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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가면 불상을 모시는데, 불상은 전부 공덕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사번뇌를 버리고 열반안락을 얻은 공덕으로 불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생사업를 끊임없이 지어서 고통을 받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공덕입니다. 첫째, 불상을 보면 결과부좌.반가부좌 등 앉아 있는 좌불이 많은데, 좌불은 다리부터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다리가 함부로 다니면 이것이 생사의 근본입니다. 다리를 거두는 것이 가부좌입니다. 그 다음은 손을거둡니다. 손을 거두는 수인手印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선정인禪定印은 손릉 양쪽으로 구부려서 손가락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손바닥을 아래로 내린 것은 항마인降魔印이라고하는데, 행복을 밖에서 찾는 마구니를 항복시키는 표시입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는 것은 중생이 원하는 대로 준다는 표시입니다. 손바닥을 가운데로 하는 섯은 설법을 하고 그 나머지는 침묵을 하는 것으로, 설법과 침묵은 부처님 입이 하는 공덕입니다. 불상은 크게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神.의 삼존불로 모십니다. 법신 법신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모습은 무장애일법계無障碍一法界, 즉 아무 장애가 없는 한 법계, 한 우주이니다. 이 새상은 장애가 없습니다. 양쪽 손바닥을 밖으로 펴신 모습은 무장애일법계가 여러 가지로 퍼져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장애일법계가 어떤 모습이냐?아주 작은 모습으로도 이루어지고 큰 모습으로도 이루어지고, 긴 시간으로도 되고 짧은 시간으로도 되고,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모습, 온갖 모습으로 다 됩니다. 이것이 전부 무장애일법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무장애일법계의 지혜로 보면 하루를 살았다고 해서 짧게 산 것이 아니고, 큰 모습이라 해서 절대 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장애일법계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카 한 띠끌 속애 시방이 다 있습니다[一微塵中含十方]. 또 한 찰나의 생각이 무량겁입니다[一念即是無量劫]. 이것이 양쪽으로 손릉 펼쳐 보이는무장애일법계의 현상작용입니다. 보신은 圓滿報身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작아도 작은 게 없고 아무리 많아도 많은 게 없으면 그것이 원만입니다. 생각으로 짐작하기에는 크게도 보이고 작게도 보이고, 좋게도 보이고 나쁘게도 보이는데, 무장애일법계 지혜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원만구족圓滿具足입니다. 찰나를 살아도 짧게 산 게 아니고, 오래오래 살아도 오래 산 게 아니고, 모자라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는 것이원만입니다. 그런데 남는다.모자란다,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전부 생각으로 그렇게 분별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전부 무장애일법계요, 원만구족입니다. 이런 식으로 불상의 눈은 감은 듯 뜨고, 뜬 듯 감고 있습니다. 보아도 보는 데 메이지 않고 다 봅니다. 그것이 뜬 것입니다. 중생들은 보기 싫은 것은 안 보려고 하는데 부처님은 안 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뜬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는 데 매이지 않아서 뜬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눈의 모습은 공덕의 눈입니다. 그리고 미간의 백호상白毫相은 모든 사물을 비춰 보는 반야般若를 표현한 것입니다. 반야는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닌 한가운데 정안正眼입니다.'옥호금색조허공玉毫金色照虛空'이라, 하얀 털로 된 금색이 허공을 비춥니다. 그러니가 한쪽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불상 중에 가장 상징적인 것은 머리의 육계肉髻입니다. 머리 근육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즉 가장 높은 깨달음을 육계로 표현한것입니다. 