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이 되던 해에 어머니 뱃속에서 자리를 잡고 열 달을 살다가 해방 다음 해 여름 날 전형적인 농촌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확여행을 가면서 처음으로 고향을 벗어나 타관 땅을 밟아보았고 그 곳에도 역사가 있고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객선과 기차도 처음 타 보았다. 여수를 거쳐 구례 화엄사를 둘러보는데 너무 크고 넓은 경내와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며 보이는 것이 모두가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기억과 특히 부여의 부소산성 흙 속에서 발견되는 새까만 쌀알이 백제시대의 것이라는 사실에 너무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였고 산꼭대기에 외롭게 서있는 백화정에서 여러 친구들과 찍은 사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부소산 절벽에 자리 잡은 외로운 사찰 고란사에서는 속세를 떠나 불도를 닦는 수도생활의 고뇌를 생각해 보았고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가면서 바라본 낙화암 삼천 궁녀들의 거룩한 희생에 짠한 마음을 간직한 채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하는 전란 중에 잠시 백마강에서 낚시를 하여 용을 낚아 올린 자국이 선명한 바위를 보면서 세상에 이런 신기한 일도 다 있구나 하고 감탄하였으며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서 있는 바위는 삼천 궁녀가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고 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인간의 비극에 자연도 감동을 하는구나 하는 순수한 마음이 들었었던 기억이 난다.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은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석불에 놀랐고 남원의 광한루에서는 술래잡기하며 사랑을 키웠던 이팔청춘 남녀, 춘향과 이도령의 이야기는 호기심 많던 우리들에게는 달콤하고 매력적이 사연으로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시대적 사건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3박4일의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고 신기한 것들을 많이 알게 된 기회였으며 내 몸에 잠재되었던 여행에 대한 본성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로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는 남해와 여수 일대 무전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새로운 경험을 하였으며 가을에는 통영의 한산대첩 축제를 맞아 남망산 공원을 오르는 길에 야바위꾼들에게 걸려서 주머니 다 털리고 빈손이 되어 근교의 시골로 가서 밥을 얻어먹고 노숙을 했던 기억은 평생 다시 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고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정신적 자양분이 되어서 지금도 기회가 되면 자랑삼아 우려먹곤 한다.
그렇게 시골에서 보고 듣는 것도 없이 살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서울로 와서 누님 댁에 얹혀살면서 건강이 좋지 않아 군대도 못간 군 미필자가 되어 취직도 쉽지 않아서 어렵게 대학을 나왔지만 일 년을 무위도식하며 지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생전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경기도 평택이라는 어느 시골 면소재지 중학교에 취직을 하게 되어 단벌옷에 달랑 다우다 이불 한 장을 보자기에 싸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향 땅 시골의 낯선 집에 월 이천 원짜리 사글세방에서 혼자 자취를 하면서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이효석 동상 옆에 앉아서
일천구백칠십일 년 시골 면소재지에서부터 시작된 중학교 평준화 정책에 편승하여 고등공민학교였던 학교가 정식 중학교로 인가를 받아 학생 배정을 받게 되면서 학급수가 늘어남에 따라 교사를 새로 뽑게 되었는데 마침 국어 교사로 있던 분이 어떤 문제가 있었던지 사임을 하게 되어 그 후속으로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시골의 미니 중학교에 부임을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 2008년 2월29일 정년을 2년 반 남겨 놓은 채 명예롭게 퇴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1971년, 그 때는 너무나 가난하고 모두가 속칭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에 밥벌이를 위해서 취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미래는 생각할 겨를이나 여유도 없이 우선 스스로 먹고 살게 된 것에 감사하며 교직이 내 적성에도 딱 맞고 학생들과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보람스러웠으며 한창 경제개발 정책이 시작되어 산업화로 고속성장을 하는 시대에 산업현장은 아니지만 교육에 종사하는 것도 대한민국 발전에 일조를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나의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며 맨토가 없어서 혼자 막막한 앞길을 헤쳐 나오던 생각을 하면서 시골의 학생들에게 미약하나마 앞길을 열어 가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가절한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쳤다고 자부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학생들이 듣기에는 잔소리로 들릴지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여러 이야기 중에 한두 마디만 들어줘도 성공이라는 마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고 나름대로는 진심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렇게 6년을 시골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보낸 기간은 나에게는 너무 좋은 시간이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쌓게 되었으며 가르친다기보다 오히려 배우는 시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때만 해도 정이 있었고 시골의 학부모들은 선생의 말이라면 잘 들어주고 성의를 다하던 시대로 지금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시절이었던 것 같고 학생들도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주어서 교사로서 참으로 좋은 시절을 보낸 것 같아서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때 가르친 제자들이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으니 교육의 보람이 아닌가 생각하며 자긍심을 갖고 있다.
