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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대명사 선봉회
촉촉하게 봄비가 내리는 4월 어느 날 소풍 가는 어린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선봉회 봄맞이 행사로 근 현대사의 권력의 중심지였던 청와대와 경복궁을 탐방한단다. 육군 제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지 반백 년이 지난 지금, 생사를 같이했던 옛 전우들이 보고 싶어 이번 모임에는 꼭 참석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친절하게도 선봉회 사무총장께서는 행사계획과 함께 각 개인이 준비할 사항, 집결 장소로 찾아오는 길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공짜로 이용하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기록하여 카톡방과 카페를 통해 알려주신다.
아내와 동행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속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에 도착한다. 계획된 시간보다 약간 일찍 도착했기에 약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청와대 앞까지 걸어갈 요량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바로 앞에서 내 또래 남자가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실례합니다. 말씀 좀 물어볼게요. 청와대 방향이 어느 쪽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러자 그 남자가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갑게 말한다.
“어~ 이게 누구지, 아무개 맞지?”
얼굴을 마주한 우리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손을 맞잡고 반가워라 소리친다.
“그래 내가 아무개야. 너는 홍ㅇㅇ이구나?”
동기생 홍ㅇㅇ이다. 임관 후 한 번도 같이 근무한 적이 없는 동기생인데도 50년이 지난 지금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7~8분 정도 걸으니 청와대 정문 광장이 나타난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데도 수많은 인파가 청와대 입장을 하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다. 하루에 2만여 명 정도 방문한단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회장님과 사무총장님이 두 손을 잡으며 반긴다. 그리고 바로 옆 공터에 낯익은 동기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반갑게들 인사한다. 사무총장께서 애써 준비한 간식 봉지를 하나씩 가방에 챙겨 담고 청와대 본관 아래쪽에 있는 영빈관 앞에서 회장님으로부터 청와대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듣는다.
1. 현대판 권력과 영욕의 산실 청와대(靑瓦臺)
개요
청와대의 대지면적은 종으로 600미터 횡으로 500미터로 253,505㎡이며 평수로는 76,685평에 해당한다. 청와대(靑瓦臺)는 1948년부터 2022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기거하는 대통령 관저이자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는 헌법기관으로서의 대통령부(大統領府)와 관계된 행정기관이었다. 별칭은 블루 하우스(Blue House)이다. 그 외 청와대의 역사, 경무대 시절, 청와대로 개명 그리고 청와대 개방까지 설명하시는 우리의 회장님 참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왔나 보다.
주요시설 관람
웅장하게 지어진 청와대 본관 내부를 구경하겠다고 궂은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이 줄을 선다. 드디어 내부에 들어선다. 멋지다!
본관(本館)은 1991년 9월에 신축되었다. 대통령 집무실과 국무회의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소회의실 벽에는 역대 대통령 사진이 걸려있다. 역대 대통령들과 이야기라도 나눌라치면 사진이라도 한판 찍어야겠다.
관저(官邸)는 대통령 가족의 사적인 공간이기에 청와대 내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공간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불고불 7~8분 정도 비탈길을 올라가서야 인수문(仁壽門)이라는 거창한 솟을대문이 있고, 대문을 들어서자 말 그대로 거대한 구중궁궐이 나타난다. 이렇게 크고 깊고 깊은 구중궁궐에서 ㅇㅇㅇ 대통령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또 ㅇㅇㅇ 영부인은 누구를 위해 세계적인 명품들을 수집하고 있었을까? 한심스러운 생각에 그 모두가 가짜 뉴스이기를 기대해본다.
국빈들 행사에 사용되었다는 영빈관, 명당터로 알려진 경무대(구 본관터), 문재인 대통령이 즐겨 사용했다는 상춘재, 어린이날 등 국내 작은 행사에 사용 했다는 녹지원 등을 둘러본다.
