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답·고택 버리고 애국충절 위한 풍찬노숙의 길
지난 8월10일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서울, 부산같은 대도시를 제치고 왜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섰을까. 안동은 구한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일어났던 갑오의병(1894년)의 발상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10년 경술국치까지 전국에서 자결한 순국자 66명 중 안동인은 10명이다. 또 2007년까지 전국의 독립포상유공자 1만1천여명 중 310명이 안동출신이고, 포상 대기 중인 유공자만도 700여명이나 된다. 전국 시·군의 독립포상유공자 평균이 30여명인데 비해 무려 10배가 넘는 안동은 가히 독립운동의 요람이라 할 만하다. 이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 더 명성을 떨쳤다. 서간도로 정치적 집단 망명을 결행한 안동 출신 항일 레지스탕스는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항일게릴라전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은 광복이 되는 그 날까지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넘나들며 독립투쟁의 불꽃을 지폈다. 그러한 독립 선열의 발자취를 찾아 후손들과 함께 만주답사에 나서 4차례에 걸쳐 영남일보에 게재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이 안동의 남서쪽을 휘감아 도는 의성김씨 집성촌 내앞마을(川前里)에 '협동(協東)학교'라는 3년제 사립학교가 개교했다. 이 학교는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중등학교로 안동 동쪽 명문가들이 사재를 털어 마련한 애국계몽학교였다. 협동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파행을 겪다 5회 졸업생만 배출시킨 뒤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됐다. 그러나 졸업생 대부분은 독립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었다. 일부는 만주로 망명했고, 국내에 남은 이들은 3·1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에 참가하거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학교 설립을 주도한 동산(東山) 류인식, 석주(石州) 이상룡, 일송(一松) 김동삼, 백하(白下) 김대락 등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의 명문거족은 경술국치 후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주저 없이 만주로 떠났다. 특히 백하 김대락이 살던 내앞마을 의성김씨 일가와 석주가 살던 도곡마을의 고성이씨 일가는 아들, 며느리, 조카 할 것 없이 총 70여가구 150여명이 망명길에 나섰다. 당시 국내 대부분의 전통 명문가들이 가문을 잇기 위해 자식을 일본으로 유학 보낼 때, 이들은 다함께 전쟁터로 갔다. 이 밖에도 3대에 걸쳐 8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향산 이만도의 도산 하계마을 진성이씨 일가, 무실·박실·삼산마을에 살던 동산 류인식의 전주류씨 일가, 황호를 원로로 하는 평해 사동마을 평해황씨 일가, 남후면 안동권씨 추산 권기일 일가, 왕산 허위의 친족인 임은허씨 일가 등 수십 가구의 명문거족이 줄줄이 전답과 고택을 버리고, 수 천리 풍찬노숙의 길을 택했다.
일제가 양반들의 지주권을 보장해주는 토지정책을 펼치면서 권문세가나 전통명가 대부분이 식민지 현실에 안주했을 때, 이 지역의 수많은 명문가가 보여준 저항정신은 각별하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실천적 의를 중요시한 퇴계학맥과 문중 간 혼맥으로 엮인 혈연의식이 그러한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석주 이상룡은 안동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가다. 1858년에 태어난 그는 고성이씨 17세 종손으로 서산 김흥락의 제자다. 학봉 김성일의 11세 종손인 서산은 당대 퇴계학맥을 대표한 안동 최고의 유학자이자 독립의병장이며, 석주에게 진외할아버지(아버지의 외삼촌)뻘이다. 서산의 맏아들 김용환은 안동에 남아 파락호 행세를 하며 지금 돈으로 약 180억원을 만주지역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낸 인물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런 사실을 숨겼다. 서산의 제자 700여명 가운데 60명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을 정도로 그의 학문적 영향은 컸다.
