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은 대구 팔공산 기슭에서 1932년 태어난다. 부친 노병수는 당시 면서기로 189cm의 훤칠한 장신이었고 어머니 김태향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의 부모는 결혼 후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자 팔공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 9년 만에 노태우를 출생했다.
어머니가 노태우를 임신했을 때 꿈을 꾸었는데, 밭에서 김을 매던 중 큰 구렁이가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집으로 도망 오자 구렁이가 따라와 부엌에 숨어있는 어머니의 발뒤꿈치를 물고 온 몸을 휘감자 놀라서 깨었다고 한다. 꿈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이 구렁이가 용이라 하여 아기 이름을 태룡(泰龍)이라 지으려 했으나 꿈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어리석을 우(愚)를 써서 태우(泰愚)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귀가 크고 성격이 온화했으며, 남의 말 듣기를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은 노태우가 8세 때 교통사고로 일찍 작고하면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낸다. 노태우는 젊어서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 번은 중학교 2학년 때 말라리아에 걸려 심하게 앓다가 큰 고비를 넘겼고 육사를 졸업하고 중위 때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다 플랫폼에 머리를 부딪쳐 중상을 입기도 했다. 당시 사관학교 동기생인 김복동의 누이동생(김옥숙)이 그를 간호하면서 후일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이듬해인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그는 럭비선수로 활동했으며, 운동을 좋아하던 전두환과 각별한 친구사이가 된다.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5사단에 배속되는데, 이때의 사단장이 박정희 소장이었다. 노태우 소위는 당시 박정희 장군에 대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박정희 역시 젊은 소대장 노태우를 각별하게 대했다고 하니 귀인은 귀인을 알아보는 모양이다.
1967년 육군 중령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으며, 1974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1979년 육군 9사단장이 되었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혼란스런 틈을 타 전두환 등 하나회 멤버들과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그 후 노태우는 수도경비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거쳐 육군대장으로 진급 후 1981년 예편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당시 그는 전두환 다음가는 정권의 2인자였으나 견제세력이 많아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은인자중 전략을 구사했는데, 김종필 총재의 권유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회의원과 민주정의당 총재를 거쳐 13대 대통령에 출마한다. 그는 보통사람들이란 슬로건으로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워 김영삼, 김대중 후보를 여유 있게 누르고 당선된다. 당시 귀가 큰 탓에 부처님상이라고 해서 노인층 유권자들이 호감을 갖기도 했다.
한편 일반사람들은 노씨 가문에서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고 말하는데, 노태우 대통령은 ‘교하노씨’ 노무현 대통령은 ‘광주노씨’이다. 그러나 노씨의 원래 혈통은 859년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로 온 노수(盧穗)부터 비롯되고 그의 9아들이 9문중으로 분파되기 때문에 같은 뿌리로 여긴다.
2명의 대통령과 3명의 국무총리(노백린, 노신영, 노재봉)를 배출한 노씨 문중에서는 가문에서 세 번째 대통령이 나올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 이유는 노씨의 시조 묘와 9명의 자손을 받드는 광주 삼릉단 위치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일 뿐 아니라 삼각산 정기를 받아 세 마리 용이 출현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대통령은 남북평화통일을 이룰 뿐 아니라 세계 최강대국을 이끄는 대업을 이룰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재임기간 북방정책을 펼쳐 중국, 러시아 등 외교관계가 없던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퇴임 이후 1995년에는 전두환과 함께 구속되었고 비자금 사건과 내란죄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특별 사면되었다. 추징금은 2013년 완납하였다.
그러나 2002년 무렵부터 지병(소뇌위축증)이 악화되어 오랜 투병생활 끝에 2021년 10월 26일 89세를 일기로 운명을 달리한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42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고 자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한편,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학살 책임자 중 한 명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투병 중인 부친을 대신 해 그의 아들 노재헌은 광주 민주화 묘지를 여러 번 찾아가 무릎 꿇어 사죄하였고 노태우 대통령 유서에서도 광주사태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힌 바 있다. 물론 그런다고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맺힌 한이 풀릴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의 노력은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듯 여러 면에서 전두환과 비교되면서 그의 장례는 5일장의 국가장으로 치루게 된다.
