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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스크랩 고무줄놀이에 담긴 놀라운 사회상
안 엘리지오 추천 0 조회 16 06.01.19 10: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무줄놀이에 담긴 놀라운 사회상


요즈음은 거의 사라져버린 놀이가 되어버렸지만 오래지 않는 과거까지만해도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운동장에 나가서 고무줄놀이를 하곤 했다. 특히 점심시간에는 평소에는 그렇게 넓던 운동장이 여기저기서 벌린 놀이판 때문에 무척 좁게 보이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고무줄놀이는 여학생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남학생도 함께 참여하는 놀이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고무줄놀이를 할 때는 여러 종류의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 중에 사회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들이 상당히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어린 시절 누구나 했던 고무줄놀이의 사회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고무줄놀이는 주로 여학생들이 했는데, 길고 긴 고무줄을 자세히 보면 온전한 고무줄을 가지고 놀이를 하는 여학생 그룹은 보기가 어렵거나 아예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짓궂은 남학생들이 고무줄을 칼로 잘라서 그것을 매느라고 생긴 매듭이다. 여러 사람이 용돈을 털어서 새 고무줄을 사면 하루가 못가서 만신창이가 되곤 했던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여학생이 들어있는 그룹의 고무줄이 훨씬 더 많은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미루어볼 때 남학생들은 고무줄을 끊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관심 있는 여학생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여학생들도 고무줄 끊은 남학생들을 향해 소리소리 지르기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래주기를 바라 마지않는 면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여기에 고무줄놀이의 첫 번째 의미의 사회사가 숨어있다.

 

고무줄놀이의 두 번째 사회사는 노래에 있다. 이 때 부르는 노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시대상을 반영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찌르자 오랑캐 몇천만이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빨간 동그라미 하나 전차에 깔려서”, “꼬마야 꼬마야”,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고무줄놀이를 할 때는 이런 노래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나의 살던 고향은” 등의 동요도 불렀지만 위에서 든 노래들은 그 당시의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사적인 측면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고무줄놀이에 숨어 있는 두 번째 사회사이다.

 

출처 : 고흥 사람들 홈페이지

 

1. 고무줄놀이에서 형성되는 남녀관계의 사회상

 

고무줄놀이의 첫 번째 사회사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위에서도 말했듯이 고무줄놀이는 여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하는 놀이다. 길고 긴 고무줄을 사서 그것을 이은 다음 두 편으로 갈라서 방어하는 쪽에서는 아주 낮은 높이에서 시작하여 점점 높은 곳으로 이동해가면서 고무줄을 움직이면 공격하는 쪽에서 그것에 맞추어서 여러 재주를 넘는 놀이가 고무줄놀이다. 그런데, 이 고무줄놀이는 시작하기만 하면 필요악처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칼을 든 남학생들이다.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르지만 고무줄놀이가 시작되기만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연필깍이 칼로 고무줄을 싹둑 잘라놓고는 잽싸게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학생들은 쫓아가서 잡기 보다는 소리를 질러서 원망을 하거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화를 가라앉히곤 한다. 그러다가 잠시 지나면 잘린 고무줄을 묶어서 다시 놀이를 시작하는데, 조금 전에 그렇게 욕을 먹고 도망갔던 남학생들은 다시 나타나서 고무줄을 또 끊어 놓는다. 또 다시 남녀 학생 사이에 실랑이가 시작되는데, 그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점심시간은 어느새 다 가버리고 시작종과 함께 교실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 과정을 자세히 보면 고무줄놀이 하는 시간이 반 정도이고, 줄을 끊는 남학생과 실랑이를 하거나 줄을 잇는 시간이 반 정도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무줄놀이는 그것을 통해 남녀의 성적인 특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매개체라고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이 지르는 소리와 온갖 악담이 섞인 구박어린 말을 통해 남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고무줄을 끊는 것이고, 여학생들은 고무줄을 끊는 남학생들을 향해 던지는 원망들을 통해 스스로가 여자임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고무줄놀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우주 만물이 다 그렇듯이 인간 역시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여자와 남자가 일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만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남녀의 관계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여자는 주로 남자를 보살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애정이 섞인 잔소리와 구박을 기본으로 하여 평생을 살아가고, 남자는 가정을 책임지면서 한편으로는 여자의 애정 섞인 잔소리와 구박을 받으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여자가 사회를 향해 애정 어린 잔소리를 시작하는 첫 단계는 소꿉놀이나 장난감, 그리고 애완동물 등을 보살피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그저 부모의 생활을 흉내 내는 정도의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자신의 성적 특성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애정 어린 잔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남자의 경우도 비슷한데, 아빠를 흉내 내서 하는 행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성적인 특성을 인지한 상태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조금씩 성적인 구별이 분명해지면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이성을 구별하는 능력이 점점 드러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이 종합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고무줄놀이라고 보여지는데, 남자는 구박과 욕설을 듣는 재미로 고무줄을 끊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겉으로는 원망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즐기는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즉 남자는 행동으로 여자에게 공격성을 드러내고, 여자는 말로써 남자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과정이 바로 고무줄놀이인데, 이 과정을 평생 동안 계속된다고 보아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초등학교 고무줄놀이는 여자들만의 놀이가 아닌 것이다. 고무줄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끊느냐 하는 것도 남학생들에게는 상당히 주요한 일 중의 하나인데, 잘못하면 여학생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 쪽에서도 많은 준비를 하는데, 어떤 칼을 써야 할 것이며, 어떤 방향에서 끊어야 고무줄이 세게 튕기지 않고 잘라질 것이며, 또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여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와야 하는지 등에 대한 면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잘못하다가 잡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자신들보다 힘이 센 여학생들한테 호되게 혼날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선생님한테까지 가서 야단맞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남녀 모두 사춘기를 맞이하는 중등학교에 진학하는데, 중등학교는 일부의 남녀공학을 제외하고는 여학생과 남학생이 분리되기 때문에 특별한 부딪힘이 없는 상태에서 공부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결혼을 염두에 두는 남녀교재가 시작되는데, 이때도 남녀관계는 초등학교 때의 고무줄놀이와 양상이 비슷하다. 남자는 남자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여자가 볼 때는 자신의 애인은 여자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바보나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청춘남녀의 연애 과정을 보면 좋을 때가 더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여자는 주로 토라지거나 화를 내면서 남자를 구박하고 남자는 여자를 달래느라고 늘 진땀을 빼는 광경을 보게 된다. 사실 사회적으로 볼 때 남자라는 것이 인식되는 그 순간부터 여자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 평생 사는 존재이다. 어릴 때는 말썽을 피우거나 말을 잘 안 들어서 어머니에게 혼나고, 학교에 가서는 고무줄놀이를 훼방 놓아서 여자에게 혼나고 청년이 되어서는 여자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고 혼나고 하는 것이 남자가 지닌 사회적 속성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잘 보여주는 말 중에 “어머니가 25년 걸려서 만들어놓은 청년을 젊은 여자는 25분만에 바보로 만들어버린다”는 서양속담까지 생겨난 것이리라.