서산의 영향을 받은 석주는 을미사변, 을사늑약으로 이어진 암울한 시대상황에 맞서 젊을 때부터 의병활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그는 잇단 패배와 좌절을 겪는다. 그는 국내 의병활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신학문을 적극 수용하는 한편 신민회의 안창호·이회영·양기탁 등과 교류하며 안동에서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는 경술국치 후 나라가 통째로 일제의 손에 넘어가자 더 이상 국내에 머무르길 거부하고, 애국지사들과 만주에서 독립군기지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1911년 그는 99칸 고래등같은 임청각을 떠나기에 앞서 안동에서 가장 먼저 노비문서를 불 사르고 상투를 잘랐다. 이상룡은 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을 세웠다. 이 때 들어간 독립군기지 건립과 무기구입 자금에 우당 이회영 일가의 재산 600억원과 석주의 재산 400억원 등이 들어갔다고 한다. 몸도 재산도 다 독립운동에 바친 이상룡은 당숙 이승화를 포함한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까지 4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의 두 동생과 조카를 비롯해 이 집안에서만 9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석주는 이후 서로군정서 독판,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초대 대통령)에 선출돼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에 힘썼다. 그의 손자며느리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만주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집안의 역사가 담겨 있다. 허은 여사는 왕산 허위가 재종조부이며, 이육사의 모친이 그의 고모다.
석주의 처남인 백하 김대락은 6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만삭의 손부·손녀를 대동한 채 석주에 앞서 만주로 떠났다. 손부와 손녀는 눈보라 치는 서간도 망명길에서 해산했다. 그의 별호인 백하(白下)는 백두산 아래에서 산다는 뜻으로 망명 후에 지었다. 안동을 떠나면서부터 그가 3년 동안 쓴 '백하일기'에는 험난한 노정과 이주민들의 생활상이 자세히 담겨있다. 이 망명일기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천전리에서 백하의 옛집(白下舊廬)을 지키고 있는 종증손 김시중씨(71)는 "할아버지는 천석꾼으로 남부러울 게 없는 유학자였습니다. 백하구려는 협동학교의 교실로도 이용됐지요. 할아버지는 재산을 처분한 채 그 연세에 죽기를 각오하고 만주로 가신 겁니다"라고 했다. 그는 4년 뒤 70세의 일기로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서 작고했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찾을 수 없어 아직도 봉환하지 못한 상태다.
백하의 매제는 파리장서(1919년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주도한 이중업(향산 이만도의 아들)이다. 그의 누이는 여성으로서 안동에서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은 김락 여사다. 또 백하를 모시고 만주로 간 아들 월송(月松) 김형식은 종형인 김만식·김정식 등과 함께 고모부인 이상룡을 끝까지 도우며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 협동학교의 교사로 활약하기도 한 그는 안동 레지스탕스의 마지막 기착지 하얼빈 취원창에서 민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사회주의 독립운동에도 가담해 1944년에는 조선독립동맹북만지부 책임자를 맡기도 했으며, 광복 후 1948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때는 임시의장 자격으로 사회를 봤다. 그는 북에 살면서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해 금강산으로 유폐되었다가 1950년 미군이 진군할 즈음 금강산에서 자결했다고 알려진다.
내앞 출신 중 일송 김동삼을 빼고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역사를 논할 수 없다. 그의 본명은 긍식이었으나, 서간도로 가서 동북3성을 뜻하는 동삼(東三)으로 바꿨다. 1920년 경신참변 때 일제에 학살된 동생 찬식 역시 김동만(東滿)으로 바꿔 활동했다. 일송은 30세 때 협동학교 교사로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서간도 망명 후 석주의 일을 돕다 독립군 비밀군영인 백서농장을 건립했다. 그 후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경신참변 후 흩어진 독립군을 모아 통의부를 창설, 총장에 올랐다.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 대회 때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가했고, 전만통일회의 의장으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1927년 김좌진·이청천 등이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를 합해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최했을 때 그는 의장에 선출됐다. 그는 '만주의 호랑이'로 불릴 만큼 활동 반경이 넓었다. 북간도 용정에 있는 일송정(一松亭)도 그의 호를 따 붙였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그는 신출귀몰했다고 한다. 그의 며느리인 이해동 여사가 시아버지를 평생 세번밖에 못 봤다고 실토할 만큼 일송은 오직 독립운동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1931년 사돈 이원일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향년 60세에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 지켜보리라. 일송의 시신을 수습해 5일장을 치른 만해 한용운은 일송의 유언을 보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일송의 맏며느리 이해동 여사가 쓴 '만주생활 77년'이라는 수기에는 일송을 비롯한 안동인들의 항일역사가 담겨 있다.
