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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듀엣 가수’라는 타이틀이 생소했다. 머릿속에는 최근 활발히 활동 중인 쌍둥이 트로트 듀엣만 떠오를 뿐, 이렇다 할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간 가야랑이 출연했던 TV 프로그램 역시 SBS <스타킹>, KBS <인간극장> 등 평범한 소시민이 자신의 사연을 들고 나와 시청자를 울리고 웃기는 것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들 자매, 소위 ‘엄친딸’이란다. 언니 예랑씨는 가야금 최연소 대통령상 수상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이수자, 동생 사랑씨는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성남시립국악단 상임단원을 역임한 재원이다. 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궁금해졌다. 평생을 연주자로, 교수로 명예롭게 살 수 있을텐데 굳이 힘든 길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야금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어요.”
동생 사랑씨가 입을 열었다.
“저희도 몇 년 전까지는 국내 최고 가야금 연주자라는 타이틀에 흡족해하는 평범한 예술인이었어요. 그런데 국악이 도태되고 있는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죠. 가야금의 대중화를 위해 우리가 먼저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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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가야금과 트로트를 접목시켰다. 2008년 첫 번째 앨범을 내고 활동을 시작한 것. ‘뱀이다’ 송으로 유명세를 탄 ‘참아주세요’를 비롯, ‘수리수리 마수리’ ‘뻥 차버려’ 등 다양한 곡을 앨범에 수록했다. 주변의 반대는 심각했다. 친구들과 지도교수는 물론, 외국에서 가야금 연주자로 활동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왔던 유명 작곡가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주위에서 알아서 모실 텐데 왜 그런 길을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랑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한 사람이라도 더 가야금을 접하고 가야금이 어떤 악기인지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야금 하면 기생이 연주하는 악기라고 평가절하하고, 외국 음악만 높이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 가야금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주고 싶었죠. 다행히 어머니께서는 저희의 뜻을 존중해주셨어요.”
그러나 가야금 대중화의 길은 험난했다. 관객이 한 명도 없는 땡볕 아래에서 연주를 해야 했고, 행사 리허설에서 “누가 이런 싸구려 트로트를 연주하라고 했느냐”며 공연 관계자에게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손이 떨려요. 제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언니에게 ‘나 이 공연 못할 것 같아. 우리가 왜 이런 대접까지 받아야 해?’라고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언니가 ‘사랑아, 프로는 이런 상황도 견딜 줄 알아야 해. 이런 사람들이 우리 가야금 소리를 듣고 인정하면 그땐 정말로 인정받는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본 무대에 올랐어요. 공연이 끝나고 그 관계자가 ‘공연 정말 잘 봤다. 아까는 미안했다’고 하시는데 또 한 번 울컥했죠.”
자매는 가야금 연주자이자 대학교수인 어머니 변영숙씨와 국악계 유명 인사인 이모들 틈에서 어릴 적부터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언니 예랑씨는 철이 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어머니에게 레슨을 받았다. 가야금은 그에게 숙명과도 같았다. “가야금을 연주하다 보면 광활한 우주 속에 저와 가야금만 있는 듯해요. 가야금은 다른 나라 악기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어요. 중국이나 일본의 치터(Zither) 악기는 대부분 기구를 사용해 연주하거든요. 그런데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손가락으로 연주를 해요. 손가락이 부르트고 상처도 나지만 아픔을 감내하면서 진짜 소리를 찾는 거죠.”
동생 사랑씨의 가야금에 대한 애착도 언니 못지않다. 사랑씨는 “가야금은 연주자의 성정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특별한 악기”라고 말했다.
“장시간 가야금을 뜯으면 손이 아파오지만 그런 아픔조차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이 돼요. 연주자의 마음과 생각이 가야금을 통해 전달된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희 자매는 행동거지부터 완벽한 연주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요.”
동생의 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남달랐다.
“언니는 동생인 제가 봐도 대단해요. 제가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하고, 결혼할 동안 언니는 오로지 가야금밖에 없었어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언니는 가야금, 그리고 전통 음악 생각뿐이에요. 가야금이 이예랑을 만나서 운 트인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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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4시간 중 20시간 동안 가야금 연습을 하던 예랑씨는 한때 양쪽 앞가슴 근육이 마비되고 엄지손가락 인대 주위의 막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가야금 연주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진단이 나왔을 때도 그는 무대에 올랐다. 두 시간 동안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주사약을 투여하고 무대에 오른 것이다. 가야금에 대한 이들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전이에요.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 앉아 있던 분과 눈이 마주쳤는데, 눈물이 잔뜩 맺힌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시더라고요. 순간 <나는 가수다>나 <불후의 명곡> 방청객인 줄 알았어요(웃음). 그분의 눈빛과 표정을 아직 잊지 못해요. 그때 결심했어요. 단 한 분에게라도 이런 울림을 드릴 수 있다면, 평생 이 길을 가겠다고요.”
가야랑은 현재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축제 아리랑’에 참여해 우리 가야금의 우수성을 알렸다. 가야랑은 월드스타 비와 함께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다. 특히 가야랑의 ‘아리랑 2중주’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공연이 끝난 후 많은 외국인 스태프가 저희를 찾아왔어요. 담당 스태프는 10월 뉴욕에서 열리는 UN데이 행사에 출연해달라고 즉석에서 제안하기도 했어요. 정말 행복해요. 우리 가야금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더 생긴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