풍수지리학적 고찰
청와대 일대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으로 길지(吉地) 중의 길지에 속한다고 알려져 왔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인 낙산(駱山), 우백호인 인왕산(仁王山),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명당수인 청계천이 북북서에서 통과해 동쪽으로 흘러가고 객수(客水)인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매우 길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대통령들의 말년이 불운하여 풍수 논쟁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인 논쟁은 노태우 대통령 때 청와대 본관과 관저를 분리하는 공사를 하면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각자된 바위가 발견되면서부터라고 한다. 바위의 크기는 가로 250cm, 세로 120cm이며 300~400년 전에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 150년 전에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청와대가 길지(吉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려시대의 도참설에 따라 남경(왕궁)이 들어섰고 광복 후 수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거듭날 만큼 국가의 기운이 융성하는데 땅이 무슨 문제냐는 얘기다. 대통령의 말년이 순탄하지 않았던 건 정치 시스템상의 문제이고 개인의 욕심에 의한 것이므로 청와대 터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최창조 전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는 1990년대에 "청와대 터는 죽은 영혼들의 영주 처 이거나 신의 거처"라고 '청와대 흉지(凶地)론'을 주장했다. 그 외에도 다수의 풍수지리 연구가들은 청와대가 앞으로는 남산과 관악산, 뒤로는 북악산 등의 정기를 받고 있지만, 북악산에 많은 바위가 풍수에서는 '살기(殺氣)'에 해당하므로 청와대 터는 좋지 않다고 말했다.
풍수지리설이 옳다 그르다를 평가하기에 앞서 무비 스님께서 어렸을 때 출가를 결심하게 했다는 ‘삼일수심 천재보(三日修心 千載寶)’라는 말씀과 천상병 님의 ‘귀천’이라는 시 구절이 생각난다.
15살 된 소년이 근처 절에 놀러 갔다가 동자승을 만났다. 동자승은 그에게 명구(名句) 하나를 읊었다. “삼일수심 천재보(三日修心 千載寶) 백년탐물 일조진(百年貪物 一朝塵)”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 년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다. 라는 뜻이다. 소년은 이 말에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고 그길로 집을 나와 자발적으로 출가를 하였다. 그 소년이 불교계에서 강백(講伯)으로 이름 높은 대한불교조계종 승가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신 무비(無比) 스님이다.
다음은 천상병 님의 ‘귀천(歸天)’이란 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땅이 무순 죄인가? 청정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권력과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이 죄인 것을….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데.
2. 조선시대의 궁궐 경복궁
시곗바늘이 오후 1시를 가리킨다. 청와대 정문 큰길 건너 신무문(神武門), 경복궁 후문이다. 점심 식사를 오후 2시에 예약했기 때문에 경복궁 탐방을 서둘러야겠다는 사무총장님의 재촉으로, 회장님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경복궁 탐방을 서두른다. 내리는 비는 멈추는 듯하지만, 비에 젖은 땅이 제법 질척거린다. 신무문에 들어서자 경복궁 무료입장을 위한 65세 이상 어르신들 신분증을 검사한다고 미리 준비하란다. 비에 젖은 손을 호주머니에 넣어 신분증 꺼내기가 조금은 불편해서 내가 한마디 한다.
“여보세요 검표하는 아가씨! 70세가 넘은 노인들인데 얼굴 보면 표시 나지 않나요?”
넌지시 한마디 던지자 검표원 아가씨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중간중간 한 분씩 불시 점검만 할게요.”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60여 명의 인원이 순식간에 입장 완료하여 경복궁 탐방에 나선다.
경복궁의 역사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즉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본래 모습을 잃게 되었다. 비록 궁궐 안 건물 대부분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임에 틀림이 없다. 근정전 앞마당에는 문화재 축제를 한다고 방송용 카메라와 조명등이 비옷으로 가려진 채 여기저기 어지럽게 놓여 있고, 한복 입은 탐방객들이 비에 젖을세라 치마를 걷어잡고 종종걸음을 걷는다. 특히 외국 여자분들이 한복 치마를 서투르게 걷어잡고 걸어가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근정전 앞마당에서 단체 사진 한판 찰칵!