가족들은 고인의 생전 남북평화통일 의지를 담아 파주 통일동산을 장지로 희망한 바 있다. 그러나 관광특구인 통일동산에 규정상 장묘시설이 들어설 수 없게 되자 인근에 자리한 검단사에 임시로 안치하였다. 그리고 서거 45일 만인 2021년 12월 9일 통일동산에서 2km 떨어진 동화경모공원에 영면하게 된다. 장묘방식은 화장한 유해를 유골함에 넣은 후 광중을 파서 안장하며 봉분이 없는 평장 묘이다.
납골함 안쪽에는 생전 고인이 즐겨하던 말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드는 날, 세계에는 확실한 평화가 올 것입니다“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참용기입니다"
“대한민국 13대 대통령 보통사람 노태우”
동화경모공원은 실향민들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조성한 곳이다. 묘역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되는 곳으로 멀리 북한 땅 황해도 개풍군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노태우 대통령 묘는 동화경모공원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 옆에 자리했다. 승용차로 묘역까지 접근할 수 있으니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다.
이곳 묘역에서는 더 이상 묘를 쓸 곳 없는 까닭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장소가 풍수적으로 좋은 곳은 아니다. 산의 面背 중 뒤쪽에 해당되고 묘 앞이 높아 전면을 가로막고 있으며, 묘 주변은 깊은 골짜기를 형성하는 등 풍수적으로 합당한 것
거기에 더해 묘의 좌향은 서향으로 했으니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된 후 10km 길게 물이 빠져나간다. 더욱이 묘 뒤쪽은 급경사의 절벽이 되어 허전하고 취약한 상태가 되었으니 누구 하나 돌봐주지 않는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록 남북평화통일을 염원했던 고인의 유지를 따라 북녘 땅을 바라보며 묘를 썼지만 풍수의 관점에서 보면 모순과 불편, 불리함의 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몇 달 뒤 최초에 묘가 자리했던 곳에서 직선거리로 30m 옮겨 남향으로 바뀌었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풍수적으로는 오히려 잘 되었다. 남향으로 하니 서향이었을 때와 달리 한강의 물 빠짐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고 전면의 빼어난 봉우리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누군가의 조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록 장소적으로 변한 것은 없어서 그 땅의 성정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좌향만이라도 최대한 불편함을 피하고자 했으니 주어진 땅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묘 뒤편이 역시 허하므로 추후 묘 뒤편에 나무를 심어 비보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노태우 대통령 어록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1화
어느 외국인이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한국, 일본, 독일의 세 나라 선수가 각축을 벌이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독한 민족들끼리 붙었군”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표현이 잘못 됐습니다. 독한 민족이 아니라 강한 민족입니다.“
1992.8.13 바르셀로나 올림픽참가 선수단 다과회
2화
외국 어느 유명대학의 총장을 만났을 때 그 분이 저에게 박사학위를 주겠다고 합니다.
무슨 박사학위를 주겠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참기를 잘하니까 인내학 박사, 닥터 어브 페이션스(Doctor of Patience)를 주겠다”는 겁니다.
1992. 6. 29, 6·29 5주년 기념 보통사람과의 대화에서
참고로 그의 별명은 물태우였는데, 유연한 그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별명을 좋아했다고 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는데, 늘 나서지 않고 자신을 한 없이 낮추는 물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첫댓글 화장한 유골로 만든 묘를 좌향만 바꾼다는게 무엇인지요?
유골함도 앞뒤 좌우 좌향이 있나요?
화장하면 동기감응이 없다는데, 굳이 묘를 써서 무엇하나요....
좌향은 의미가 없으며, 화장을 해도 산소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일찍이 저는 화장후 조성된 최진실 묘지의 위치를 보고 같이 간 동료를 보고 이곳은 풍파가 온다고 가슴을 치며 개탄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한달이 지나서 유골 도난 뉴스가 나와서 깜짝 놀랐는데, 1년이 지나서 남편이 자살하고 또 1년이 지나서 동생이 자살하는 풍파가 밀어 닥쳐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비롯 화장을 해도 유골의 위치는 좋은 곳에 모셔야 하고 무해무득이니 하면서 아무곳에나 산소를 만들면 아니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