정수리의 육계로 가장 높은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냅니다. 실제로 정수리에 눈을 조성해 놓은 불상도 있는데, 그 눈을 정안頂眼이라고 합니다. 우리 눈은 뒤를 못 봅니다. 그런데 정수리에 눈이 있으면 안 보이는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정각의 바른 깨달음, 즉 보리를 정안으로 표현해 눈이 셋 있는 삼안불三眼佛을 모셔놓은 것입니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는 명호는 어둠이 없다는 의미로서 부처님의 세계는 밝음과 어둠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라면, 노사나불은 원만으로 남는 것도 없고 모자라는 것도 없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숨을 쉴 때 공기가 남거나 모자라지 않습니다. 숨을 쉬면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 삶입니다. 우리 삶도 숨 쉬는 것처럼 어떤 것을 준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면 그게 삶입니다. 모자라지 않고 남지도 않는 것이 원만보신 노사나불입니다.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에서 석가釋迦는 능인能仁이라고 번역하고, 모니牟尼는 적멸寂滅이라고 번역합니다. 모니는 보이는 데서도 해탈하고 보이지 않는 데서도 해탈하는 적멸입니다. 능인은 모든 곳에 자재自在합니다. 그래서 자재를 하든 해탈을 하든 항상 즐겁습니다. 그것을 상락常樂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미타불阿彌陀佛로도 화현하시는데 아미타는 무량수無量壽라는 의미로 죽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의 명호를 지송持誦하는 것이 불자들의 염원이고, 불자들의 신심입니다. 불신佛身에 대해서 경에서는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금강경』에서는 "여래자如來者는 제법여의諸法如意" 라고 했습니다.여래는 불신을 설명한 것으로, '모든 법에 본래 그대로' 의 뜻이라는 말입니다.이것을 법성法性이라고 합니다. 여래는 바로 법성이라는 뜻입니다. 법성은 가는 데 가지 않는 도리가 있고, 오는 데 오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래를 온다고 하거나 간다고 하거나, 앉는다고 하거나 눕는다고 하면 여래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어렵습니다. 그래서 반야가 필요합니다. 꽃이 피고 꽃이 지는데, 꽃은 피고 지는 게 아닙니다.봄은 꽃을 따라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피는 꽃 속에서 피지 않는 봄을 보고, 지는 꽃 속에서 지지 않는 봄을 보는 것이 반야입니다. 이것을 조견照見이라고 합니다.우리 몸 역시 생겼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거기서 불생불멸의 공성空性을 보는 것을 반야般若라고 합니다. 공은 불생불멸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적멸입니다. 그것은 눈으로는 못 보고 반야로 봅니다. 눈은 분별하는 마음이 식심識心으로 보는데 이 식심은 밖의 것만 보는 특징이 있습니다. 전체를 보려면 조견을 해야 합니다. 밖의 것만 보는 것을 분별이라고 합니다.분별로는 불생불멸을 볼 수 없고 조견으로 보아야 합니다.『화엄경』에서는 처음부터 계속 불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마천궁게찬품」에서는 "여래광대신如來廣大身 究竟於法界" 라고 했습니다. 넓고 큰 몸이 여래의 몸이다. 그러면 넓고 큰 몸이 무엇인가? 무장애일법계 전체가 여래의 몸입니다.그래서 법계가 구경합니다. 법계와 온전하게 하나입니다. 구경은 완전히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 우주법계와 부처님 몸이 온전하게 하나로써 법계에 가득합니다. 법계에 가득한 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부처님의 무상정각無上正覺인데, 무상정각은 전법계지일全法界之一입니다. 일이라는 것은 법계를 온전하게 한 하나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전법계지일심全法界之一心 은 한 생각일지라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법계와 온전히 같은 일심입니다. 전법계지일진全法界之一塵은 한 티끌이 법계와 온전히 같은 티끌입니다. 한 티끌이 온 우주법계와 모자람이 하나도 없는, 법계를 온전하게 한 그릇이고, 또 법계가 하나의 티끌을 온전하게 한 법계임을 깨닫는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니까 무장애일법계가 온전한 한순간이고, 무장애일법계가 한순간에 온전합니다. 