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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하고 나오다 총에 맞아
증 언 자 :박금희(여)/박병민(부), 문귀덕(모)
생년월일 :1963. 7. 19(당시나이 17세)
직 업 :고등학생(현재 사망)
조사일시 :1985 S
개요
헌혈하고 나오다 공수부대의 총에 맞은 춘태여상 3학년 박금희 씨의 부모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춘태여상 3학년
1950년 당시 금희는 춘태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때는 학교가 남광주역 부근에 있어서 지금의 세종아파트 근처에서 살았다. 농성동 로터리 부근까지 걸어나가 5번 버스를 타고 다녔다. 5월 19일 학교수업을 마친 후 5번 버스를 타고 도청을 거쳐 오던 중에 저 나름대로 호기심이 생겼는지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도청에서 내렸다 한다. 그날 나는 전남대병원 근처의 친구집에서 계모임이 있어 갔다가 시내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일찍 계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금희가 평상시보다 훨씬 늦게 돌아왔다. 도청에서 집까지 걸어왔다면서 대뜸 하는 말이, "엄마! 도청 분수대 앞에서 공수대원이 여대생 한 명의 팔을 벌려놓고 유방을 도려내고 있었어." 그 말을 듣고, "여대생이 뭔 죄가 있다고 그렇게까지 했을끄나아? 도대체 뭔일 났다냐?" "데모가 나서 그래." 금희는 그렇게 대답했다. 다음날 집 주위에서 무장을 한 군인들이 왔다갔다했다. 전날보다 분위기가 더 무서웠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며 수군거렸다. 등교준비를 하는 금희를 보고 어쩐지 불안하여, "학교 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 학교에서 연락은 안 왔지만 안 가는 것이 좋것다. "하며 걱정을 했더니 기어이 학교를 나갔다. "나는 학교 선도부장이니 가야 해요."그날 금희는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당시 대인시장 부근에 사는 둘째딸 금숙이 집에서 잤다. 금숙이가 걱정하며 "너 집에서 기다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하고 묻자 "오늘은 갈 수가 없어" 하더라고 했다. 금숙이가 금희의 팔을 보니 주사 바늘 흔적이 보였고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 오다가 헌혈하러 갔던 모양이다. 몸에서 알코올 냄새가 나면 부모가 걱정할까봐 언니 집으로 갔던 것이다. 금희가 맨 처음 헌혈한 것은 1975년 5월 26일이고, 1979년 11월 27일에도 각각 320시 했다. 금희가 헌혈했던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으나 1980년도에 와서 헌혈카드를 보여주며 "엄마! 필요할 때 쓰세요"하여 알게 되었다.
시위대 차량을 타고
5월 21일 집 근처 텃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침 일찍 금희가 돌아왔다. 언니 집에서 자고 택시를 타고 오는데 대학 1명이 쫓겨오면서 숨겨달라고 하여 그 학생을 함께 태우고 오다가 안전한 곳에서 내려주었다고 했다. 금희가 돌아와 안심을 했지만 혹시라도 밖에 나갈까봐여러 가지 일을 시켰다. 언니집에저 아침을 안 먹었다고 해 밥 먹으라고 하니 알코올 냄새가 난다며 한술도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데모대가 농성동 쪽으로 몰려드는 것을 보더니 밖에 나가려고 했다. 내가 못 나가게 말리자 금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대학생들이 다 죽으면 어떡해요? 전두환이 대통령 되려고 한단 말이에요!" "뭣이야?전두환이 번데기공장 사장인디 뭐가 돼야?"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번데기공장 사장을 말하는 줄 알고 그렇게 말했더니, "엄마는 전두환이 번데기 사장만 있는 줄 아요? 그 전두환이 대통령을 하면 또다시 독재정치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금희를 못 나가게 하려고, "너 하나 죽는다고 다 된다냐?"하고 버릴 성질을 냈다. 그 후로 꼼짝 못하고 누워서 책을 보다가 잠을 자는 것 같았다. 그때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가게에 '환희'를 사러 가면서 밖에 문고리를 걸고 숟가락을 꽃아두었다. 우리 집은 상무대와 가까워서 공수부대원들이 자주 얼씬거려 불안했던 것이다. 가게에서 담배를 사고 있는데 금희가, "엄마!"하며 뛰어왔다. "어떻게 나왔냐?"하고 깜짝 놀라 물으니, "화장실 가려고 나오는데 문이 잠겨져 있어 그냥 문을 두드리니까 옆방 사는 사람들이 열어졌어." 나는 그애 두 손을 잡아끌며, "상추라도 뜯어서 밥 먹자." "엄마! 저 쑥 뜯어서 쑥버물 해먹세." 그 말을 들은 나는 이제는 안 나가겠구나 실어 안심이 되었다. 집으로 와서는 새로 산 슬리퍼에 위아래 검정색 옷을 입고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 밭에 나갔다. 잠깐 동안 밭일을 하고 11시쯤 집에 오니 금희가 없었다. 덜컥 겁이 나서 이웃 아줌마에게 물어보았다. "금희 어디 가든가?' "진작에 진흥원 쪽으로 갑디다." 그 길로 나는 금희 단짝인 일심이 집으로 달려갔다. 마침 일심이는 집에 있었다. "나는 너랑 같이 간 줄 알았더니 너는 있었구나!""금희가 왔었는데요, 시위대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타고 다시 갔어요" 한참을 찾으러 다니다가 시계를 보니 5시가 다 되었다. 모든 친척집에 연락을 해봐도 금희는 없었다.
