 소위 텍스처라는 것은 사진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현대의 작가들을 매려 시켰습니다. 헝가리의 미술가 졸탄 케메니의 <파동>이라는 작품도 철과 동으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몇가지의 예로 오늘날의 예술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예로 ‘옵 아트’라는 것은 화면 위에 색채가 상호 작용하여 의도하지 않았던 번뜩임이나 현란함을 나타내는 시각적 효과를 가져오는 예술입니다. 이러한 신세대들의 예술의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예술가들로서 추상미술의 탐구로부터 구상 미술의 제작으로 돌아온 니콜라 드 스탈과 마음을 사로잡는 형상에 몰두 했던 마리노 마리니, 정물에 비치는 빛의 각도에 따른 수없는 묘사를 했던 조르조 모란디가 있습니다.
저자는 미술가들이 항상 존재할 것이라는 신념을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습니다. “즉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그것들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어중간한 해결 방안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장하는 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고자하는 남녀”가 존재할 것이다.
먼저 니콜라 드 스탈의 <아크리젠토 풍경>이라는 작품은 담순하고도 섬세한 붓질로 물감의 특질을 그대로 살리면서 빛과 거리감이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마리노 마리니의 <말탄 사람>이라는 작품은 공습 때 이탈리아 농부가 농장의 말을 타고 도장치는 장면에 관한 것이고 독특한 비애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이라는 작품은 자기 작업실의 꽃병을 각기 다른 빛에서 수없이 묘사한 작품입니다.
‘팝 아트’ 라고 알려진 운동은 미술이라는 관념을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미술이 배타적이고 신비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시작한 미술 운동은 언론과 대중의 조롱을 견디어낸 용기와 쓰라림을 가진 실험적인 미술입니다. 이러한 추세에 대해 퀜틴 벨 교수는 <인문학의 위기>에서 이러한 미술 운동에 대해 1914년에는 과거 화가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대했지만 현재는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하였고 미국 회화 비평가인 해롤드 로젠버그는 새로운 것의 전통은 다름 모든 전통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고 비평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에 있어 새로움과 변화라는 식의 개관이 주는 위험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미술사의 움직임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빠른 시류를 만들었고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은 변화에 대한 관심이고 이를 만드는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진보와 변화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이 시대에 따라 축적되고 따라서 변화를 더 이상 거부하거나 조롱하지 않는 가상한 노력을 기울이게끔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과학 기술의 발전이 난해한 것을 존중하는 믿음을 만들었고 이러한 영향이 미술에 미쳐서 늘 열린 마음으로 새로이 나타난 방법에 기회를 주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로 기계화와 자동화의 틀에 박힌 일상속에서 자발성과 개성을 강조하는 신비로움 믿음이 미술에서 허용됨으로써 기계화된 사회의 유일한 안식처를 만들었습니다.
네 번째로 낭만주의 시대부터 자아의 표현이라는 이념이 생겨나고 프로이트의 발견은 예술은 시대의 표현이라는 신념과 더불어 자아 통제를 내팽개치는 것이 예술가들의 권리이며 의무라는 결론을 만들어냈고 이는 ‘도피주의’를 만들었고 이러한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서 이전 세대라면 외면했을 모습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작품을 전시해주고 선전해주는 화상과의 관계에서 화상의 적극 적인 참여있었습니다.
여섯 번째로 미술 교육의 보급으로 아동 미술이라는 것도 만들어지고 많은 아마추어 화가들이 증가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미술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일곱 번째로 사진의 보급을 통해서 과거의 자연과의 연계성만이 최고의 예술로 평가받았던 것과 달리 자연의 재현 외에 다른 가능성을 발견대야 한다는 주장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여덟 번째 요인으로 미술가들에게 금지된 곳이 존재함으로써 미술 제작을 규제하려는 곳에서 자유가 진정한 축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홉 번째 요임으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미술가들이 서로를 능가하려고 하였고 유행에 민감해 짐에 따라서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질까봐 걱정하는 것이 진보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현재 자신의 은신처에서 고독한 작업을 하고 있는 진정한 천재를 놓칠 수 있고, 현재에만 몰두 할 때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쉽게 멀어져서 그것을 단순히 새로운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벗겨내야 할 껍질 정도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 또 다른 추세 변화
어느 분야에서건 마찬가지로 전통주의, 즉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구분이 확연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미술계에서는 모더니즘을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하지만 21C 최첨단의 시대라 일컬어 지고 있는 지금, 여러 미술학계와 미술평론가들은 포스트 모던주의적인 작품들마저 과거의 것들과 다름없는 역사적 유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상대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입장 같은데 충분히 수긍이 가는 견해이다. 또한 예술작품은 전 세대의 유산적인 내용들을 비판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물론 그러한 비판들이 흠잡고 억지부리기가 아닌한, 좀 더 발전된 형태의 논의라면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1975년 찰스 젠크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창안된 어휘라고 한다. 이러한 관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문화적인 충격, 낯설음을 상징한다. 그것이 더욱 더 강할수록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수식어구가 들어맞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펠리페 존슨에 의한 1976년의 고층빌딩 디자인은 당시로서는 큰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이 설계는 천편일률적인 각진 모양의 건물이 아닌 고대의 페디먼트를 모방하였는데, 이점은 상류층들에게 있어 크게 어필한 것이다. 또한 제임스 스털링이 설계한 클로어 갤러리 역시 보다 가볍고 경쾌한 느낌의 미술관 외양을 보여준다. 이는 기존의 엄숙하고 어찌보면 경건해 보이는 미술관을 친근하고 부드러운 감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전시내용 또한 경시해오던 포스트모더니즘 작품들을 대거 배치해 놓음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기존의 것들로부터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만이 정답이 될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내용으로서 스턴헌트가 잡지에 실은 한 삽화는 도데체 왜 누구나가 비순응주의자, 즉 거부자가 되어야만이 인정받는 것이란 생각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왜냐하면 회화나 미술에서는 워낙 범위가 광범위하기에 그처럼 단순한 논리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형식의 작품들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빌려주는 것도 잘못된 것 이다.
