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욕장 방면, 시내 방면 두 노선으로 나누어 역사 정면에 있는 정류장이 해수욕장 방면이고, 좌측 정류장이 시내방면입니다. 배차시간은 10분간격으로 이동이 아주 편리하다.
성주산 방면은 요양병원에서 환승해야 되나, 대천역에서 1km정도 되므로 도보로 10분정도 이동하면 될수 있는 거리임.
☛귀로 : 요양병원에서 도보로 대천역이동 열차편으로 귀로하다.
☛자유인 조동화 성주산 자연휴양림 삼림욕 소감
자유인 조동화는 오늘 성주산자연휴양림 화장골 숲속에서 삼림욕을 즐기고, 화장골 등산로를 따라 심연동계곡길로 이동하여 성주사지까지 걷고자 도시락과 간식을 준비하여 집을 나섰답니다. 간식은 복숭아2개와 바나나2개를 아내가 배낭에 넣어주었다.
성주산자연휴양림은 옛 탄광지역으로 자연휴양림으로 개발했으며, 화장골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약 4km에 걸치는 하늘로 쭉쭉 뻗은 숲이 장관이었으며, 만수산까지 등산하는 동안 흙길은 없고 등산로가 자갈길이라 그다지 좋은 등산로는 아니나 발바닥 용천을 자극하여 발바닥에 지압효과는 좋을 것 같았다.
자연휴양림 편백숲에 삼림욕 두어시간후 아주 천천히 만수산575m까지 오르는 동안 큰 소나무가 많아 유심히 관찰한바 소나무 밑둥에 껍질이 벗겨지고 칼로 골을 탄 상처가 나 있었다.
이는 태평양전쟁(2차대전)때 일제가 자원부족으로 한국인을 이용하여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다.
성주산은 옛 탄광지역으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출입이 금지되였던곳으로 삼림이 울창하여 아직도 천혜의 원시림처럼 청정지역으로 삼림욕 피톤치드 마시려면 성주산 화장골4km 삼림욕을 권장하고 싶은곳이다.
깊고 깊은 넓고 넓은 성주산!
8월에 이여 두 번째로 성주산자연휴양림 화장골4km 삼림욕!
날씨가 좋아 화장골과 심연동 깊은 산중의 공기는 무엇에 비교할수 없이 최고의 보약을 먹고 왔다고 자랑하고 싶더이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명언을 했지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에 열중하라.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걷는 것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약’이라고 말했다.
걷자! 또 걷자. 틈나면 걷자.
자유인 조동화는 시간이 나면 산과 들녘 강가를 천천히 걷고 또 걸으며 자연이 준 천연 보약을 많이 섭취하고자 한다.
인생의 삶의 행복이 무엇인가?
자유인의 신조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행복을 느끼자”입니다.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일제말기(1943~45년 2차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해서 군수물자인 항공기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흔적으로 70년이 지난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성주산에는 큰 소나무들이 등산로에 많이 있는데 거의 모든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지고 칼로 골을 탄 상처가 선명히 남아 있다.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때 전투기 항공유가 많이 부족했으므로 소나무 송진을 정제 가공하면 테려빈유라는 기름이 되는데 항공기용 기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는 전국의 굵은 소나무에 껍질을 벗기고 흘러 내리는 송진을 받아 기름을 만들었지요.
전국 각지에 아름드리 소나무는 이런 상처가 남아 있으므로 등산 하실적에 소나무 주의깊게 살펴보세요.
"일제는 쓸만한 소나무마다 껍질을 벗기고 톱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만들어 송진이 쉽게 흘러내릴 수 있도록 깊은 생채기를 냈고 채취된 송진을 1차로 끓여서 가공한 후 드럼통에 넣어 반출해 군수물자로 사용했다"고 한다.
송진을 모으기 위해 일제는 소나무마다 최대 가로 70㎝ 세로 100㎝를 절개한 일제 36년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직접 가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소나무들의 생명력은 대단해서 쓰러지지 않고 우뚝 우뚝 서 있습디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진정한 자유인 세월을 낚으며 충남 대천에 자리 잡아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최철수목사와 2015년11월20일 국립철도학교 전수부3기생동기회 모임에서 만났던추억을 떠올려 사진으로 추억하다.
사실 오늘 대천에 와 성주산자연휴양림 삼림욕을 하며 동기생인 최철수목사 모습이 떠올라 만나고 푼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귀로 하면서 전화연락이 않되여 아쉬움이 남아 사진으로 나마 추억을 떠 올린다.
최철수목사 그대는 국립철도학교 전수부3기생으로 1970년 철도에 부임, 목사의 꿈을 안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 목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이제 세월의 여로에 새로운 직업을 찾아 직장인으로 생활하고 있다니 축하합니다.