금회가 죽었어라우
5월 22일 식전(아침)에 도청으로 갔다. 길바닥에는 피가 낭자해 있고 신발만 무더기로 널려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금회가 신고 나간 파란색 슬리퍼가 있는가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도청 주위를 샅샅이 찾아봐도 금회가 없어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대인동 근처까지 가게 되었다. 하도 목이 말라 딸 금숙이 집으로 갔다."물 한 모금 주라!"하고 담배 한 대 태우고 있는데 우리 이웃집에 사는 정근이 부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아줌마! 금희가 죽었어라우!" 무슨 소린가 하고 어리벙벙해 있는데 곧이어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들어왔다. 학교 선생님들은 농성동 집으로 갔다가 내가 없어서 이웃집 사람이 대인동 딸집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엄마는 여기 계세요! 확인해 본 뒤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 "따님이 죽었소." 확인도 하지 않고 무조건 태워다주었다. 기독병원으로 가서 사망자 명단을 살펴보니 '김금희'만 있고 박금희는 없었다. 시체확인 좀 하자고 하니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작은사위를 보호자로 세우고 '김금희'의 시체를 찾았다. 시체실은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시체실의 맨 구석진 벽에 검정색 셔츠와 검정 바지를 입은 시체가 있었다. 틀림없는 금희였다. 나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고 뒤처리는 작은사위가 처리했다. 작은사위가 시체를 보니 하복부에 총알을 맞았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관통하여 오른쪽으로 창자가 흘러나와 있었다고 했다. 시체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창자가 나와버린 배를 누군가가 웃옷을 벗어 감싸주었다. 배를 싼 다음 시체를 관에 넣었는데 낯선 청년 한 명이 계속해서 금희 옆에 앉아 있었다. 입관을 마치고 상무관으로 싣고 갈 때까지도 울면서금희 관만을 보고 있었다. 경황이 없어 왜 그러는지, 아는 사람인지를 물어보지 못했다. 그가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헌혈하고 돌아가는 길에
금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보려고 기독병원 간호원에게 물었다. 그녀는 금희가 그곳에 자주 왔기 때문에 알고 있다며 21일 오후에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갔다고 했다. 헌혈하고 나가서 1시간쯤 뒤에 시체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헌혈을 하고 돌아가던 중 공수들의 총에 맞은 것 같다. 금희는 자식 7남매 중에서도 유독히 부모를 끔찍히 생각했다. 그런 금희를 시체로 찾고 보니 눈앞이 깜깜했고 어린 딸을 어디에 묻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집으로 데리고 가자!'고 하였고, 주위 사람들은 "도청으로 가시오!"라고 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집 근처에 세종아파트가 있었는데 남의 아파트 앞에다가 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도청 앞에 놓아두면 여러 날이 걸려서 부패된다고 했지만 나는 "땅속에서 썩으나 바깥에서 썩으나 썩기는 매 한가지가 아니오?" 하고 도청으로 옮겼다.
22일 도청 분수대 앞에 가져다두었는데, 23일에 가보니 상무관으로 옮겨져 있었다. 상무관에서 금희 관을 지키고 있는데 관이 어찌나 많던지 관 옆에 사람 하나 앉을 틈이 없었다. 겨우 관 사이 틈을 헤집고 앉아 처음 보는 유족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곳곳에 피워놓은 향불에 그슬려 치마 하나가 다 탈 뻔한 적도 있다.26일도 상무관에 들렀다가 걸어서 집까지 오는데 광천국민학교 앞에서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한 명이 너덧명의 사람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자신의 차를 타고 광주로 오다가 길이 막혀 보성에다 차를 맡기고 광주로 들어왔다고 했다. 5월 27일엔 상무관에 갈 수가 없었다. 경찰서장과 도지사가 안에 들어가서 널을 새것으로 바꾼다고 했다. 무명베를 필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의사, 검사 등이 시체를 재부검했던 모양이다.
