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김해영’의
『청춘아, 가슴뛰는 일을 찾아라』를 읽고…
잠실2 방면 선무 김성현
보고 싶던 책을 손에 넣고 신나게 수호 초소로 갔다. 삼복더위 중이라 날씨는 아침부터 후끈했다. 서울에선 늘 칼라 없는 티셔츠만 입다가 도장에 와서는 예를 갖춰야하기에 칼라달린 윗옷을 입어서인지 목 뒤에선 비지땀이 흐르다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 땀띠가 돋는 거 일거다. 한 장 두 장 넘어가면서 더위는 차츰 잊혀지고 책 속에 빠져드니 무더위에 책 읽는 것도 제 맛이었다. 이어령 교수를 포함 무려 5명이나 추천서를 써주셨는데 추천서와 작가의 서문을 읽기 시작했을 뿐인데도 눈물은 가슴 속에서 울컥울컥 올라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감동이 잦아지는 것 같다. 낼 모레가 불혹의 나이 마흔일 뿐이지만, 순간순간 많은 것에 미혹되고 감정적일 때가 많다. 책을 다 읽어가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독서 감상문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사람에겐 이 책을 사서 권해주고 싶었다. 뭐, 열심히 살라는 무언의 압박이라기보다는 내가 가졌던 감동을 전해주고 싶어서였고 또 한 가지, 이 책의 인세는 국제사회복지 사업에 쓰인다니 말이다. 김해영(47)씨는 134cm의 작은 키에 척추장애를 딛고 세계를 누비며 낙후된 나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국제 사회복지사다. 태어났을 때 여자애란 이유로 술 드신 아버지가 벽에 던져 척추장애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정신질환을 자주 앓으셨고 아버지는 이후 자살했다. 가난한 집안 5남매 중 맏딸이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키웠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월급 3만원에 남의집살이를 시작했다. 열네 살 식모는 한의원집에서 약재방의 한문을 궁금해 하다 천자문을 익혔다. 우연히 알게 된 작은 배움이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은 것이다. 그때부터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고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원동력이었다. 평생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두려웠던 그녀는 직업훈련원에서 편물기술을 절실한 마음으로 익혔다. 한 회사에 안주해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편한 길 대신 여기저기 편물회사를 다니며 전문기술을 습득했다. 그 결과 1985년 콜롬비아 세계 장애인 기능 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게 된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손은 항상 책에 있었다. 특히 사서오경과 같은 고전은 그녀에게 삶의 좌우명을 일러주었다. 요즘 강남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인문고전 클래스를 시키는 게 붐이라고 한다.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읽으며 잠재의식에 심어지는 씨앗…. 여하튼 그러면서 그녀는 검정고시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입학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시험도 통과하였으나 대학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리 준비해둔 한문 덕에 일본산업연수생과정을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불타는 학구열로 일본어까지 마스터하게 되어 일본 편물회사 한국지부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장애인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능력 있고 성실한 전문기술자로 인정을 받았다. 김해영씨의 내면 깊은 곳의 학구열이 자신도 모르게 미래를 준비해 주었고 學, 배움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세계가 하나씩 차례로 열렸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학취개진(學就開進)’의 삶이라 말한다. ‘배움으로써 어려움을 이기고, 배움으로써 꿈을 찾고, 배움으로써 비전을 세우며, 배움으로서 삶을 나눈다.’ 그녀에게 배움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문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 같은 것 말이다. ‘화평의 길’의 마지막 장면에 댐의 물이 방류되면서 대원종이 울리며 내레이터가 하는 말이 있다. “등불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자는 어두워져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전경』에 “또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이르시니라. ‘옛적에 한 농부가 농한기인 이른 봄에 쉬지 않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자기 논에 수원지의 물이 잘 들어오도록 봇돌을 깊이 파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보고 공연한 노력이라고 비소하더니 이해 여름에 날이 무척 가물어 그 들판이 적지가 되었으나 봇돌을 파 놓은 그 농부는 아무 근심 없이 물을 대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으니 이런 일을 명심해 두라’하셨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 도인들에게 미리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은 눈에 잘 드러나는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남모르는 마음공부이다. 운수와 도통은 목매어 기다리는 게 아니다. 수도 역시 누가하라고 해서 하는게 아니라, 찾아서 우러나와서 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닦고 공덕을 쌓으면 하나의 겁액이 풀어지고 그만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그렇게 나아가고 나아갈 때 내 앞에 열리는 광명천지가 아닐까? 김해영씨는 공부하는데 경쟁상대가 같은 반 학생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그것이 공부나 학문의 세계에서는 불변의 진리라고 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시계추처럼 기도모시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수호서고, 공부 들어가고, 절의 행자처럼 수도해도 진도는 나가지 않고 주변을 보면 안 해도 잘 굴러가는 것 같아, 너무 덥다는 이유로 아님 슬럼프인양 쉬어가려고하는 나태한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나한테 지면 안 되는데 경쟁상대가 남이 아닌데 내 마음을 속이다니, 도인은 무자기인데….’ 김해영씨가 인정받는 기술자로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쓰러져 죽을 고비를 맞게 되었다. 그때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게 되고 좀 더 보람 있는 일, 눈앞의 이익에 혹하는 게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각성을 하고 아프리카 보츠와나 ‘굿 호프 직업학교’ 편물교사로 자원봉사를 지원했다.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한국에서 아프리카로 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아프리카 보츠와나 사람들과 청소년들에게 ‘You are so beautiful!!" 