 

남녀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결혼을 하는데, 이때도 잔소리하고 잔소리를 듣는 남녀관계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다가 아이가 생기면 이제는 엄마가 되어버린 여자는 아이들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남편에 대한 애정 어린 잔소리에다가 아이들에 대한 애정 섞인 잔소리까지 늘어서 완전한 잔소리꾼이 되다시피 한다. 어떤 글에서 읽은 것 중에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을 해서 들어오니 아이들은 거실에서 장난을 치고 있고, 부인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문을 열어놓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볼일을 보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이런 관계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 사회의 남녀관계가 처음으로 시동을 거는 곳이 바로 초등학교의 고무줄놀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것을 통해서 사랑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관계가 처음으로 성립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2. 고무줄놀이 노래에 반영된 사회상

 

 

2-1. 북진통일 세대

 

다음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고무줄놀이에서 부르는 노래에 보이는 사회사적인 측면이다. 위에서 말한 것 중에서 “무찌르자 오랑캐”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고무줄놀이를 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6,25전쟁을 전후한 시대의 노래로써 북진통일을 나라의 근본정책으로 삼던 때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북진통일을 국시로 삼고 백두산에 태극기를 휘날리는 것을 모든 책의 뒤에 명시할 정도였으니 통일에 대한 절박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천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라는 노래가 왜 하필이면 고무줄노래에 사용되었겠는가 하는 것은 아이들의 노래가 시대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매개체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노래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일을 꾸몄던 사례는 우리 역사에 적지 않게 남아있는데,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쳐주어서 선화공주를 귀양 가도록 해서 결혼에 성공한 서동이야기, “장다리는 한철이나 미나리는 사철이다”라는 노래를 퍼뜨려서 인현왕후에 대한 긍정적 여론을 형성시킨 것,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동요를 통해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슬픔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형성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신문이나 잡지. 교과서 등의 모든 출판물에는 의무적으로 우리의 맹세를 넣어야 했는데, 그것은 1.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킨다. 1.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순다. 1.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성하자" 는 것이었다. 이것을 기억하거나 “무찌르자 오랑캐”를 부르면서 고무줄놀이를 했던 세대들은 바로 이승만대통령시절의 북진통일 주장을 반영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사회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지니는 또 하나의 노래로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가 있는데, 이것은 “무찌르자 오랑캐”보다는 덜 불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2, 영웅이 부각되는 시대