더욱 더 발전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자유인 조동화>
☛열차 교통편
출발 1554 익산6:45-대천7:55도착, 4,300원
1154 익산8:20-대천9:25 6,300원
1556 익산9:00-대천10:09도착,
귀로 대천역 1561 무궁화16:59-익산 18:08
1157 새마을17:46-익산 18:46
1563 무궁화19:01-익산 20:07
☛대천역에서 성주산가는 교통편
대천역앞 100번버스 승차 보령요양병원 하차, 800대버스 환승 1일 45회 10km 15분 소요 성주삼거리 하차
☛보령의 성주산(680m)
성주산(680.4m)은 보령시 성주면과 청라면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장군봉으로 불리는 성주산의 주봉은 680m이다.
성주산에는 성주산 자연 휴양림이 들어선 화장골과 심원골 계곡이 유명하다.
198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가 진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성주산 일대는 충남 최대의 무연탄 생산지로 전국 무연탄생산량의 약 13%를 차지하면서 지역경제의 큰 축을 담당했다.
☛성주사지
성주 삼거리에서 북쪽 길로 1km 거리에 이르면 도로 왼쪽으로 널찍한 절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유명한 성주사지(사적 제307호)다.
성주사는 신라 말기에 이름을 날렸던 선문 9산중의 하나로 역사적 중요성과 문화재적 다양성을 지닌 사찰이나 폐사되어 현재 절이 세워져 있던 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에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8호)를 비롯하여 성주사지오층석탑(보물 19호) 등이 우뚝 서 있어 번창했던 신라불교의 웅장함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성주산자연휴양림
성주산 자연휴양림은 산림청에서 폐광지역을 개발하여 휴양림으로 조성한 곳이다.
대천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지나 성주삼거리에서 하차한 후 15분 정도 걸어가면 휴양림 입구에 다다른다.
화장골에서 심연동계곡까지는 걸어서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성주산자연휴양림은 차령산맥이 빚어낸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으로 성주면 성주리의 화장골계곡은 4km에 이르는 울창한
숲이 장관인 계곡으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성주사 유래
백제 법왕이 이곳에 오합사를 세우고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려 한 것은 599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1400여년전의 이야기, 그 때야 말로 성주산 송화가루는 서해까지 흘러갔을 것이고, 백제의 왕실은 관솔불을 대낮처럼 밝힌 채 지성으로 유주무주 고혼들을 달랬을 것이다. 백제의 오합사가 지금의 성주사로 사명이 고쳐진 것은 통일신라의 대표적 고승인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에 의해서이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8세손으로 그 시호는 낭혜(郞慧)이다. 그는 25년 간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웅천(보령의 옛 지명)의 호족 김양의 권고로 이곳에 와 크게 선풍을 진작했다. 무염은 당시 사회의 모순을 직시한 몇 안 되는 성인 중의 성인이요, 선지식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성인이 머무는곳, 즉 성주사(聖住寺)로 불렀던 것이다. 그가 성주사에 자리를 잡고 ‘무설토론(無說吐論)’을 주창하자 그를 따르는 제자는 수천 여명에 달했고, 전각은 960여 간에 이르러 당시의 선문 가운데 가장 번성했으며, 곧 구산선문의 최대파인 성주산문을 이뤘다.
진성여왕 2년 88세로 무염이 입적하자 왕은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부도비를 세웠다. 이 비가 절 터 서북쪽 전각 안에 남아있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郎慧和尙白月寶光塔碑, 국보 제8호)이다. 물론 이 부도비의 재질은 이곳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이다. 문장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지었으며, 글씨는 그의 사촌 동생 최인곤이 썼다. 이 비는 신라 부도비 중 규모, 조각, 문장 등 모든 것이 빼어나 신라 하대 부도비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불렀으나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無染:801~888)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울면서 절 주위를 맴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1968, 197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塑造佛頭)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현재 중요문화재로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聖住寺址郎慧和尙塔碑: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제19호), 동서 일렬로 배치된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과 보령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보령시 유래
1914년 보령,남포,오천군이 보령군으로 통합되었고 1986년 보령군이 보령군과 대천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1995년 대천시와 보령군이 보령시로 통합이 되었습니다. 현재 보령시는 16개 구역(웅천읍, 주포면, 주교면, 오천면, 천북면, 청소면, 청라면, 남포면, 주산면, 미산면, 성주면, 대천1동, 대천2동, 대천3동, 대천4동, 대천5동)으로 나뉘어 행정과 시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령시 홈페이지 옮김===
<일제말기(1943~45년 2차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해서 군수물자인 항공기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흔적으로 70년이 지난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성주산에는 큰 소나무들이 등산로에 많이 있는데 거의 모든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지고 칼로 골을 탄 상처가 선명히 남아 있다.
성주산 뿐만 아이라 전국 각지에 아름드리 소나무는 이런 상처가 남아 있으므로 등산 하실적에 소나무 주의깊게 살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