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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비밀
단전호흡과 한풀을 하기 위해 암자에
들어온 지 열 이틀 만에 나는 비로소 건강을
되찾은 느낌을 받았다.
몸을 움직이는 게 전 같지 않았지만
단전호흡이 제대로 되고 운동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무릎 관절이 늘어나서 발차기를
할 때 조심스러운 걸 빼면 육체적 기능은
원상태로 돌아온 것 같았다.
"새벽잠 깨우는 짓 그만 하세."
육순이 넘은 보살은 공양시간마다 내게
이런 꾸지람을 했다. 물론 그것은 미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꼭두새벽부터 밤까지
운동을 하는 내가 행여 건강을 망칠까 싶어
그러는 것이었다.
암자였다. 보살은 20여 년을 암자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너무도 곱게 늙어 마치 탄력
있는 사십대 여인 같았다. 보살은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나를 친자식처럼 아껴 주곤
했다.
"뭐하려고 이번엔 그리 몸을 푸노."
전에 없이 운동을 해 대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뵈기 싫은 녀석들 사그리 패대기치려고
그래요."
"아서, 아예 그런 생각 품지 마. 나 같은
할망구 좀 봐. 부처님 모시고 여기서 사니까
신간 편코, 늙지 않고, 얼마나 좋아. 세상
꼴보기 싫다고 흥분해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
청아한 목소리에 때 한 점 없는 인자한
마음씨였다.
"부처님이 손대기 전에 주물러 줄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그러면서 쉬지 않고 단련을 했다.
단전호흡이 마음대로 조정되기만 하면 육체적
치료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아침 운동을 하고 들어와서 공양을
하려는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보살이
문을 열고는 웃었다.
"일찌감치도 올라오셨네."
등산객 차림의 사내 세 사람이 암자의
우물가에 앉아 물을 퍼 마시고 있었다.
"끓인 물도 있어요."
보살이 부엌을 가리키며 말했다.
"됐습니다. 더워 죽겠는걸요."
청바지 입은 사내가 꾸벅 인사를 하고
대꾸했다.
올라오셨나."
"어젯밤에 요 밑에서 잤어요."
"들어와 쉬었다 가시구려. 우린 이제
아침이라오."
"많이 먹고 푹 쉬었습니다. 이렇게 사시면
생전 늙지 않으시겠네요."
"늙지 않으려면 전부 산 속에 들어가면 될
거라오. 젊은이들도 들어오면 지금부터 딱
늙지 않을 거라오."
"에헤...... ."
사내들은 웃었다. 며칠째 텐트 생활을
했는지 수염이 미울 만큼 솟아 있었다.
"거 신문 좀 볼까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빨간 모자를 쓴 사내가
배낭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은 신문을 빼
주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안 보니 궁금하네요."
이 암자에는 신문도 라디오도 없었다. 누가
신문을 배달해 줄 리도 없고 보살이 내려가
신문을 구해 올 리도 없었다.
보살은 세상 돌아가는 걸 아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올라올 때마다 라디오를
가져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젊은이들은 물통에 물을 채우고 다시
산길로 올라섰다. 보살이 뛰어가 산나물 한
뭉치와 고추장 볶은 것을 건네 주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신문을 펼쳐들고 구겨진 곳을 펴 가며
읽었다. 나흘 전 신문이었다. 나는 신문을
내려 읽어 가다 말고 눈에 익은 활자를
발견했다.
T병원의 여의사 자살.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는 대로 그만두겠다던
병원이었다.
T병원 원장과 여의사는 부부였다. 원장이란
친구가 손버릇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신문 기사대로라면 여의사는 의료사고
때문에 피해자에게 시달리고 있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피해자 가족이 법정투쟁으로 밀고 나온다고
해서 자살할 수 있을까?
나는 갑자기 다혜의 거취와 함께 의구심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벌써 며칠 전의 사건진상이었다. 병원이 그
지경이 되었다면 첫 월급을 받겠다던 다혜의
고집도 무산되었을 것 같았다.
"참하게 있는가 싶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서두르나?"
보살은 말리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녀가 내게 보이는 최선의 위로인 것이었다.
그녀는 늘상 그랬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모든 일에 달관한
것처럼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내려가겠습니다. 내년에 또 올게요."
"그러게. 이담엔 색시두 델구 오게나. 이
할미 몰래 장가갔다간 큰일날 테니 그리
알고."