이라는 평생 들어보지 못한 찬사를 받았다. 그때 자라면서 받은 마음의 상처, 열등감, 자격지심 이 모든 게 치유되어 갔다. 한국에서도 어린 나이에 작지 않은 성공을 했지만 그것에서 오는 행복보다 아프리카에서 인정받고 사랑받는 삶이 비교할 수 없이 더 행복했다고 한다. 아프리카 사막에서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거나 소외당하지 않았다. 단지 보츠와나 사람들에겐 귀엽고 보호해주고 싶은 선생님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열리고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자신감과 자부심이 가슴속에서 솟아났다. 보츠와나의 학교는 재정이 열악한 곳이었다. 4년 후 위기가 찾아왔다. 학교운영자와 교사들이 어려움에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떠나 폐교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보츠와나 사람들과 협력해서 학교를 살려낸다. 그 후 10년간 보츠와나 ‘굿 호프 직업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운영 방식은 한국적이지도, 기독교 학교라고 신앙을 강요하지도, 그렇다고 보츠와나식도 아닌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불평불만보다는 장점을 보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교를 운영하며 무수한 시행착오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조율하고 화합해 나가는 ‘중찰인사’가 나에겐 여전히, 아직도 어렵다. 보츠와나를 비롯한 아프리카는 식량난, 물 부족, 에이즈, 방치된 장애인들, 여성들, 널려있는 술집과 미래가 없어 방황하는 청소년등의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들에게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심어주면서 그녀는 왜 이곳에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기위해 태어난 사람인지 스스로 알게된다. 그녀 인생의 가슴 뛰는 일을 찾은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을 깨닫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안에 잠든 거인을 깨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도를 하는데 있어서도 그냥 선각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해야 한다니까, 아니면 뭔가 있을 것 같아서, 이런 막연한 이유로 가는 건 한계가 있을 것이다. 지천명을 하고, 가장 가슴 뛰는 일이 수도라는 걸 깨닫고 뜻을 세울 때 어떠한 어려움에도 평생 수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김해영씨는 보츠와나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며 지원을 받게 되었고 사회복지에 있어 좀 더 배워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약대학을 거쳐 명문 콜롬비아 대학까지 세계 최고 엘리트들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며칠 전 시법공부였다. 정원, 내, 외수 1명씩 해서 3명이 공부방에 들어가 1시간 공부하고 나오면 잘 익은 토마토마냥 벌게져서 젖은 머리카락에선 땀방울이 떨어졌다. 우리는 남모르는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밤길을 달리는 차안에서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벅차 터질 것 같다. 남들은 깊은 잠에 빠진 새벽에 세상을 구하고자하시는 구천상제님의 뜻에 따라 천지공사를 받들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뛰었다. 한편으로 무사히 시법공부를 마쳤다는 안도감이 들어 마음이 편안했다. 나에게 마음공부란 큰 숙제였다. 예전부터 ‘마음’ 자 들어간 건 죄다 어려워서 ‘마음’ 들어간 말만 들으면 눈물부터 났다. ‘마음을 열어라, 마음을 담아서 해라, 마음을 어쩌고저쩌고.’ 죄다 무슨 말인지.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에서 우등생이 되는 게 아니듯 수도하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머리로 이해를 해야만 움직이려고 하니까 말이다. 학업이라는 말은 공부를 많이 하면 업장이 쌓인다는 말일까? 그래서 가방끈 짧은 게 업장이 덜해 수도하기 좋은 걸까? 그래도 박람박식이 두렵다고 하셨는데 견문을 더 넓혀야 되겠다. 참 기적 같게도 김해영씨는 직장생활을 할 때는 동생들을 키우느라, 아프리카에서는 자원봉사를 하느라 모아둔 돈이라는 게 한 푼도 없었는데, 비싼 사립명문대의 학비, 생활비 등 모두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했다. 인간관계를 이용하거나 모금운동을 하거나 한 것도 아니고, 공부에만 집중하였는데도 말이다. 물론 돈 걱정은 했지만…. 그녀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나 무위이화로 일이 이루어지는 걸 보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구나 생각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나 할까. 이제 그녀는 공짜로 공부한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겠다는 목표로 부탄에 직업학교를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국제사회사업을 진행 중이다. 얼마 전 방면에서 회관을 짓는 데 단청을 하게 되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단청을 하러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임원께서 불러주시고, 잡아주시고, 허락해주시고 해서 내게도 단청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생겼다. 너무 행복했고, 나대신 나의 일들을 해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써주시는 조상님께, 신명 전에 감사드렸다. 제발 두툼한 겁액을 벗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심고 드렸다. 예전에 공부나 수강, 연수든 가게 되면 그 기운이 방면에 수반들에게까지 다간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는데, 큰 기운을 모셔서 방면에 집안에 구석구석 미치기를 바랬다. 또 지금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고, 새로운 기운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산에서 입도를 하고 사업을 해보겠다고 서울에 올라와서 십여 년, 한 게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수반시절엔 날라리 한량이었으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현재 도를 닦지도, 도가 몸에 배이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적어도 난 수도가 나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수도를 통해 내 안에 잠든 거인을 만나는 일에 가슴 뛰고 있기에! 또 단청을 하면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김해영씨도 어떤 어려움과 장애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學, 배움을 통해 준비하고 이겨나갔고 사람들과 또 실전에 바로바로 부딪치면서 피하지 않았다. 주저하지도 피하지도 않고 김해영씨처럼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싶다.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싶다. 하늘에서 나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