태조 이성계의 천도(遷都)와 풍수지리
1392년에 개경(개성)에서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면목과 인심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한다. 천도의 기준은 풍수·도참설에 따르면서, 남쪽에 한강이 있어 교통상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기가 편리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조 3년(1394년) 한양에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물색하게 했는데 명당으로 알려진 고려 숙종 때의 남궁 궁터는 너무 협소해서 새로 궁궐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좀 더 남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즉 오늘날의 청와대 터에서 좀 더 내려간 평지에 왕궁을 짓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풍수 좀 한다는 사람들은 건물이 평지로 내려오지 않았어야 할 것인데 내려서 쓴 터를 잘못 잡은 것이어서 비운의 터가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5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조의 계보와 빛나는 업적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비운의 터라고 주장하는 풍수가들에게 묻고 싶은 부분이다.
식사와 담소
서둘러 경복궁 구경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에 예약된 식당으로 이동한다. 식사와 함께 즐거운 담소 시간이다. 식당에는 삼겹살에 소주가 차려져 있다. 적당히 배가 고픈지라 음식상이 차려지기도 전에 우선 소주부터 한잔 시원하게 마시자. 무주에서 올라왔다는 조ㅇㅇ 동기생은 무주에서 아침 일찍 서울행 차가 없어서 어제 대전에서 1박하고 왔다고 한다. 직선거리는 내가 사는 진주보다 가까운데 무주란 동네가 워낙 시골인가보다. 그 동기생은 사관생도 시절 우리 훈육대는 물론 11기생 전체의 1번이라서 조금은 별스러웠다. 회장님께서 “어떻게 하면 교번 1번을 받을 수 있느냐? 그 비결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조크해서 한바탕 웃는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사무총장께서 내 이름을 부르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일어나니 먼 데서 온 동기생들은 선물로 차비를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한마디 하란다.
“사랑하는 동기생 여러분! 사관생도 교번 10,***번 김원배입니다. 이유랄 것도 없이 그냥 동기생 여러분들이 보고 싶어서 진주라 천리 길을 멀다 생각 안 하고 새벽밥 먹고 달려왔습니다. 오늘 여러 동기생을 만나서 너무 행복합니다.”
말을 마치자 동기생들과 가족들의 박수가 쏟아진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에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다. 내리던 비는 거짓말처럼 개이고 햇볕이 보이는 화창한 날씨로 변해있다. 진주로 내려갈 예약한 고속버스 시간이 3시간이나 남았다. 남는 시간 동안 경복궁 구경이나 좀 더 해야겠다고 하자, 곁에 있던 이ㅇㅇ 동기생 부부가 인사동 거리를 투어 할 계획인데 같이 가자고 한다. 함께 할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고마워 얼른 대답하고 인사동 투어에 따라나선다.
3. 인사동 투어
광화문 앞을 지나려니 일명 데모꾼들이 확성기를 통해서 줄기차게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저 짓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정열과 힘과 용기가 있어야 할 거야.”
동행하는 이ㅇㅇ 동기생에게 말하자.
“그렇고 말고 아무나 하는 게 아닐 거야.”
이ㅇㅇ 동기생이 맞장구치며 한마디 덧붙인다.