도청 직원 한 사람이 가르쳐주었다. "내일은 상무관으로 오지 말고 서방으로 나오시오. 서방에서 망월동으로 싣고 가겠소." 5월 28일 서방 삼거리로 나갔다. 시체를 담은 관을 쓰레기차에 싣고 망월동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식구들과 함께 시청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망월동으로 갔다. 사방에 널이 널려 있고 파리가 들끓었다. 이미 먼저 도착해 묘를 쓰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금희를 망월동에 매장하고 돌아왔다. 유족회 활동은 1981년부터 망월동에 다니면서 유족들과 알게 되어 시작했다. 옛날 임금은 잘못한 사람들만 잡아다가 귀양보냈는데 요즘은 어떻게 된 세상인지 무조건 잡아 간다. 전두환이 내려온다거나 무슨 행사가 있다 하면 형사들이 집 주위를 지켰다. 시장 간다고 해도 자기들이 대신 시장을 파다 준다고까지 하며 꼼짝도 못하게 했다. 전두환이 광주에 올 때면 일주일 전부터 지켰고, 전북,나주,구례 등 여러 곳에 싣고 가서는 오리나 십리 간격으로 한 명씩 내려놓고 가버리기도 했다. 그들이 생면부지의 곳에 내려놓고 우리는 물어물어 어렵게 광주로 돌아와야 했다. 몇 번 그런 일을 당하다 보니 이제는 꾀가 생겨 흩어졌던 유족들과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 함께 광주로 오곤 한다. 그래도 생전 처음 가본 곳이라 유족들과 못 만나고 혼자 광주까지 오는 유족도 있다. 어렵게 다시 만난 유족들은 분통이 안 풀려 근처 관공서에 쳐들어갔다. 치마에 돌을 담아가지고 전두환 사진이라도 두들겨 깨 버려야만이 그저도 속이 풀렸다. 어느 해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유족들이 버스 2대를 빌려 청와대를 가기로 했다. 플랭카드와 5·18 유족회라는 띠를 두르고 서울 미대사관 담 옆에 차를 세워두었다. 일부는 구호를 외치고, 일부는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교통순경에게도 유인물을 주면서 한번 보라고 했다.
그렇게 하자 경찰들이 유족회 회장인 전계량 씨를 연행해 갔고 유족들 거의 절반을 싣고 경기도로 가버렸다. 남은 유족들은 연좌농성을 했다. 연행해 간 유족들을 보내주지 않으면 우린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니 그 사람들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고 안병복 씨의 부친 고 안삼태(1988년 7월경에 사망) 씨가 차 속에서 먹으려고 준비해 간 막걸리를 들고, "네, 이놈들!"하고 마구 뿌렸다. 우리도 모두 합세해 막걸리를 뿌리며 대항하자 그 사람들이 너나없이 도망을 갔다. 그 장면을 보고 유족들의 가슴은 후련했다. 그러는 동안 경기도까지 끌려간 유족들은 어딘지 모르는 곳을 자꾸만 가고 있었다.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우리는 광주에서 온 사람으로 5·18유가족입니다. 5·18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전혀 모른다 하고 유족이 대충 설명을 해줘도 "무슨 그런 일이 있다냐?' 의아해 했다. 우리가 미대사관 담 옆에서 연좌농성을 하고 있자니 저녁쯤 돼서야 유족들을 다시 데려다주었다. 끌려갔던 유족들과 만나 광주로 내려왔다. 타지로 연행되어 가는 것이한두 번이 아니므로 두려운 생각도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반드시 광주 5월은 그 진상이 밝혀져야 하고, 그에 따른 응분의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 누가 잘못을 했는지를 가려내야 마땅하고 유족들을 비롯하여 모든 5·18 피해자들에게 8년 동안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마땅히 보상해야 한다. 1950년 당시에는 최규하가 임시 대통령으로 있었기 때문에 '현직 대통령이 있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당시 광주상황이 점차로 어려워지고 온 시민이 분노에 떨고 있을 때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금희가 죽기 전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려고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 때도 번데기공장 사장 전두환 씨만 알았지 또 다른 전두환 때문에 많은 광주 시민이 죽어간다는 사실은 몰랐다. 금희가 죽고 난 후 근 2년 동안 밥을 해본 적도 없고 술과 담배로 살다보니 폐가 못 쓰게 되었으나 치료 후 다시 건강하게 되었다.(조사.정리 서삼미) [5.18연구소]
첫댓글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