순창의 강천산 산행 중
그렇게 시골 학교에서 지내는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립학교 교사들에게도 연금제도를 만들어 퇴직 후에 안정된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1975년 1월1일부로 사학연금이 실시가 되어 본인이 50%를 부담하고 재단에서 30%, 그리고 20%는 나라에서 부담하여 시작된 연금을 최대 33년을 붓고 퇴직을 한 후로는 매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오는 연금으로 퇴직 후의 생활에 전혀 걱정 없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며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고 지금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하여 온 국민이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나에게도 이런 혜택을 누리게 해준 박정희 대통령에게 너무나 크게 감사한 마음을 잠시도 잊지 않고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는 평생 든든한 월급쟁이로 살게 해 주었으니 어찌 고마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1980~90년대만 하더라고 우리나라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의 월급이 교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후생복지도 잘 되어서 상대적 박탈감도 느끼며 일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사를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1993년 처음으로 작은 자가용차를 사게 되어 너무나 가슴 벅차고 아끼는 마음으로 닦고 또 닦으며 조심스럽게 차를 모는데 작은 사업을 하는 어떤 지인이 ‘교사도 자가용을 타느냐?’고 하는 말에 내심 자존심이 상한 기억도 있었는데 다 지나고 보니 지금은 그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삼척의 촛대바위를 배경삼아
그렇게 지방에서 만9년을 보내고 어렵게 서울로 올라오면서 동대문 주상복합아파트를 사게 되었는데 잔금 치를 자금이 부족하여 애를 썼지만 이사하는 날 끝내 잔금 일부를 치르지 못하여 이삿짐은 복도에 두고 토, 일 이틀 밤을 지내고 다음 월요일에 겨우 들어가게 되었던 사연과 동대문에서 다시 개봉동으로 전세를 얻어서 이사를 하는데 주인이 채무관계에 얽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짐을 대문 앞에 둔 채 하루를 꼬박 보내고 밤늦은 시간에 짐을 들이던 일이며 잠시 다세대 주택을 사서 살다가 당시 분당을 비롯한 신도시가 동시에 개발되면서 분당에 신청을 하였지만 수백 대 일의 높은 경쟁으로 떨어지고는 보완책으로 선매청약이라는 제도로 삼천만 원을 넣으면 분양에 우선권을 준다고 하여 가난한 처지에 울며 겨자 먹기로 넣은 선매청약 덕분에 극적으로 평촌에 당첨이 되어 얼마나 좋았던지 당첨 소식을 듣고는 안식구와 서로 부등켜 안고 좋아하며 눈시울까지 붉힌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1년 세월이 훌쩍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해방 이듬해 혼란한 틈새를 비집고 가난한 시골 농촌에서 태어나 그 때 그 때 처한 형편에 따라 살다보니 한반도 최남단 경상남도 삼천포에서 부산을 거쳐 평택에서 9년을 살다가 다시 서울에서 13년을 살았고 그리고 신도시 평촌에서 32년째 살고 있으니 속된 말로 출세한 거지. 교직생활은 평택에서 8년, 서울에서 28년을 합쳐 36년을 하고 2008년 2월에 퇴직을 하였는데 벌써 만17년이 지났으니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다.
나 같은 내로라할 것 하나 없는 깡 촌놈을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선한 길을 인도하사 지금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서
내 나이도 이제 팔십이 되고 보니 몸도 옛날 같지 않고 생각도 흐려지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겨나며 나이는 속일 수 없다는 선인들의 말씀이 딱 맞구나는 하는 생각이 들고 지금까지 대과 없이 살아온 것도 기적이요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더할 말이없는 것 같다. 흔히 기적이라면 천의 하나가 성취되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은 말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보니까 기적이 다른 것이 아니고 오늘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나니 우리가 날아나나이다”라고 한 시편 기자의 말씀이 너무나 깊이 가슴에 박힌다. 바로 팔십을 맞게 된 지금까지 생명을 지탱하고 있으니 나는 강건하게 수를 누리고 있는 것이고, 다만 남은 인생이 얼마일지 알 수 없지만 지금처럼만 지낼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23년 초에는 자동차 사고로 30년간 타던 차를 폐차하였고, 24년에는 연초 1월12일 산에 갔다가 하산하는 길에 빙판에 미끄러지며 발목이 골절되는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여 꼬박 3개월은 휠체어를 타야했고 두 달은 목발을 짚고 다녔으며 한 달 정도는 지팡이를 짚으며 부지런히 재활운동을 하여 8개월 만에 근교 산의 둘레길을 다시 조금씩 걷게 되었으니 돌이켜 보니 불행 중 다행으로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어려운 일을 당하고 깊이 느껴지는 것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하는 말이 너무나 가슴 깊이 느껴진다. 이제 이 나이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좋고 감사하지만 앞으로 욕심 없이, 근심 걱정 없이 즐겁게 사는 것이요, 오직 한 가지 진짜 바람이 있다면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소망이요 기도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