“우리 사관학교 동기생 카톡방에서도 좌우 정치적 이념 이야기를 지나치게 하는 일부 동기생들이 카톡방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도 더러 있더라고 조금씩 자제 했으면 좋겠다”라고 넋두리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에 어느덧 인사동 거리에 접어들어 ‘송해 길’이라는 전광판이 보인다. 인사동 거리에서 송해 길이라~ 송해 아저씨가 살아생전에 참으로 유명하긴 했나 보다. 이쯤 해서 사진 한판 찍어야지. 고맙게도 이ㅇㅇ 동기생의 부인께서 사진을 찍어 주신다. 주말이면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에는 엄청난 인파가 거리에 몰린다는데 오늘은 날씨 탓일까? 조금은 한산한 듯하다. 그래도 외국인 남녀가 한복을 입고 활기차게 걸어가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저런 모습이 바로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입증하는 것이려니~. 아니나 다를까? 대한민국의 인사동 전통 거리 광고에 시선이 끌린다. KBS 방송 프로그램인 ‘진품 명품 쇼’에 초창기 도자기 감정위원으로 출연했던 이 아무개 감정위원의 사진이 건물 2층 창문에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다. KBS 방송 프로그램 효과로 유명 인사가 되었는데 ‘골동품 경매, 골동품 삽니다.’라는 문구가 왠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광고인 것 같다.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동기생에게 묻는다.
“전통 거리에 우리의 전통가옥과 골동품, 고문서, 한국화 등의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야 하는데 도통 보이질 않네.”
동기생의 부인이 대답한다.
“저기 보이는 작은 골목에 들어가면 전통가옥에서 전통음식을 파는 곳이 있단다.”
그 골목 이름이 ‘어서 오시길’이다. 참으로 재미나는 골목 이름이다. 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TV에서 봤던 하룻밤 체험을 할 수 있는 전통 한옥 기와집이 있을 것 같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동기생 부인이 말한다.
“시간이 부족하므로 고샅길은 생략하고 쌈지 골목을 구경 가자”라고.
인사동 전통 거리에서 쌈지 거리는 제법 인기 있는 곳이란다. 아닌 게 아니라 골목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아는 그 고샅길이 아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건물에 3층까지 걸어 올라가면서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골목이다.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동기생과 같이 사진 몇 장 찍는다.
동기생에게 괜시리 미안해진다. 두 분이 오붓하게 인사동 거리를 데이트할 텐데, 내가 끼어서 눈치 없이 방해했나 보다. 이ㅇㅇ 동기생이 인사동 거리를 투어 하면서 찍은 사진을 카톡방에 포스팅하고, 사무총장은 그 사진을 편집해서 선봉회 카페에 포스팅한다. 약 1시간 동안의 인사동 투어로 이ㅇㅇ 동기생과 아름다운 추억을 한 장 만들었다.
짧은 하루의 감회
참으로 행복했던 하루다. 탐방하는 틈틈이 50년 만에 만나는 반가운 동기생들과 밀린 이야기를 나누면서 철없이 웃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는 역대 대통령 님들을 만나 “노심초사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대통령직을 수행하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라고 인사했다.
경복궁에서도 조선시대 권력의 영광과 질곡(桎梏)을 겪어온 역대 왕들과 만나서 인사했다.
조선 건국의 태조 이성계, 한글 창제의 세종대왕, 임진왜란 때 피난 다니기 바빴던 선조, 삼전도 굴욕의 인조 그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경복궁을 비우고 아관파천 했던 고종황제….
“왕으로 계시는 동안 궂은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수고해 주신 왕들이시여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조선왕조를 지키기 위해 이런저런 일로 수고하신 왕들에게 아낌없이 치하와 박수를 보냈다.
또한 인사동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의 이ㅇㅇ 동기생과는 생각지도 못했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 하루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도 많이 했다. 조선의 왕과, 역대 대통령 님들, 그리고 동기생이랑….
진주에 있는 집에는 모처럼 만에 두 아들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한다는 아내의 전화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집에 있을는지 모르겠다. 종로 3가에서 지하철역 자동 매표기에서 어르신 우대 일회용 승차권을 촌놈답게 더듬거리며 구매하여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진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짧은 하루 동안 바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노라고….
계묘년 오월 진주 촌놈 김 원 배
☞ 참고문헌 : 1. 청와대-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 경복궁-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첫댓글 원배씨! 지금도 반가움이 자판기 손끝에 서려있습니다 멋지고 생생한 정겨운 글과 역사를 되새겨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욱 건강하시구 가정에 만복이 가득하기를 기원드립니다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사무총장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우리의 선봉회 잘 지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