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합평회 후 김광화 회원님의 '두 번째 서른 살 여행' 수정 작품을 올립니다.
두 번째 서른 살 여행
김 광 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고향 친구들과 대만으로 두 번째 서른 살 여행을 떠났다.
새벽에 집을 나서니 쌀쌀한 밤공기와 보름을 갓 넘긴 말간 달이 여행 떠나는 나를 배웅이라도 하듯 버스와 나란히 달렸다.
공항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음이 실감났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부산에 살고 있는 친구가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오는 나를 기다려 준 친구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게이트 입구에 줄지어 놓은 각양각색의 캐리어들이 여행을 실감나게 했다. 대만까지는 두 시간 반 소요에 시차가 한 시간, 새벽부터 서둔 탓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에 눈을 뜨니 타오위안(도원) 공항의 모습이 구름 아래로 보였다. 출입국 직원의 친절하고 신속한 수속이 기분 좋은 여행을 예고했다. 피켓을 들고 있는 가이드와 다른 팀을 만나서 수인사를 나눈 후 우리를 태운 버스는 국공내전 당시 중국 대륙에서 가지고 온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는 국립 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고궁박물관은 중국의 역대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문화재를 3개월 단위로 순환배치 하는데 모두 전시하려면 60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大國의 역사답게 종류도 모양도 엄청나게 방대한 유물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고궁박물관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한다는 동파육, 서태후의 옥으로 만든 병풍, 황제가 사용했다는 책상 등 색감과 문양이 화려하고 규모도 큰 수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것은 청나라 황제의 장난감 상아투화운룡문투구象牙透化雲龍紋套球였다. 1개의 상아를 밖에서부터 공 모양으로 조각하고, 그 안쪽에 하나의 공을 조각하고, 또 그 안쪽에 또 하나의 공을 조각하고…. 그렇게 만든 17개의 공이 각각 움직이는 이 조각품이 3대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하니 중국의 ‘만만디’사상이 이런 작품세계 속에도 나타난 것일까?
다시 내 발길을 붙잡은 조감람핵주雕橄欖核舟는 가로 4cm 높이 1.6cm의 손가락 마디만 한 배 모양의 감람 씨에 소동파와 8명의 문우들과 탁자에 접시까지 조각되어 있었다. 배 밑바닥에는 확대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소동파의 적벽부 357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달빛 쏟아지는 강에 배를 띄우고 풍광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허무함, 그리고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의문을 읊던 소동파와 문우들의 모습이 상상 속에서 그려졌다.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이런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대륙의 큰 땅만큼 모든 것의 규모가 큰 것에 익숙해 있다가 이렇게 세밀하고 오묘한 작품들을 만나니 우리가 선뜻 판단하기 어려운 중국인의 내면세계가 따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로 우리의 잰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서성이라 불리는 왕희지의 친필 쾌설시청첩快雪詩晴帖 앞이었다. 총 4줄 28자로 해서와 행서로 물 흐르듯이 쓴 서첩에는 시대별로 수많은 소장인印이 자랑스럽게 찍혀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친한 벗에게 반가운 마음으로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은 벗을 떠올리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유안진 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우리들 머리 위에도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려앉아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소중한 시간과 마음이 영원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옆에 있는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다음 날은 자연이 빚은 웅장한 해안 절벽과 태평양 바다가 어우러진 청수단애淸水斷崖와 수백 미터 절벽으로 둘러싸인 신비의 미로 태로각협곡太魯閣峽谷으로 향했다. 도로 옆으로 보이는 집들과 사람들의 차림새가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는 대만의 실체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 실용성이라고 했다. 오래된 건물과 이끼 낀 외벽을 둔 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태풍과 지진이 많은 대만의 자연환경에 최적화된 선택이라고 했다. 명품이나 브랜드보다는 검소와 효율을 중시하며, 중국이 추구하는 화려함과 웅장함과는 완연히 다른 실용과 소박함이 반도체 분야에서 선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했다. 또 공공질서를 잘 지키고 서로를 배려하며 예의 바른 모습은 이미 선진국이었다. 조용조용한 가이드 설명을 듣고 있으니 고등학교 때 영어 시간이 떠올랐다. 영어 교과서 1과의 제목이 한강의 기적THE MIRACLE OF HAN RIVER이었다.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발전이 곧 1인1카CAR, 해외여행의 자유화 시대를 가져올 거라는 영어 선생님의 자부심 가득한 설명에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했었다. 그 상상이 현실이 된 지금,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가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나를 매료시켜 중독처럼 더, 조금 더 하면서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조금씩 부끄러워졌다.
태평양의 파도가 빚어낸 해안절벽의 청수단애와 코발트 빛 바다를 배경으로 우리는 웃을 수 있는 최대의 웃음을 사진으로 담았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나의 소중한 친구들! 이 순간이 우리의 가슴에 담겨서 다시 솟아나는 행복한 샘물이 될 수 있기를….
아찔하게 가슴 조이는 태로각협곡은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와 침식 작용으로 생긴 수많은 구멍(연자구)으로 제비들이 바쁘게 드나들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흐르는 물은 석회수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인지 회색빛으로 보였다. 이 협곡은 중국과의 전투를 대비한 퇴각로로 죄수를 투입해 4년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자동화된 장비가 없던 시절에, 정, 곡괭이, 망치와 땀만으로 전체가 암반인 이곳에 192km의 길을 뚫으면서 사망한 200여 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장춘사가 두 줄기 폭포 사이로 보였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한 이곳이 관광지가 되어 있으니 묘한 아픔이 전해졌다.
다음날은 느지막하게 야류 지질공원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 바람에 부딪히고 파도에 깎이는 고통 속에서 제 살을 깎아내며 만들어진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태평양을 배경으로 환상적인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크고 작은 행복과 고통을 반복하면서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하듯이 느긋하게 다니면서 여왕머리, 버섯바위, 잉어바위 등등 모든 바위에게 악수를 청하고 숨길을 느끼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지인 지우펀으로 향했다.
그곳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찻집과 홍등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내가 서 있는 느낌이 들게 했다. 굽이굽이 골목을 지나 언덕 위에 올라서자 탐욕의 신에서 벗어나 평온한 모습의 가오나시와 나쁜 신들의 세상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한 치히로를 싣고 유유히 바다 위를 달리던 기차가 보이는 것 같았다. 영화가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긴 여정을 얘기했다면 나는 현재에 감사하고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지의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소원을 적어 하늘로 올리는 스펀 천등 체험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천등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 특히 자식을 위한 소원을 적는 친구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엄마였다. 우리의 소원을 적은 천등도 불꽃 꼬리를 달고 저마다의 기원과 환호 속에 둥실 두둥실 날아올랐다.
여행 일정을 모두 끝낸 밤, 어린 시절부터 어울려 놀았던 친구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서 각자의 생활로 친구들의 내면까지는 몰랐던 엄마, 아내, 며느리, 딸, 선생님… 등등의 이름으로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내 주변의 이름을 덜어내고 담담하게 상처의 민낯을 드러낼 수 있는 두 번째 서른 살에 진짜 인생은 지금부터라며 우리의 꿈들이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