 

다음 세대가 불렀던 주요 노래는 바로 성웅 이순신이었다. 이 노래가 고무줄놀이에 등장한 때가 60년대 중반을 넘어설 때이니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연장을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던 때이다. 그 당시 군사쿠테타로 대통령이 된 박정의 장군은 군정이라는 이미지를 없애고 민정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심기 위하여 여러 정책들을 내놓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 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신, 유관순, 이퇴계였다. 특히 이순신은 군인 출신인 자신이 존경하는 하나의 지침으로 삼으면서 군인이지만 이처럼 민족의 영웅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머리에 심어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때부터 성웅 이순신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현충사 등이 대대적으로 확장 건립되고 전국적으로 행사가 확대되었고, 영화를 비롯한 여러 매스컴에서 성웅 이순신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고무줄놀이에도 이 곡이 가장 많이 불려지는 노래로 등극을 했던 것이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어 이 겨레 구원하신 이순신 장군 우리도 씩씩하게 자라납니다”를 불렀던 그 당시의 아이들은 모두가 성웅 이순신처럼 훌륭한 장군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성웅 이순신은 그 당시 아이들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2-3 산업화의 시대

 

1960년대는 이러한 변화를 겪으면서 점차 안정되어 갔는데, 그 당시 위정자들은 보릿고개를 없애는 데에 심혈을 기우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중심의 산업구조를 개혁하여 중공업중심의 산업구조로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했는데, 여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연탄이었다. 연탄가스중독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련을 우리들에게 남겨주기는 했지만 산업화과정에서 연탄이 한 구실은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산업화에 필요한 에너지도 에너지지만 일제가 망쳐놓은 산림을 재건하기 위한 노력도 전국적으로 펼쳐졌는데,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땔감을 연탄으로 바꾸기 위한 주택개량 사업이었다. 이처럼 연탄이 우리 생활의 중심으로 성큼 들어오게 되자 고무줄놀이에 당장 연탄 노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빨간 동그라미 하~나 전차에 깔려서 납작쿵 그것을 보고있던 어머니 땅바닥을 두드리며 엉엉엉”이라는 내용을 지닌 이 노래는 연탄 하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서민의 애환을 아주 잘 표현한 곡이었다. 불붙은 연탄이 전차게 깔려서 깨진 것이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는 엄청난 일 중의 하나였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무줄놀이에는 그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내용의 노래들이 속속 등장했던 것이다.

 

2-4 유신헌법의 시대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1960년대도 서서히 저물어가는데, 60년대 초반에 정권을 잡아서 10년 가까이 정권을 오로지 해온 당시 권력집단은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정권 교체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었다. 정권 연장을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헌법을 고치는 것인데, 삼선개헌을 통한 유신헌법이 등장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되자 보릿고개를 없애는 것도 좋지만 너무 오랜 동안 권력을 잡으면서 여러 문제를 야기한 위정자들에 대한 불만이 도처에 쌓이기 시작했다. 학생데모가 점점 활발해지고 사회의 지식층들까지도 동요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것이 간첩사건이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상당수의 간첩사건이 위조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역시 곧바로 고무줄놀이에 옮겨졌는데, 이 때 나타난 것이 바로 “꼬마야 꼬마야”였다. “똑똑똑. 누구십까? 손님입니다. 들어오세요.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꼬마야 꼬마야 손뼉을 쳐라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잘 가거라”가 내용인데, 추억에도 아련한 이 노래에 등장하는 꼬마는 바로 그 당시 위정자였다. 손님이라고 해서 들어오라 했고, 뒤로도 돌고, 손뼉도 치고, 땅도 짚고 만세도 부르게 하고 이제는 나가라고 하면 나가는 것이 순서인데, 실제 현실에서 꼬마는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한 번씩 돌아가면서 놀아야 하는 원칙을 깨 버리게 되기 때문에 놀이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고무줄놀이에서는 나가지 않겠다고 버팅기는 아이는 왕따를 당해서 같이 놀아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처럼 사회 각층에서 들려오는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위수령과 긴급조치 등의 강권을 휘둘러 제압을 하였다. 욕이나 말이 배를 따고 들어오는 일이 절대로 없다고 확신했던 이들은 그 대신 총이 배를 따고 들어오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일견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고무줄놀이에 이처럼 복잡한 남녀의 사회관계와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노래들이 함께 들어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고무줄놀이는 많은 어린이들이 참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는데, 아이들의 입을 통해 많은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현대사회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린 고무줄놀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꺼내서 펼쳐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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