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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친구 | 입력 2014.06.02 14:00
신병치료를 이유로 연말 출국했던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씨가 중남미 바하마서 요양하고 미국과 홍콩을 들러 출국 71일 만인 27일 저녁 7시 20분 단신으로 귀국했다. 1974년 2월. 양영훈 기자
이후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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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4년 2월 23일(1924-02-23)![]() (現 ![]() |
사망 | 2009년 10월 31일 (85세)![]() |
사인 | 뇌종양 |
매장지 | ![]() |
국적 | ![]() |
본관 | 학성 |
별칭 | 호는 우석(又石), 별명은 제갈조조 |
학력 | 국학대학 법학 학사 |
직업 | 군인 정무직공무원 |
전직 | 중앙정보부장 |
종교 | 불교 |
배우자 | 정윤희 |
자녀 | 슬하 3남 1녀 |
부모 | 아버지 이봉석, 어머니 김숙자 |
친척 | 사촌형 이중락, 사촌동생 이거락 |
이후락(李厚洛, 1924년 2월 23일 ~ 2009년 10월 31일)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무직공무원이다.
이후락은 1924년 2월 23일에 울산 웅촌면에서 아버지 이봉석과 어머니 김숙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회야강변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1943년에 일본의 한 항공기정비학교에 입교하여 하사관 과정을 이수하고 1944년 12월에 일본 육군 하사로 전역하고 귀국하였다. 이미 전역한 상태라 입학 자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12월 5일에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였고 1946년 3월 23일에 졸업하며 대위로 임관하였다.
“ |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던 것이겠지. | ” |
— 김정렬의 증언 |
김정렬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자신은 일본군 대위라고 우겼다고 한다. 미군에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그를 대위로 임관시켰다고 증언했다. 1947년에 국학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조선국방경비대가 육군으로 변하면서 육군에 참여하였고 곧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948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을 지냈고 그 뒤 박정희가 여순 사태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게 되자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1951년에 국학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에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에 종사하였다. 1951년 대령으로 진급하고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지낸 김종평의 회고에 따르면 이후락은 주로 HID 업무를 총괄했다. 전쟁 중인 1952년에 미국으로 가서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하여 1955년에 수료하였다.
그해 2월 주미 대사관 부무관으로 근무하며 정보기술을 익히기도 했다.[1]1957년 10월 2일에 귀국하였으나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전혀 없었던 그는 바로 보직을 받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국방부 79부대장이 되며 군에 복귀하였다.
1958년 1월 14일에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리전 오브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다.[2]그해 8월 30일에는 연합참모부 사령관 유재흥을 수행하여 타이완을 방문하였다.
1958년 그는 대한민국 국방부 내에 제79부대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였다. 79호실, 중앙정보부 등의 별칭으로 불리는 이 특수부대는 미국 CIA의 인사가 유재흥, 김정렬에게 미국 CIA 한국지부와의 업무 교류를 목적으로 창설하자고 제의하였고, 1958년 미국 CIA의 한국지부장으로 웨인 넬슨이 부임한 뒤 지부 설치를 독촉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재흥, 김정렬에 의해 창설되었다. 정식 명칭은 국방부 중앙정보부로, 국방부의 지휘를 받았다.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가진 넬슨은 1958년 복구된 CIA 한국 지부장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김정렬 국방부장관을 설득, CIA지부와 상대할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했다. 그것이 국방부장관 직속의 국방부 79호실였다. 김정렬 국방부장관은 미국 CIA 한국지부장 요청으로 3군 정보요원을 차출해 가칭 중앙정보부라는 통합부대를 창설항렸다. 김정렬은 이 부대장에 이후락을 앉혔고 이후락은 자신의 군번을 따서 '제79부대'라고 이름지었다.[3] 김정렬은 이후락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미국 CIA에서 계속 부탁하자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승만은 아에 CIA를 믿지 말라면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김정렬 국방부장관이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했더니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CIA지부의 창설을 허가하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의 예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 1958년부터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청하였지만 미국을 불신하던 이승만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다.
그는 이 기관을 79호실로 하자고 했다고도 하고 제79부대라고 하자고 했다고도 한다. 79는 그의 군번 10079에서 따온 것이다.
