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박해사건은 단순한 종교탄압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로운 문물이 밖에서 들어올 때는 항상 기존문화와 충돌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종교일 경우에는 더욱 심한 갈등을 빚게 된다. 처음 불교가 신라에 들어올 때, 우리의 토착신앙과 마찰을 일으켜 이차돈이 순교한 것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 박해 사건도 그 궤를 같이한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 사건은 크게 세 번 일어났는데, 1791년(정조 15)의 신해사옥.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1866년(고종 3)의 병인사옥이 그것이다.
신해사옥은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자충이 어머니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제례를 지낸데 대하여 일어난 박해인데, 천주교 신앙을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이를 반대하는 공서파(攻西派)의 대립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나, 당사자에 대한 형을 집행하는 수준으로 끝났다
그 후 천주교는,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정조의 관대한 정책으로 인하여 점차 그 교세가 확장되었다.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적극적 박해를 가하지 않았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남인 곧 시파(時派))들도 이를 묵인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정권이 교체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와 서교(西敎)를 엄금하고 근절하라는 이른바 금압령(禁壓令)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신유박해(신유사옥) 사건이다.
이 박해의 표면적 이유는 천주교가 우리나라의 전통사상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다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상을 신봉한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정치적 대립과 투쟁이 그 속에 숨어 있었다. 천주교 박해를 위한 이면의 그림자로 존재하는 정치적 배경은 사도세자를 굶어 죽인 사건으로 올라간다. 세자가 무고를 받아 폐위되고,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이른바 임오사건이 발생하자, 세자를 동정하는 세력과 세자를 더욱 공격하여 곤경에 몰아넣고자 하는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세자를 동정하는 세력을 시파(時派)라고 하는데 그 대부분이 남인이었다. 세자를 공격하는 세력을 벽파(僻派)라 하는데 그들은 거의가 노론이었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정조는 자연히 시파를 가까이 하고 벽파를 멀리 하였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의 대부분은, 이 시파 즉 남인 계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후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됨에 따라, 왕후편인 벽파가 다시 정권을 잡고 시파를 억누르게 되었다. 이 권력 교체의 일환으로 벽파는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시파를 몰아내기 위한 빌미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는 원래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시파와 벽파의 대립에서는 항상 벽파편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김상로·홍계희 등과 결탁하여, 세자와 영조를 이간시키고, 사도세자를 경운궁(慶運宮)에 이거하게 한 김구주(金龜柱)는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아우였다.
이렇게 벽파들은 대왕대비를 움직여 천주교에 대하여 호의적이던 시파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남인을 척결하는데 천주교라는 포장막을 덧씌운 것이다.
그러니 천주교 박해는 시파와 벽파간의 정쟁이 빚어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신유사옥은 천주교가 전통사상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하는 이유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이를 구실로 삼아, 노론(老論) 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의 세력을 꺾고자 하여 벌인 권력다툼이었다.
병인사옥 역시 마찬가지다.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없었다. 대원군의 부인 민씨나 유모도 천주교 신자였다. 이렇듯 천주교에 대하여 호의적이던 대원군이 왜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1860년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청나라는 러시아의 중재로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고 통상요구에 응하게 되었는데, 러시아는 이 대가로 연해주를 얻게 되었다. 이를 본 대원군은 러시아에 대하여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때마침 1864년에 러시아인이 경흥부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때 천주교인들은 프랑스 영국 등과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대원군에게 청했다. 그들은 이 일이 성공하면 천주교 포교에 유익할 것이라 생각했고, 대원군은 러시아를 막는 데 유리한 계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양자의 입장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먼저 프랑스 선교사와 접촉하였는데, 그 중개 역할은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이 맡았다. 남종삼은 철종 때 승지를 역임하였고, 고종 때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는 업무를 담당한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종삼이 벌인 대원군과 프랑스 신부와의 접촉이 지지부진하게 되어 대원군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들과의 접촉에서 얻은 것은 없고, 천주학쟁이와 대원군이 깊이 결탁되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퍼졌다. 또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서도 민감성이 점차 둔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마침내 궐내와 위정척사(衛正斥邪) 세력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얻는 데 실패한 대원군은, 천주교 선교사와의 접촉에서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정치적 공세에 부딪히는 위험만 가득 안게 되었다. 이에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마침내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병인사옥을 일으키게 되었다. 손해 본 장사에 대한 되치기를 한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론과 명분의 뒷받침을 그 생명으로 한다. 특히 대원군은 명성황후와의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는데다가, 섭정이라는 비정통성을 항상 의식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타개하고 다지기 위하여 천주교 박해라는 방편을 내건 것이다. 천주교 박해의 표면은 위정척사였지만, 이면의 참모습은 정치적 전략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의 천주교 박해는 단순한 종교적 탄압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빚어진 비극적 사건이었다. 겉은 종교 문제였지만 속은 정치문제였다.
그런데 그러한 박해로 인하여 천주교는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살아남은 신자들이 전국의 산야로 숨어들면서, 천주교가 일반 서민들에게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