만주로 간 안동 항일 명문가 (이주와 정착)|★ 우리나라역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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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찾는 抗日에 소작농 노릇인들 못하리오…"
괴나리봇짐 지고 추풍령∼서울∼신의주 거쳐
홑옷만 입고 압록강 칼바람 맞으며 도보 횡단
안동 사람 집성촌 삼원포가 독립운동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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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압록강 국경에서 일본군의 검문을 받고 있다. 안동을 떠나 유하현 삼원포에 도달할 때까지 안동인들은 수도 없는 일경의 검문검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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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2월24일(음력),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일가를 필두로 안동을 떠난 레지스탕스들의 최종 종착지는 서간도 통화(通化)현 삼원포(三源浦).
이들은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삼삼오오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채 이역만리 길을 떠났다. 이들은 대개 추풍령~서울~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으로 가는 루트를 택했다. 추풍령까지는 걷거나 수레를 타고 갔으며, 추풍령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신의주까지 북상했다.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으면 단둥(丹東)이다.
"기차역까지 종들이 따라왔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자 주인들도 울고, 종들도 울었다. 생전 처음 기차를 탔다. 일본의 열차 수색원들이 칸마다 다니면서 독립지사를 잡아내려 감시를 했고, 한 의자에 두 사람씩만 앉게 했다." <허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아래윗니가 연방 방아질을 하였고, 손발은 얼어서 제 감각을 잃었다. 고놈의 추위 왜놈보다 더 독하다."<이해동 회고록 '만주생활 77년')
안동에서 솜옷을 모르고 살던 이들은 영하 20℃가 넘는 강추위에 홑옷만 몇 겹으로 걸친 채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보로 건넜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여도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아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밭, 내 집을 빼앗고/ 또다시 내 처자를 넘겨다보니/ 차라리 이 머리가 잘릴지언정/ 내 무릎 꿇어 종이 될까보냐/ 집을 나선 지도 한 달이 못 돼 압록강을 건넜으니/ 누가 나의 길을 더디게 할까보냐."
1911년 1월 엄동설한. 53세의 석주 이상룡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장한 각오로 거국시(去國詩)를 읊었다.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열흘 넘게 마차를 타고 도착한 첫 기착지는 봉천성 회인현 항도촌(恒道村). 지금의 지린성 지안시 화디엔(花甸)진 헝루춘(橫路)촌 일대로 짐작된다.
이 지역은 백두대간의 서남쪽 줄기인 노령산맥이 압록강을 따라 뻗어있는 곳. 이들은 압록강을 거슬러 집안현까지 갔다가 다시 노령산맥을 타고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어떤 이들은 험한 육로보다 수로를 택하기도 했다.
1915년 초봄에 출발한 임은허씨 성산 허로(왕산 허위의 형)일가의 경우엔 압록강에서 네 척의 배를 타고 보름동안 강을 거슬러 올라가 회인현 화전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당시 압록강 수로는 백두산에서 벌채한 나무를 옮기는 데 주로 이용했다. 고구려 때는 고구려 수군이 국내성 집안에서 압록강 물길을 타고 황해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1937년 일제 만주국이 수풍댐을 건설하면서부터 압록강 상류로는 갈 수가 없게 됐다.
화전진 횡로촌은 고구려 시조 주몽이 첫 도읍을 정했던 환런시 졸본성(오녀산성)과 지안시 국내성의 중간 지점이다.