국방부 79호실장 시절 이후락은 이승만의 밀명을 받아 라오스에 잠입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라오스 공산화 방지를 위해 우익 노사반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 지원방안을 검토하다가 이후락을 라오스 현지로 보냈다.[3] 이후락은 당시 베트남 대사 최덕신(崔德新)의 도움을 받아 노사반을 만난 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김정렬 국방부장관은 서울로 돌아온 이후락 준장을 데리고 경무대로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때 이후락 준장이 직접 보고를 하도록 했다. 그는 '노, 노, 노사반 장군이…' 식으로 말을 더듬거렸고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다. 이후락은 노사반 장군이 한국군의 파견을 희망하고 있더라고 전했다. 이 보고에 따라 백선엽 합동참모의장의 산하에 라오스 파병을 연구하는 실무반이 조직됐다. 그러나 미국측의 반대로 백지화된다.
보고에 따라 한국군의 라오스 파병이 깊이 있게 검토되다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 라오스 미션을 계기로 하여 이후락은 매주 두번씩 열리던 국무회의에 참석, 15분간씩 국제정세를 브리핑하게 됐다. 이 브리핑은 허정(許政) 과도 내각때도 계속되었고 1961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1960년 5월 국방부 중앙정보부가 해체되자 국방부 정보담당관의 직위로 활동하였다.[4] 1960년 11월 중앙정보조직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를 조직하자 연구실장이 되었다. 장면 총리는 미국 CIA 서울지부의 권유에 따라 국무총리실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었다.[1] 미국 CIA는 1961년 중앙정보연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한 이 기관의 책임자로 이후락을 밀었다.[1] 결국 HR는 미국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육군 소장 예편과 함께 정보연구실장(차관급)으로 취임했다.[1]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설치되자 그가 만들어놓은 제79부대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에 편입되었다.
그가 중앙정보연구위원회의 정보실장과 연구실장으로 발탁된 것은 CIA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장면은 측근인 이한림 육군 제1야전군 사령관에게 이후락의 사람 됨됨이를 물어 보았다. 이에 이한림은 이후락을 평하기를 "힘센 쪽에 붙어 다니는 형편 없는 군인"이라고 장면 국무총리에게 이후락의 사람 됨됨이를 평했다. 이에 장면 국무총리는 1961년 3월 28일 이기호(李岐鎬)를 행정이사관 임용과 동시에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하여 이후락을 견제하게 한다. 당시 당시 국방부 정보비서관인 육군대령 이기호는 특명으로 육군준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고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주한미국대사관의 직원들에게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락은 박정희 주변에 끊임없이 밀정을 심어두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1961년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실버 참사관이 마셜 그린 대리 대사에게 한 보고중에 "그에 관해서 는 걱정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후락 준장의 얘기로는 이전에 공산주의자 였다는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그는 반란 혐의 로 사형 판결을 받고 전향하여 형의 집행 을 면한 적이 있습니다.[5]" 라는 보고가 있다. 나중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후락을 내심 경계하였다.
1960년 11월 국무총리 직속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육군 소장이었지만 그를 데려가려면 예편시키고 데려가라는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의 건의로 1961년 1월 예편과 동시에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실장이 되어 1961년 3월까지 재직했다. 동시에 그는 국무총리 안보담당 비서관을 맡기도 했다.
한편 그는 대한공론사 이사장의 제의로 1960년 12월부터 대한공론사의 필진으로도 참여했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과 동시에 혁명 주체인 박정희 부의장의 과거 좌익 경력을 미국에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인 김재춘 대령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대령에 의해 구제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보실장 겸 2대한공론사 이사장 직을 겸임하며 [korea republic]지를 개편 발행하여 주한 외국인에 대한 군사정부의 홍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락이 부패혐의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을 때 옆방에 수감되었던 정치인 박준규는 훗날 '5·16 직후 우리 모두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데.'라고 회상하였다.
1961년 5월 18일 미국 CIA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전쟁 때 복직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미국으로서는 좌익 전력을 지닌 박정희 의장을 감시할 인물이 필요했고 곧 이후락이 박정희 감시 역할을 맡게 된다.
5·16 군사 정변 초기에 그는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그는 1961년 7월 박정희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지내고, 군사정부 대변인을 겸직하였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출입기자들에 따르면 대한공론사 이사장직을 맡은 뒤 정변 주체세력 장교들에게 깎듯이 님자를 붙이다가 얼마 안가서 선배대접을 받기 시작하더니 곧 제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민정이양과 동시에 다시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한편 그는 김종필 등과 함께 2인자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만다.