나는 인사를 하고 지름길로 발길을 잡았다.
마음이 급해서 돌아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빨리 내려가서 다혜를 만나야만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다혜는 마침 병원에 있었다. 전화로는
와서 다시 연락해 달라고 했다. 나는
병원으로 가면서 다혜가 병원을 떠나지 않은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손버릇 나쁜 원장 밑에서 참고 견딜 이유가
없었다.
혹시...... . 혹시...... .
의문의 물방울이 가슴에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손버릇 나쁜 원장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못된 의사가 마취제로 간호원을
사냥한다는 얘기를 나는 왜 이럴 때 기억해야
하는지.
다혜가 천천히 걸어왔다. 수심에 찬 얼굴,
뭔가 괴로운 표정, 늘 명랑하던 웃음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별일 있기를 바라는 거야?"
"왜 여태 이 따위 병원에 남아 있는 거야?
도대체 뭣 때문에...... ."
"...... ."
"말해 봐. 뭣 때문에 있는 거야? 내가
그만두라고 그랬잖아."
"누가 그걸 몰라. 나갈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투정조였다. 뭔가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왜 못 나와. 뭐가 아쉬워서."
"나도 미치겠어. 무섭기도 하구. 그런데 못
나가게 하니까 그렇지. 수사가 종결될 때까지
못 나간다는 거야."
"수사? 자살이래며 무슨...... ."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람이 죽었는데, 지금
그만뒀다간 괜히 오해받아. 그렇잖아도 매일
"조사를 받는다...... ."
나는 왜 미처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모른다.
다혜의 일만 몰두하느라고 그런 것 같았다.
"병원 사람 모두 조사 받아. 병원은 텅텅
비었지만 우린 매일 조사가 끝날 때까지
있어야 된대."
"원장 그 친구는 어때? 울어?"
"마누라가 죽었는데 안 울어?"
"새 장가 갈 것이 기뻐서 화장실 들어가
키득키득 웃는 거 아냐?"
"내가 화장실에 따라 들어가 보지 않아서
알 재간이 없지."
"졌다, 졌어."
우리는 다방 귀퉁이에 앉아서 원장에 대한
손버릇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혜는 조금씩
평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더러운 손버릇을 위해 어떻게 한 거 아닐까."
"아냐, 자살은 확실해."
"신문에 난 걸로 봐서 유서가 있다고
하지만...... . 어쩐지...... . 괜히
믿어지지 않아. 뭔가 흑막이 있을 것만
같아."
"나도 유설 보진 못했어. 그러니까 그런 줄
아는 거지. 선생님은 언제나 죽고 싶다고
했었어."
"피해자 가족이 그렇게 괴롭혔니?"
"응, 나래두 안 괴롭히겠어? 부인이
죽었는데 어떤 사내가 그냥 있으려고
하겠어."
"그러나 그건 일단락지은 거래잖아."
"법적으로야 일단락됐지만...... . 남편이
자꾸 돈을 요구했었나봐."
"자식 데리고 살 만큼 달랬다니까 얼만지는
몰라. 선생님이 그것 때문에 꽤 신경을
쓰기는 했어."
"그렇다고 자살해? 차암, 인간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의사가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자살해? 말도 안 돼."
"우리도 그 점이 석연치 않은 거야. 그만한
돈도 있고, 자식도 훌륭하게 크고 있고,
병원도 번창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자살했을까?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지 않겠니."
"내가 그걸 알면 여태 왜 있어. 나도
갑갑해 미치겠어. 어서 끝나고 나가야지 못
견다겠어."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걸 알면 나도
혹시 조사대상이 되는 거 아닐까?"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남을 헐뜯는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다혜와 나는 한 시간 가깝게
원장과 자살한 여자를 집중적으로 헐뜯었다.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할 의사의 죽음과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 줘야 할 의사가
여인의 육체를 파괴하는 비리에 대해 온갖
상상력과 온갖 비난으로 헐뜯었다.
"자살은 확실해. 그러나 피해자 가족에게
시달려서 자살한 건 분명 아냐. 아마 원장의
손버릇 때문에 그랬을 거야."
다혜가 내린 최종 결론은 이랬다.
