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리릭 바람 한줄기가 벚나무 사이를 스쳐간다. 귀여운 엄앵란이 스포츠 머리 신성일을 향해 ‘나 잡아 봐라’ 하면서 나무 틈새를 뱅글뱅글 돈다. 아, 너무 옛날 사람들이구나. 느끼한 유해진이 으허허허 웃으며 김혜수를 붙잡으러 꽃잎을 맞으며 뛴다. 아, 그들은 헤어져 버렸구나. 뭐 하여간 봄날에 남자가 뛰고 여자가 달리고 전 인류가 일생의 어느 시기에 한번쯤은 다들 그렇게 뛰고 달리고 넘어지고 그것은 절대로 진부하지 않고 자, 이때쯤에 멋진 사운드트랙이 흘러야 하지 않겠는가.
“바흐 들으면 섹스 느낀다”던 시인
바흐에 대한 불경일까. 봄날에 벚나무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며 뛰노는 연인들의 장면에 나는 하프시코드로 연주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제17, 18, 19 변주를 삽입한다. 건반은 토카타풍에서 캐논풍으로 무곡풍으로 점점 빨라지고 연인들의 호흡도 점점 가빠지고 그렇게 한편의 국산영화는 완성된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뿐 내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가 버렸다. 그 대신 바흐가 있다. 그런데 왜 하필 바흐인가. 바흐의 음악은 무정형이기 때문이다. 악보에 악기도 연주방식도 지정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텐데 가령 키스 자렛이 61분쯤 걸려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로잘린 투렉 할머니에 이르면 74분46초가 걸린다. 엄청난 차이다. 글렌 굴드 이래 최고의 각광을 받고 있는 현역 피에르 앙타이의 2002년 레코딩은 78분 40초를 기록한다. 반면에 바흐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음악사적 사건이 되어 버린 글렌 굴드의 유명한 1954년 녹음은 아예 붕붕 날아다니듯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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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껏 나는 바흐의 음악이 어렵거나 무겁거나 부담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허삼관 매혈기’를 쓴 중국 작가 위화를 만나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열렬한 바흐 예찬자인 그가 ‘바흐의 음악은 멜로디가 배제된, 건축물 골조와도 같은 구조 구축의 세계’라고 역설하여 심히 주눅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바흐를 제대로 들으려면 그가 구축한 화성과 대위의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구조 파악은 염두에도 없이 예컨대 ‘평균율’의 그 기나긴, 반복되는 음표들을 질리지 않고 따라가는 나는 뭔가. 곰곰 생각해 보니 짚이는 데가 있다. 이른바 오디오 매니어라고 불리는 나 같은 부류들에게 음악은 절반만 작용하는 것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운드의 쾌감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듣는 것도 음악감상인가 싶지만 어차피 바흐는 연주자가 자의적으로 요리하는 해석의 세계가 아니던가. 사운드의 감촉을 중시하는 자에게 바흐 식의 무정형은 덜 부담스럽고 덜 무거울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연주자만이 부각되어 떠오르니까.
바흐 음악 방해하는 건 바흐 자신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많은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으로 향하는 입구 노릇을 하는 듯하다. 또 지속적으로 반복해 듣게 되는 곡이기도 하다. 공부 삼아 듣기도 좋지만 연인들의 ‘나 잡아 봐라’를 떠올리듯이 자유연상의 배경음으로도 훌륭하다. 그래서인지 정말 많은 음반이 나와 있다. 이질적 해석이 새로운 교과서가 되어버린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피해갈 도리는 없지만 그 외에도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안드라스 쉬프의 우미한 피아노 음색 역시 각자의 별자리로 우뚝하다. 하프시코드 버전은 앞서 언급한 앙타이의 명성이 워낙 대단하지만 뭔가 갈지 자 걸음인 듯 편안치 않게 연주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블랑딘 베를레를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 실내악곡으로 편곡된 연주들도 맛깔스러운 양념 노릇을 해준다.
바흐 음악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바흐 자신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초상화다. 두꺼운 가발에 싸인 굳고 무표정한 얼굴이 청중을 얼어붙게 만든다. 그런데 보라. 그의 자녀가 무려 스무 명이다. 작곡하는 낮뿐만이 아니라 밤에도 꽤 바빴을 것이다. 나는 밤의 바흐와 친구하며 듣는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1.04.18 2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