서간도는 백두산 서쪽 압록강 너머 혼강(비류수)을 비롯해 송화강 중·상류지대로 관전, 신빈, 환인, 집안, 유화, 통화, 임강, 정우, 장백, 무송 등지의 남만주일대를 일컫는다. 당시 북간도(현 옌볜조선족자치주 일대)에는 서전서숙, 명동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가 세워지는 등 함경도에서 이주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미 터전을 잡고 있었다. 특히 룽징(龍井)은 북간도 한인사회의 중심이었다. 서간도에도 평안도 이주민이 많았다. 관전현 부근에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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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여인들이 전통복장을 한 모습. 삼원포에 정착한 안동인들은 중국인과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청나라 복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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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 의성김씨 이주민들은 항도촌에서 고성이씨, 평해황씨 집안과 합류한 뒤 삼원포 인근에 정착지를 물색했다. 1911년 4월경 의성김씨 집안과 진성이씨 일가는 각각 삼원포 북쪽 이도구와 삼원포 남쪽 4㎞지점 만리고에 터를 잡았지만, 석주 일가는 토지와 집을 구하지 못해 삼원포 일대 영춘원, 대우구, 추가가 등지로 옮겨 다녔다. 이들은 자주 만나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했다.
안동 레지스탕스들의 새로운 집성촌이 들어선 유하현 삼원포 일대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발상지다. 삼원포는 세 골의 물이 합해져 붙인 이름으로 땅이 기름지고, 물이 많아 벼농사에 적합했다. 이곳은 1895년 김구 등이 두 번이나 답사한 곳으로 알려진다. 이 후 이동녕, 이회영, 주진수 등 신민회의 주도아래 치밀하게 준비된 독립군기지였다.
이들은 대고산 아래에서 한인군중집회를 열고, 1911년 5월과 6월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으로 신식교육과 군사훈련을 함께 실시함)와 경학사(耕學社·만주지역 최초의 독립운동단체)를 잇따라 설립했다. 이후 경학사는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대한통의부-정의부 등으로 계승된다.
이 때 김대락은 신흥학교의 면학을 독려하는 권유문을 쓰기도 했다. 당시 학생들이 불렀던 신흥강습소의 교가 1절이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南)의 영절에/ 여러 만만 헌원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 것을 품에다 품어/ 젖 먹여 준 이가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가슴에."
여기서 헌원 자손이란 중국을 일컫고, 동해섬 어린 것은 일본을 말한다. 즉 우리 민족이 중국에게 문명을 전해주었고, 일본을 먹여주었다는 뜻으로 젊은이들에게 드넓은 기상과 포부를 가질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상룡은 경학사 초대 사장으로 선임되고, 성산 허로와 일송 김동삼이 각각 초대 부민단 단장과 부단장을 역임하는 등 안동 레지스탕스들은 서간도 독립군기지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당시 석주가 쓴 '대동역사'는 신흥학교의 역사교과서로, 만주 땅이 단군 이래 우리 겨레의 발상지이며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의 옛 터였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이들은 현지 중국인들과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머리와 복장을 중국식으로 했으며, 어학강습소를 설립해 한어교육을 하기도 했다.
서간도에 도착한 첫해 이들이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양반지주에서 졸지에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은 농사를 직접 지어본 적이 없는데다 변덕스러운 만주날씨에 적응을 못해 대흉작을 경험했다.
"고향에서는 양반이라고 말고삐 잡고 경향 간 내왕이나 하며 글이나 읽던 분들이 생전 해보지도 않고, 특히 듣거나 본 적도 없는 화전농사를 직접 하자니 고달프기 짝이 없다. 식수로는 도랑물을 먹었다. 그런데 그 해 오뉴월이 되자 그 물 때문에 동네 사람들 모두가 발병했다. '수토병'이라고도 하고 '만주열'이라고도 했는데 석달간 전염병이 돌아 노약자는 물론 젊은 사람도 많이 죽었다."(허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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