나도 동감이었다. 유서가 발견되었다지만
나도 동감이었다. 유서가 발견됐다지만
공개하지 않은 점, 여의사가 항상 남편
때문에 죽고 싶다고 말한 점, 여의사가
의사를 만들었으며 생활이 윤택해지자
간호원을 손대면서 이혼을 요구한 점,
T병원의 간호원을 지낸 여자들에게 목돈을
떼어 줘 딴살림을 차렸던 과거, 지금도
감간호원과 비밀스런 관계를 맺고 있는
부도덕성 따위를 유추해 보면 단순한 피해자
가족의 협박 때문에 자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유서를 본 사람 얘기는 더 이상해. 유서가
채 말을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끊어졌다는
거야. 아마 한두 장쯤 원장이 없앴을 것
같다는 거야. 발견된 유서에서 아마 피해자
가족에게 보상을 해 주라는 얘기가 씌어
있었나 봐. 선생님은 평소에 늘 보상을 해
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고 원장은 한사코
반대를 했으니까."
왜 자살을 해."
"글쎄 말야. 뭐가 뭔지 모르겠어."
우리는 나름대로 사건의 결말을 이렇게
내리고 헤어졌다. 더 있고 싶었지만 다혜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괜히
의심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혜와 헤어진 지 꼭 하루만에 사건은
종결되었고 다혜는 해방되었다.
"월급은 받았니?"
"월급 같은 소리 말아."
"내가 그만두랄 때 그만뒀으면 그 고생은
않잖아."
"더 고생했을 거야. 그만둔 사람들도 죄
불려다녔으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수사관들이 보아도
여의사가 자살할 만한 석연한 이유가
그날 신문에 여의사 자살사건은 단순한
피해자 가족의 협박 때문에 자살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이거 괜히 피해자의 남편만 죽일 놈 된
거야."
다혜가 신문을 구겨 휴지통에 처박으며
흥분해서 한 말이었다.
"단언할 수 있니?"
"단언할 수 있어. 피해자 가족은 착한
사람들이야. 순박하고, 차라리 때묻지
않았어. 그 사람들은 부인, 어머니, 여동생의
죽은 원인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한 거야. 그리고 선생님 말처럼 마땅히
보상받아야 될 사람들야. 원장 그 새끼가
지독스런 노랭이라서 그런 것뿐야. 단 한푼도
안 주고, 장례비마저 안 주고 교묘하게
불쌍해."
다혜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왜 이럴 땐 흥분하지 않는 거야."
다혜가 내게 투정을 부렸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렇다구. 자신의 이익과 직결된 문제만
악다구니 쓰고...... . 그게 정의감대로 사는
거야? 그제 총찬이의 정의감야? 그리고 그게
진실인 거야?"
"...... ."
너무 갑작스런 공격이어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총찬이는 지금 그 천국직행교인가 하는 데
때려부술 궁리만 하고 있지? 난 차라리 그
따위보다는 이런 일을 더 까부숴야 된다고
생각해. 오히려 이 일에 더 흥분해야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다혜를
쳐다보았다. 보통여자였다.
부끄러웠다.
"좋아, 이거 먼저 해 볼게."
"정말야?"
"그래 정말야. 해낼 거야. 다혜가 옆에
있는 한 말야."
나는 그 길로 다혜가 일러 준 피해자
가족을 만나러 갔다.
전철을 타고 내려가면서 잠깐이지만
다혜에게 의혹의 마음을 가졌던 게
부끄러웠다. 귀엽고 예쁜 보통여자의
모습이었지만 그 가슴 속에 있는 정의감은
오히려 나보다 커 보였다. 내가 우쭐거리며
해치운 일들이란 실상 내 이익, 내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대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분명히
사람이 있을 것 같았는데도 대꾸가 없었다.
"서울서 왔습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내 목소리가 컸다. 방문이 빼꼼히 열렸다.
마흔 살이 넘어 보이는 사내가 방 문턱에서
왜 그러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색바랜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첫눈에도 피해자
가족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서 왔습니다. 억울한 사연을 알고 온
사람입니다. 도와드리러 온 거예요."
사내는 엉거주춤 일어나 아직도 의심에 찬
눈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전 학생입니다. 그러나 아저씨께서 최근에
당한 억울한 사정을 알고 참을 수 없어서
왔습니다. 부인께서 어떻게 돌아가셨으며
보상은 어떻게 받으셨는지, 또다른 얘기가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모두 털어
놓았다. 그제서야 사내는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어찌
된 심판인지. 멀쩡한 마누라 잃고 우리만
숭한 놈 돼 버렸으니...... ."