작품의 스타일은 획일적으로 선을 긋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평가를 받는 미술가에게 있어서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예로 루시안 프로이드의 풀밭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재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 걸려있다. 하지만 이와 흡사한 뒤러의 풀밭은 사소한 습작으로 간주될 뿐이었다.
20C 들어 또다른 미술계의 경향은 사진의 등장이다. 흔히들 미술가들에게 있어 사진과 같다란 용어는 모욕적이거나 달갑지 않다라는 답변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경시되어오던 사진이 20C에는 회화의 비중있는 부분으로 간주되어 오고 있다. 그 예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대표적인 사진작가로 여기고 있는 인물인데, 그의 아퀼리 엘리 아브루치에서는 예술적으로 극찬을 받을만한 기하학적 배열을 구성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런 이미지를 순간의 찰나에 포착했다는 점이다. 마치 1초정도의 짧은 순간 방아쇠를 당기듯, 그 순간을 잡은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가파르게 경사진 계단을 오르내리는 빵을 이고 있는 여인, 계단 옆 어린 여아들, 뒤편의 허름한 2층 건물들은 그의 감각적인 순간 포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손수 그린 회화에 버금간다 할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미술가들에게 있어 전유물처럼 여기던 기발한 효과들을 사진에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데이비드 로크니는 우리가 흔히 아는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과 비슷한 어머니란 초상 작품을 발표했었다. 어머니의 초상은 약간씩 다른 앵글에서 찍은 여러 사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모자이크로 그녀의 머리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복잡하고 생소해 보일 수 있겠으나, 조금 생각해 보면 많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릴 때 그녀의 이미지는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정면의 모습, 옆면의 모습, 앉아있는 모습, 서있는 모습 등등, 수만가지의 한 장면 한 장면 들이 우리의 뇌리 속에 순간순간 스쳐지나 간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미지들이 그녀의 모습들을 형상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오크니의 작품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술과 사진의 공존은 앞으로는 더욱더 발전할 것으로 본다. 흔히들 미술은 그런 소질이 있어야 하고, 감각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다고 여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그저 감상만 할 뿐 창작은 힘들어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진은 누구나가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왔다. 따라서 사진의 발달은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할 수록 더욱 보편화되고 무한한 발전이 있으리라 본다.
예술품들에 있어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 아니 가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바로 주관적인 것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어느정도의 객관적인 기준은 분명 존재한다. 유치원 원아의 작품과 미술가의 추상화는 어딘지 모르게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는 예술적인 교육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경향으로 나타나는 수가 있을 것이다.
■ 변모하는 과거
역사는 항상 변화한다. 즉 어느시대건 과거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또 재발굴하여 그 시대에 맞게 수정되고 변화되기 때문이다. 이는 미술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들은 특히 미술사에 있어서 르네상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많은 예술작품들이 재평가 되었고 또 많은 발굴과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이시기의 대표연구로는 1506년의 라오콘 군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같은시기 아폴론 벨베데레가 발견되었다.
