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캐나다 대사관 유관순 나무
1886년 조선 최초의 여성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1832~1909)은 조선 소녀의 배움터인 이화학당을 열었다. 의사인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튼(1856~1922)도 조선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설립했다. 이화학당은 조선 소녀들의 삶을 외국의 생활양식, 환경으로 바꿈이 아니었다. 보다 나은 삶, 긍지를 갖는 조선 여성이 스크랜턴의 교육관이자 소망이었다.
역시 여성 선교사인 메리 윌콕스 노블(1872~1956)의 1893년 10월 10일 일기이다. ‘여성병원에 부정을 저질렀다며 남편에게 코와 손가락을 잘린 여성이 입원했다. 흔한 정죄이다…. 조선에는 진실한 남자가 거의 없다. 그들의 코와 손가락은 누가 자를까?’ 이 일기에는 가난 때문에 13살 여동생을 팔려는 오빠와 머리칼을 팔아서라도 딸을 이화학당에 보내려는 어머니도 있다. 그 딸을 위해 노블은 평양 근처 진남포에서 서울까지의 뱃삯과 여비의 반을 보탰다.
봉건 전제 왕조 국가의 평민과 노비, 특히 여성과 어린이에게 인권은 선택권이 아니었다. 그나마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했지만, 그 시기 우리나라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침해도 당연히 상상 이상이었다. 양반집 규수가 아니면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여성이나 어린이는 병이 나도 대부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가부장적 가치관이라는 전통과 인습의 굴레 속에서 여성과 어린이는 제일 고통받는 신분층이고 계급이었다.
스크랜턴은 1886년 11월 이화학당을 덕수궁 이웃인 정동에 ㄷ자 형 200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지었다. 교실과 기숙사를 갖추었지만,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반년이 지나서야 받은 첫 학생은 고관의 소실인 김 부인이었다. 한 달 뒤 열 살가량의 꽃님이가 왔고 네 살 난 별단이도 왔다. 꽃님이는 가난한 어머니가 도저히 부양할 길이 없어 맡겼고 별단이는 1886년 여름 서울의 콜레라에 걸려 길에 버려진 아이였다. 의사인 윌리엄 스크랜튼이 성 밖에서 발견해 데려와 치료했다.
1916년이다. 유관순(1902~1920)이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고등과 1학년이던 1919년 3월 1일이다. 힘차게 들려오는 만세 소리에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가 말렸지만, 유관순은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와 함께 결사대를 조직 학당의 담을 넘었다. 3월 10일 전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고 유관순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왔다. 그리고 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의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때 유관순의 부모는 왜경의 칼에 학살됐고, 유관순은 왜의 앞잡이인 정춘영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다.
복역 기간 중 유관순은 혹독한 고문과 폭력으로 몸을 지탱하는 모든 부위의 뼈가 탈골되고 부러졌으며 위장, 소장, 대장, 간, 폐, 신장 등 내부 장기도 심하게 손상됐다. 그녀가 죽기 전 최후의 가족 면회 때는 교도관의 도움 없이 서지도 못했다.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옥사, 임시로 묻었는데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가 시신 인도를 요구하여 장례를 치렀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지금의 이화여고에 이르면 캐나다 대사관이 있고 560살이 넘은 회화나무가 있다. 흰 저고리, 검정 치마의 생기발랄한 앳된 소녀 유관순을 지켜본 나무이다.
2024년 3·1절 이틀 뒤인 3월 3일의 ‘이토 히로부미가 인재를 키웠다’는 토착 왜구 친일 정치배의 망언은 빙산의 일각이리라. ‘이 끝나지 않는 독립 만세의 굴욕을 알고 있으리라’, 여기며 한동안 회화나무에 걸린 3월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