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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tteo Paganelli |
나의 상품 가치를 피력하는 자기소개서에도 취미가 쉬이 등장하는 까닭입니다. 남들 다 하는 기본적인 것들은 다 했고, 덧붙여 이것도 했다는 처절한 선언. 우리의 취미에는 뼈아픈 투자가 녹아있습니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루덴스》를 쓴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는 온전한 자유를 추구하기에 유용성을 전제하지 않으며 놀이하는 사람은 놀이 대상에 대해 이해관계나 목적의식이 없는 무관심한(일상적인 ‘관심 없음’의 의미보다 이익〔interest〕에 대한 무관심에 가깝습니다) 태도를 갖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놀이에는 자유가 없고, 이익과 관심이 넉넉합니다. 우리는, 이미 놀이를 잊었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 놀지도 말라
그렇게 취미는 문화의 문제로, 문화는 계급의 제문제(諸問題)로 움직입니다. 취미는 문화의 부산물이고, 문화는 계급의 생산물이니까요. 우리 사회가 발급한 빈곤한 취미의 소유자인 20대는 우리 사회가 갖는 문화와 계급의 외연과 내연을 잘 보여줍니다. 그 알량한 대학 합격증을 따기까지 시키는 공부만 했는데 그동안 취미 활동 하나 안 하고 뭐했냐는 말을 들으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말했듯, 문화는 그 자체로 자본입니다. 그는 개인의 말투나 예절, 교양 수준과 취향마저도 체화된(embodied) 문화자본이라 합니다. 20대는 부모님의 영역 아래 있는 10대보다도 문화자본이 빈곤하기 쉽습니다.
기실 우리 세대의 문화자본은, 취미생활은 참 빈곤합니다. 5천만이 사는 나라에서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그리 자주 쏟아질 수 있는 이유는 이 나라 시민들(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영화관에 앉아서 틀어주는 영화를 보는 것 말고는 마땅한 취미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투쟁적 삶 속에서 취미는 고단한 심신을 달래주는 안정제이고, 뮤지컬이나 오페라, 하다못해 콘서트는 너무 값비싼 안정제입니다. 주말에 근처의 영화관에서 때우는 간단한 정신적 고양 정도로 충분합니다. 〈명량〉과 같은 고품격 싸구려 영화가 1,700만 관객을 얻은 맥락입니다.
그렇게 취미는 노동 생산성을 위한 땔감으로 변모합니다.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문예비평가 게오르그 루카치와 벌인 예술에 대한 토론에서 예술은 다분히 재창조적(Recreational, ‘Recreation’은 어색하지만 ‘레크리에이션’은 익숙하지 않으신지요?)이라고 피력합니다. 반복적인 일상에 지쳐 머리를 식히기 위해 예술을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성룡의 〈러시 아워〉 시리즈와 마이클 베히의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며 우리는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영화가 끝나면 잠에 듭니다. 그렇게 예술을 통해 다음날 노동할 체력을 구비합니다.
그러나 루카치의 생각은 다릅니다. 상위 계급이 눈을 가려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 하위 계급들에게 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계급 갈등의 현실을 철저히 반영하는 것이 예술의 의의이고 목적이라고요. 이러한 예술관을 담은 영화를 본 날 밤은 뜬눈으로 지새울지도 모릅니다. 이전까지 알고 있던 나의 굳건한 세계관에 금이 가고, 내 삶을 반성적으로 통찰해볼 수 있는 혁명적 시간이니까요. 전혀 다른 의미의 재창조(Recreation)가 이루어집니다. 예술의 향유는 어떤 맥락에서건 재창조를 생산한다는 것이 우리가 이 두 지식인의 고루한 논의에서 배울 점이겠습니다.
콩 심은 데 콩
그렇다면 이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질 차례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재창조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수강생 4분의 3이 자기소개 시간에 취미라고 말했던 잠자기도 훌륭한 재창조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숙면이 충분한 정신적 고양의 조건이 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시키는 공부만 하다가 대학교 학생증을 땄고, 다시 시키는 공부를 하면서 대기업 사원증을 따야하는 헬조선 세대는 어떤 재창조를 누릴 수 있으려나요. 캠퍼스의 잔디에서 통기타라도 두들길 수 있었던 청춘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여가마저 ‘스펙 쌓기’의 일환이 된(대형 동아리는 3차 면접까지 본다더군요) 얼어붙은 청춘의 멸종한 취미는 일상을 빈약하게 합니다. 빈약해진 일상은 취미를 통한 재창조를 제한하고요. 이런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착실하고 충실한 헬조선의 젊은이로 재탄생하는 것이겠지요. 어른들과 선생들이 허락하지 않았던 우리의 취미생활은 단순한 일탈로 치부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명문대와 대기업이라는 핏빛 레드오션에 목을 내걸었고, 그 피비린내 나는 경쟁 속에서 정신을 달랠 수 있는 안정적인 안정제 하나 찾지 못했습니다. 씨앗을 심은 적이 없는데 무슨 열매를 기대하겠습니까.
죽은 풍요의 사회
흔히들 20대, 젊은이, 혹은 20대의 젊은이를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세대’라고 지칭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섭습니다. 무얼 준비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이들도 많을뿐더러, 준비할 것이 살인적으로 많아 괴로워하는 이들도 참 많습니다. 저는 그러한 우리 세대가 50대가 된 사회를 자주 상상합니다. 헬조선 세대가 기득권이 되어가는 사회를 그리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취향의 빈곤입니다. 지금의 대다수의 50대처럼 멋도 맛도 없는 중년이 되어 가지 않을까, 그렇게 늙어가는 우리가 젊은 세대의 무기력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빈곤한 어른이 되지는 않을까.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 이상으로 저는 취향의 빈곤이 두렵습니다.
시인의 손은 갖지 못해도 시인의 눈은 갖고 싶습니다. 시인의 연필이 되지 못한다면, 시인의 안경이 되고 싶습니다. 뛰어난 예술의 제작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빛나는 인류의 창작품들을 보고 느끼고 싶습니다. 창조하지는 못하더라도, 재창조당하고 싶습니다. 미래 사회의 가치를 위해서 우리가 취미와 취향을 개발하고 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건강한 사람이 되어 산업 역군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누리기 위해서이듯, 우리가 이전까지 누리지 못했던 풍요 속의 정신적 빈곤의 근절을 목표로 허기를 채우고 싶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누릴 빈곤한 삶 속의 마지막 풍요를 위하여.
김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