이것이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이요,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입니다. 광대한 여래심이 법계에 온전합니다. 우리는 이 법계를 몰라서 근심이 많은데, 불신세계佛身世界에서는 근심걱정이 전혀 없습니다.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일체 처에 두루합니다. 『화엄경』「여래현상품」에서는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 앉은 상태에서 우주법계에 충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조그만 그릇을 떠나지 않고 우주에 온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심상치 않은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아무리 작은 것도 모자라는 것이 하나도 없고, 아무리 큰 것도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의 티끌은 법계를 온전히 한 티끌이고, 법계는 일진을 온전해 한 법계입니다. 이것이 불신의 세계입니다. 이 티끌을 벗어나서 어디로 가는 게 아니고, 앉은 자리에서 못 가는 데가 없고, 없는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경究竟 이라고도 하고 통달通達 이라고도 합니다. '신역비시불身亦非是佛 이요 불역비시신不亦非是身 이라 단이법위신但以法爲身 하여 통달일체법通達一切法 이라.' 부처님의 몸이 부처가 아니고 부처도 또한 몸이 아니니, 다만 법으로써 몸을 삼아 일체법을 통달합니다. 오직 법이 몸이라서 법신이라고 합니다. 이 법이라는 것이 조그만 하나의 티끌이 온 우주법계와 온전히 같은 하나의 티끌이고, 우주가 티끌과 온전히 같은 우주법계입니다. 이 법으로써 몸을 삼는다고 부처님 몸을 법신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불신佛身 입니다. 그래서 일체법에 다 통달합니다. 이런 세계를 부처님의 세계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불신세계를 보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이것을 번뇌라고 합니다. 그리고 번뇌 속에 들어 있는 이런 무장애일진법계를 불성이라고 합니다. 번뇌는 번뇌인데 무장애일진법계 그대로 하나도 변동이 없습니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라는 책에 신라시대 김화상金和尙 무상無相(680~756)스님의 불성에 관한 법문이 있습니다. 비단에는 여러 무늬가 있는데, 비단에는 본래 그 비단을 짠 실밖에 없고 무늬가 없습니다. [綾本來是絲 無有文字]. 비단에 호랑이 무늬도 있고 꽃무늬도 있지만 사실 실뿐입니다. 솜씨 좋은 사람이 비단을 짜면 무늬가 생기는데, 모르는 사람은 본래 비단의 재료인 실은 못 보고 무늬만 봅니다. 그런데 이 비단을 다 풀어 놓으면 무늬는 간데없고 실뿐입니다. 여기서 무늬는 생사生死 이고, 그 실은 불성佛性입니다. 생사라는 근심걱정은 비단 위의 무늬처럼 없는데 보이는 것입니다. 분별로 보이는 게 생사이고, 본래 불성은 항상 불성입니다. 무장애일진법계, 그 하나뿐입니다. 비단을 풀면 무늬는 없어지고 실만 남는데, 그 무늬는 어디로 갔느냐? 비단의 무늬가 보일 때도 실뿐이고, 무늬가 보이지 않을 때도 실 하나뿐입니다. 보일 때도 실이고 안 보일 때도 실입니다. 생사가 따로 있고 불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불성 하나뿐입니다. 이것은 무슨 무늬라고 분별하는 것뿐이지, 그 무늬는 본체가 없고 실이 본바탕입니다. 사실 불성뿐인데 분별로 느끼는 것이 생사입니다. 생사는 분별로 느끼는 것이고, 분별로 생사만 생사만 좇아가고, 불성은 그냥 항상 있는 것입니다. 법계를 온전히 한 하나의 티끌이고, 법계가 하나의 티끌을 온전히 한 법계입니다. 불교가 이런 것입니다. 경을 잘 보면 바로 성불합니다. 부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분별하다가 그 분별을 거두면 거기가 부처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자꾸 집착해서 분별심을 놓지 않아서 문제가 됩니다. 분별심을 놓은 사람은 불교를 접하자마자 깊이 들어가서 바로 성불합니다. 성불이라는 이 깨달음은 이 몸 버리기 전에 깨닫는 것이지 내생으로 미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안 되느냐? 불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분별을 놓지 않아서 불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삼베를 짤 때 쓰는 삼 덩어리를 짊어지고 길을 가다가 은덩어리를 발견합니다. 은이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은 바로 삼 덩어리를 버리고 은덩어리를 짊어집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지고 온 삼 덩어리를 버리기 아까워서 삼 덩어리를 그대로 지고 갑니다. 