한숨을 몰아쉰 사내는 아랫목에 누워 있는
애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어린 새끼덜하고 살 일이 깜깜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하네요."
내기에도 벅찬 농사꾼. 갑작스럽게 복통을
일으켜 뒹구는 마누라를 들쳐업고 T병원에
갔다가 홀아비가 되어 나온 사내. 마누라가
왜 죽었는지 확인하러 가봤지만 복잡한 병명,
외지도 못하는 영어로 된 병명과 치료비
마누라를 뒷산에 묻고 돌아서자 동네
사람들이 생목숨 잡아간 원수에게 가서 목숨
값이라도 받으라고해서 찾아갔다가 욕만 먹고
돌아온 촌사람이었다.
박씨는 동네 이장의 주선으로 T병원을 걸어
문제를 일으켰지만 오진이나 의료사고가
아닌, 무식하게도 병원에 늦게 데리고 간
형편없는 사내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린 새끼들하고...... . 팔팔하던 마누라
생각만 하면 가슴앓이가 도지고 벌렁벌렁
뛰고, 보리죽이라도 끓여 대던 여편네 생각만
하면 의사를 쥑이고도 싶고 그런데요. 얘들은
엄마 찾아내라고 떼쓰고, 동네 사람들은 숭한
병,신이라고 놀려 대고, 무당은 의사가
잡아갔다고 그러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마누라는 주사 잘못 놔서 죽은 것만
그러데요. 의사가 날 잡아먹었는데 병,신처럼
쭈그리고 있느냐고 악을 쓰데요. 그래서 너댓
번 찾아가서 생전에 고생시킨 마누라
비석값이라도 내라고 뗑깡 좀 놨지요. 여자는
주겠다고 내일 오라고 하고 남자는 이튿날
가보면 펄펄 뛰며 공갈죄로 감옥에 넣겠다고
악쓰고...... . 나도 오기가 나데요. 그래서
쫓아댕겼지요. 그런데 느닷없이 그 순한
여자가 나 때문에 죽었다고 하데요. 하이고,
이눔이 마누라 쥑인 것만도 미치겠고
환장하겠는데...... . 난 쥑일 놈이지요.
그나저나 이제 뭣에 쓰나요.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요. 이눔의 팔자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
박씨는 꽁초를 끝까지 피우고 아랫목에
누워 있는 애들을 처량하게 바라보았다.
억울해요. 사람들이 나보고 모진 놈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게 젤 못 견디는 일이죠."
못된 원장의 병원에서 아내를 잃은 박씨의
힘줄 솟은 손등에는 굳은 살이 역력히
드러났다. 마디마디에 굳은 살이 박혀
농사꾼이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잘은 모르것습니다만, 사람들은 그런대요.
남편이란 작자가 바람을 너무 피워서
여의사가 자살한 거라구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내가 은근하게 떠보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그야, 머. 그런 얘기가 있다는 것이지요."
"떠도는 말처럼 괴롭혔다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차암...... ."
그는 혀 끝이 아린지 혀를 차더니 이내
"하나님이 알 거구만...... ."
"그럼 왜 그런 소리가 들려요."
"내가 쥑일 놈이지, 하나님이 무심합니다.
무심해요."
그는 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한참 동안 내가 이곳에 오게 된 동기를
얘기해 주었다. 그는 그래도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 내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손마디에 못이 박혀서 우악스러웠다.
찡하게 감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모를
일이었다. 하나님은 알고 있을까?
나는 박씨 집을 나와 골목길에 서서
욕지거리를 했다. 누구한테 한 것인지
의사한테 한 것이기도 했고 하나님과
세상에게 한 것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꿀먹은 벙어리처럼 살아가는
박씨에게 한 것인지 모른다.
하나님, 우리 말 좀 해 봐요. 탁 까놓고
얘기 좀 합시다.
박씨가 가엾지도 않은가요? 그의 말처럼
생떼 같은 마누라 잃은 것만도 억울한 판에
여의사 죽인 포악한 사내로 꼭 전락해야만 할
전생의 죄라도 있는 겁니까.
가난하고 그래서 못 배웠다는 게 정말 죄가
되는 겁니까?