1963년 12월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어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같이 국민들에게 원성을 많이 받는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탄받았고, 1969년 10월 20일, 3선 개헌 직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을 불러 사전 양해를 구한 뒤 주일본 대사로 내보내면서 김형욱과 같이 해임시켰다.
한편 1970년초부터 북한과의 협상을 준비하였으며 1970년 12월 21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고,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선거 총지휘권을 맡겼다.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사실상 정부의 2인자로 발돋움했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북한과의 협상을 추진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게 했다. 1972년 5월 4일 새벽, 김일성과의 사상 초유의 남북 비밀회담을 열었다. 이날의 밀담은 남북한 당사자가 강대국에 대한 공동 경계심을 확인하고 남북간 합의를 도출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강조한 말이 오갔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마침내 7·4 남북 공동성명 을 발표한다.[6] 당시 그는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직을 맡아 남북 협상을 주관하고 북측 대표자들과 면담하기도 했다.
평양 방문 당시 그는 수가 틀어지면 자살하려고 청산가리를 양복 호주머니에 숨긴 상태로 판문점을 넘어 평양까지 갔다. 판문점에 도착하기 전 그는 어금니 가운데 임플란트가 하나 있었는데, 이 임플란트에도 일부 청산가리를 숨겼다. 그는 청산가리를 손에 쥔 상태에서 상황이 안좋게 흐르면 마실 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되고, 1973년 12월 1일 이후락은 3년간 지킨 중앙정보부장의 자리에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소위 윤필용 사건에 의해 해임 위기를 당한다. 이에 다급해진 이후락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심을 보이려고 했다는 것이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의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다.[7]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에는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 그가 사건을 주도한 것을 알게 되고,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확립하는 데 앞장섰지만 그는 결국 사건 이후 해임당한다.
이후락은 형식상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었지만 내심 박정희 대통령의 행동을 감시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경계했다. 1973년 12월 19일 심장병 치유를 핑계로 영국령 바하마 제도로 망명성 외유를 떠났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회유로 다시 귀국하였다.
그 후,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1978년 12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 1979년 민주공화당의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한 뒤, 이후락은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물러났다. 당시 재산과 관련해 "떡(정치자금)을 만지다보면 떡고물(부스러기 돈)이 묻는 것 아니냐"는 발언으로 "떡고물"이 유행어가 된 적도 있었다.[8]
1982년에는 울산장학회를 조직하고 장학 사업을 추진하였다.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해금되었으나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후 제6공화국이 출범한 뒤에도 외부 출입을 자제하고 자택에서 은둔생활을 하였고, 제1공화국과 제3공화국, 유신 시대에 대한 외부에 대한 증언 진술 요구를 대부분 거절, 회피하였다.
2009년 10월 31일 85세의 나이로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에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 등 4남 1녀로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며 3000만~5000만 달러에 이르는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9]
사망한 뒤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진 뒤 대전광역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80년 3월 14일 이후락은 〈세계불교신도대회〉를 위해 태국으로 출국했다가, 미국에서 장기간 머물다가 94일 만에 귀국한 후 자택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해서 《떡고물》이라는 용어를 유행시켰다.[10]
“ | 정치자금 만지다 보면 이런말 저런 말 들었지만, 떡고물을 안흘리고 떡을 만들 수 있나 | ” |
12.12 이후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던 1980년 6월 신군부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하고, 축재액 194억원을 발표했다. 한편 전두환 장군이 압수한 그의 울주군 언양읍, 삼남면, 상북면의 토지들은 그의 둘째 아들 이동훈이 다시 돈을 주고 매입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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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초판연도=
) (도움말);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꺾쇠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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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전 임 이동원 | 제3대 대통령비서실장 1963년 12월 10일 ~ 1969년 10월 21일 | 후 임 김정렴 |
전 임 엄민영 | 제3대 주 일본 대사 1970년 1월 ~ 1971년 1월 | 후 임 이호 |
전 임 김계원 | 제6대 중앙정보부장 1970년 12월 21일 ~ 1973년 12월 2일 | 후 임 신직수 |
![]() | 전 임 김원규, 최형우 | 제10대 국회의원(경남 울산시·울주군) 1979년 3월 12일 ~ 1980년 10월 27일 무소속 최형우 | 후 임 이규정, 고원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