또 한 참 가다가 금덩어리를 발견합니다. 삼 덩어리를 버리고 은 덩어리 짊어진 사람은 은보다 금이 더 좋으니까 은 덩어리를 버리고 또 금덩어리를 짊어집니다. 그런데 삼 덩어리만 계속 짊어지고 온 사람은 금덩어리를 보고도 지고 있는 삼 덩어리를 버리지 못합니다. 이것을 '담마기금擔麻棄金' 이라고 합니다.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삼을 버리고 금을 취합니다.[捨麻取金]. 처음에는 삼을 버리고 은은 취하는 '사마취은 捨麻取銀 ', 그 다음에는 은을 버리고 금을 취하는 '기은취금棄銀取金' 입니다. 우리는 늘 좋은 것과 나쁜 것, 사는 것과 죽는 것 등을 걱정하다가 세월 다 보냅니다. 그러니 근심걱정 하지 말고 지혜를 닦으라는 말을 들으면 지혜를 닦습니다. 이것이 삼을 버리고 은을 취하는 사마취은입니다. 이렇게 지혜를 닦다 보면 아공법공我空法空을 깨닫습니다. 나도 불생불멸이고 나 외에 모든 것도 불생불멸이어서, 불생불멸에 불성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기까지가 은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 아와 법이 공하다는 생각이 있지만, 거기서 지혜가 더 깊어지면 '아공이다, 법공이다, 나도 불생불멸이고 나 외에 모든 것도 불생불멸이다.' 라는 생각까지 없습니다. 이것을 구공俱空, 즉 함께 공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금입니다. 나도 불생불멸이고 모든 것도 불생불멸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으면 삼보다는 낫지만 금은 아닙니다. 불생불멸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으면 절대 불생불멸에 못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불생불멸이라는 한 생각은 지금 생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공법공이라는 분별이 일체 없는 경지에 올라가야 구공의 각覺이라 하고, 그것이 정상육계상頂上肉髻相 입니다. 불성 하나뿐인데 사람들이 불성에 분별을 봅니다. 『능엄경楞嚴經』제5권에 일건육결一巾六結의 말씀이 있습니다. 수건 하나에 여섯 번 매듭을 맵니다. 매듭을 매는 순간에 수건은 못 보고 매듭을 봅니다. 매듭을 만들어서 물어보면 매듭이라고 하지 수건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하나하나 풀어내면 본래 수건입니다. 그러면 매듭은 어디로 갔느냐? 매듭은 그냥 맺어서 생겼을 뿐이지 본래 있던 것이 아닙니다. 매듭이 생겼을 때에도 수건은 수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스로 분별해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이것이 불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로 그냥 만족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티끌도 법계와 온전한 티끌이고 법계도 하나의 티끌과 온전한 법계이므로, 티끌이라고 모자랄 것도 없고 크다고 남을 것도 없이 만족하는 게 대해탈大解脫이고 대안락大安樂입니다. 도는 구해서 이루는 게 아니고, 그대로 만족하는 것이 도입니다. 구하는 마음이 분별입니다. 구하는 마음 때문에 자기 집을 떠나서 객지를 떠돌며 고생 고생합니다. 순간순간에 만족하는 것이 삶인데, 우리는 구하다 죽고 만족할 줄 모릅니다. 만족하는 것이 삶입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에 앉은 할머니가 "삶은 계란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삶은 계란인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계란이든 김치든 삶은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몇 만 년보다 짧지 않고, 몇 만 년을 살아도 하루보다 길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장애일법계입니다. 그런 세계를 믿고 그런 세계로 가기 위해서 분별심을 내려놓고 불성을 관찰하는 것이 불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

첫댓글 부처님의 몸이 부처가 아니고 부처도 또한 몸이 아니니, 다만 법으로써 몸을 삼아 일체법을 통달합니다. 오직 법이 몸이라서 법신이라고 합니다.....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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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장 올립니다..
성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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