당신은 그랬죠. 부자가 천당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는 것보다도
어렵다구요. 잠언에 그렇게 씌어 있잖아요.
있단 말입니까. 낙타가 아니라 혹시 밧줄을
잘못 표기한 건 아닐까요. 희랍어론
낙타(Cameros)와 밧줄(Camiros)은 이(e)와
아이(i) 차이뿐이니까요.
어쨌든 그런 거야 하나님 잘못이 아니니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
하나님, 제발 공평하게 해 주쇼. 나 같은
놈도 하나님 좀 믿게 해 주쇼.
병원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나는 다혜가
일러준 대로 송(宋)간호원을 찾아 나섰다.
송간호원은 정규대학 출신의 간호원이 아니라
여학교를 졸업하고 보조원 노릇을 했던
여자였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자격증 없이
간호보조원 노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몇번인가 낙태수수을 받은, 원장선생의 직접
여자라고 했다.
그녀가 간호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원장선생의 비위를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란 얘기도 들었다. 그녀는 실제로
다혜에게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이태 동안 처녀다움을 발라먹은 원장은
송간호원에게 은근히 나가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송간호원은 밥줄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 자격증 없이
간호원이란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이
병원뿐이었다. 그녀가 이 병원을 나서면
그때부터는 단순히 직장 잃은 여자일 뿐
아니라 아리따운 처녀까지 뜯어먹힌 여자,
여러 차례의 낙태수술로 망가진 몸, 농락을
너무 일찍 경험한 여자, 싱싱한 젊은 사내를
사랑하기엔 너무나 많은 쾌락을 아는 여자가
송간호원은 슈퍼마켓 경리사원 일을 보고
있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계산대 앞에 일아 있는 모습이 그렇게 어울릴
수 없었다.
처음에 내가 불러내자 그녀는 나를 형사나
되는 줄 알고 몹시 두려워했다.
"그런 걸 왜 꼬치꼬치 캐묻죠?"
내가 형사가 아니라는 걸 안 그는 퍽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나쁜 사내를 혼구멍 내줄 필요가 있는 거
아닙니까."
"원장선생님이 왜 나빠요."
"손버릇도 나쁘고 멀쩡한 사람을 제 마누라
죽인 사람으로 몰아붙였으니까 나쁘죠."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점잖은
원장선생님인데...... . 그런 말 누구한테
들었어요."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었다.
"좋아요. 그거야 미스 송 생각대로라고
쳐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최근에
원장선생이 누구랑 어디서 살림을 몰래
차렸으며 간호원 중에서 누굴 손대고
있었는지 그것만 얘기해 주면 돼요.
알겠어요?"
"뭐라구요? 이 사람이 보자보자하니까."
말꼬리가 심상치 않게 올라갔다.
"조용조용 합시다."
"조용이고 뭐고 사람 뭘구 보고 이래요?
원장선생님은 소문처럼 그런 사람이 아녜요.
설사 그렇다 쳐도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조용조용하자는 내 뼈있는 말에 가슴이
찔리는지 그녀는 이렇게 대했다.
억울하게 누명 쓴 사람을 구해 주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사람이...... . 댁은 누구예요? 공갈
치는 거예요? 경찰을 부르겠어요."
방귀 뀐 놈이 먼저 성질 낸다더니 이
여자가 그런 것 같았다.
"불러 주쇼. 그러면 얘기가 더 쉽겠구만.
아가씨를 취직시켜 준 원장선생께서 그동안
아가씨하고 어떻게 놀아났는지 죄 까발려
주고 싶으니까요. 어서 부르쇼."
나는 그녀에게 공중전화통을 가리켰다.
그녀는 멈칫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더
빳빳하게 세우고 말했다.
"후회하지 마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짓으로
돈 뜯어 가려는 걸 모를 줄 아세요. 그렇게
자신 있으면 여기 꼼짝 말고 기다려요.
신고해 줄 테니까요."
그녀는 성큼성큼 공중전화통으로 갔다.
나는 가슴이 섬뜩했다. 내가 잘못 짚고
넘어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너무
대범하게 나가니까 다혜가 뭔가 잘못 일러준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내가 잘못 짚은 거라면
조금 뒤에 삼십육계를 놓으면 그만이니까.
촉각을 곧추세워 그녀가 어디에 전화를
걸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 보려고 했지만
워낙 낮은 소리로 지껄이고 있어서 들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