17C에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서 가톨릭의 종교적인 열정의 부활을 목적으로 초기기독교시대의 카타콤이 처음으로 조직되어 발굴되었다. 그 후 18C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재속에 묻혀있던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도시들이 발견되었고 거기에서도 수많은 그림들이 발굴되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이집트를 고고학계에 개방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각국의 학자들이 서로서로 이집트에 와서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피라미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끔 하였다. 또한 19C초의 그리스 역시 영국의 엘긴경이 터키주재 영국대사로 부임하여 파르테논 신전의 많은 조각상들을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C말 경에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가 처음 발견된 때인데 알타미라의 동굴 벽화집이 최초로 출간된 때이다. 이러한 발굴 이전의 대다수는 미술의 역사가 불과 수만년 전으로부터 시작됐을 것이라 추측할 뿐 이었다.
그 뒤 중동에서 잇따라 발견되어 빛을 보게된 출토품 중에서는 1900년 경 프랑스 발굴대에 의해 페르시아에서 발견된 전승 기념비와 이집트에서 발견된 헬레니즘 시대의 초상화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책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1900년 경 발견한 크레타섬의 유물들을 제외시켰다. 분명 그 유물들은 누구나가 상상하듯 위대하고 놀라운 유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발굴원형 그대로의 상태가 아닌 일개 예술작가에 의해 복구되었고 또 그러한 복구가 과연 옳은가에 대해 갖는 의구심 때문에 제외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완벽주의자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1967년 그리스 고고학자 스피로스 마리나토스에 의해 시작된 산토리니 섬의 발굴에서 크레타섬의 발굴물과 유사한 벽화를 찾아 내었다. 이 어부의 그림은 자연스럽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이전의 이집트 벽화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모습과는 반대로 간결한 표현과 자유분방한 획의 모양들은 서양 미술사의 한 획을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이나 청동상들은 대부분 고대의 것들과는 다른 측면이 많다. 그 이유가 대부분의 경우 후세의 모방품들이 기존의 원형과는 다르게 좀 더 아름답게 또는 작가의 주관에 의해 왜곡해 왔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우리가 만약 원형 그대로의 진정한 고대 그리스의 작품을 본다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부족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동안은 이러한 견해들이 지배적이 되어왔었다. 이러던 중 1972년 8월에 이태리 남단의 리아체 마을 근해에서 분명 기원전 5C것으로 보이는 한 쌍의 남자조각상이 바다에서 인양되었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동안의 생각들 즉, 고대 그리스인들의 미적감각에 대한 오해를 수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고고학자들이 이 작품에 대한 연대나 구체적인 사실을 밝혀내지는 못했으나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8등신의 건장한 남자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작품 발견 전 까지만 해도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시대에 있어서의 모방작이었으며 개작이란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조각상의 발견으로 인해 그러한 개념들이 달라지게 된 것이었다.
또한 현재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이 발견되었다. 이곳의 벽화에는 그리스 신화인 페르세포네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신화의 내용은 하데스가 페르세포네에 반해 강제로 그녀를 납치해서 왕비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벽화에서 우리는 힘찬 필법을 확인할 수 있다. 하데스의 우람한 팔로 페르세포네의 어여쁜 여체를 감싸안은 모습, 페르세포네의 온몸으로 표현하는 절규 등은 마치 살아숨쉬는 듯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시대로부터 100년 후 중국에서는 진시황제가 등장한다. 그는 흔히 알고있듯 만리장성을 건축시킨 인물로서 그러한 것만큼 웅장한 것이 그의 능이다.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마상과 병사상들이 발굴되었는데 아직까지도 다 발굴이 되지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권위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 병마상과 병사상들은 채색이 되었었는데, 그 흔적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한사람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방대한 규모의 노력과 시간들이 투입됐다는 것은 예술작품이기 전에 종교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또한 나는 그리고 여기서 하층민들의 희생과 고통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고 본다. 분명 이렇게 방대한 예술 작품에는 그들의 눈물과 한이 서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해 볼 만한 것은 프랑스 혁명기간 동안 파괴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조각상이다. 이 상들은 구약시대의 왕들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혁명가들은 이를 프랑스 왕들을 기리는 기념상으로 오인 그 상의 목들을 과감하게 잘랐다. 물론 19C에 비올레 르 뒤크라는 사람이 보수를 하여 지금은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후 근처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작업 도중 머리파편들과 잔해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조각들은 채색과 도금의 흔적들을 유지한 채 발굴되었는데 만약 조각상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이런 구체적인 세부 모양들은 아마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중세와 고대 작품들이 이처럼 채색과 도금이 된 채 완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하나의 작품들을 발견하는 기쁨은 후세의 미술사가에 있어 더욱 큰 과제로 남게 되리라 본다.
앞으로의 미술계는 전통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사진, 새로운 신소재, 기존의 재료들의 연구를 통해 더욱 더 다양하고 신선한 면모를 띨 것이다. 따라서 연구해야만 할 것들이 많아 조금은 복잡하고 머리가 아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들이 많아져 우리를 가슴설레게 할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