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봄에는
송 년 섭
이른 새벽, 잠에서 덜 깬 나에게 아내가 말을 걸어 왔습니다.
“2044년이면 몇 년 남았지?”
“한 30년 남았구먼”
“그 때 우리는 몇 살이지?”
“100살이 한참 넘었지. 왜 그러는데?”
아내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습니다.
2044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연속하여 휴일이랍니다. 달력이 생긴 이래 최초인데 그 후 언제 이런 연휴가 올지는 아직 모른답니다. 내역인 즉, 1일 토요일. 2일 일요일. 3일 개천절. 4일 추석연휴. 5일 추석. 6일 추석연휴. 7일 추석연휴. 8일 토요일. 9일 일요일. 이렇게 긴 연휴를 가져 본 적은 없었지요. 그 때까지 살아서 연휴를 즐기자고 아내의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는데, 30년 후에 추석이 남아 있을지, 경제가 바빠 토요일도 예전처럼 근무를 할지, 기념일이 없어질지 모르는 판에 백 살도 넘는 30년 후를 미리 본다는 것은 생각 할 가치가 없는 것 같다고 콧방귀를 날렸지요. 우리는 지금도 365일 휴무이고 할 일이 별로 없는데 굳이 30년을 기다렸다가 아흐레 연휴를 즐긴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일갈하였습니다. 새벽부터 문자를 보내 여러 사람 혼란스럽게 만든 아내의 친구가 기발하여 기분은 가벼웠습니다.
며칠 전 어느 친구가 스마트 폰으로 노래를 들려주는데 재미있어 소개합니다.
‘1절은 60세에 저세상에서 데리러 오거든 젊어서 못 간다고, 70세에는 할 일이 남아서 못 간다고, 80세에는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90세에는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고, 100세에는 좋은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하라. 후렴은 아리랑 곡조여서 애잔하다. 2절은 80세에 또 데리러 오거든 자존심 상해서 못 간다고, 90세에는 알아서 갈 텐데 왜 또 왔느냐고, 100세에는 극락왕생 자리를 알아보고 간다고 전하라.’ 이러한 내용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랫동안 살고 싶은 것은 사람 모두 가지고 있는 욕망이겠지요. 건강이야 질병 없이 병원, 약국 한 번 안 가는 것이겠고요. 행복은 성별, 직업, 가족환경, 처지, 욕심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밥 세끼 굶주리지 않고 친구들 만나 담소하고, 가난을 끼고 살아도 웃을 수 있고, 자손들 제 앞가림 하며 살아가는 거 보며 흐뭇하다면 그게 행복 아니겠습니까.
뼈도 가시도 없는, 허물어 질듯 작은 몸으로 눈비 맞으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이 나이까지 왔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삶을 사셨을 먼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 받은 한 토막의 생명을 이어가며 손자까지 대 물림을 하여 생명을 나누어 주었으니 이것도 행복이지요. 손자가 이번 봄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갑니다. 유치원 졸업할 때, 공부하기 싫고, 모든 걸 다 아니 학교를 없애버리면 안 되겠느냐고 떼를 쓰던 바로 그 놈입니다. 팽팽하던 젊은 꿈은 이미 바람 빠진 풍선이 되었지만, 요절이라고 위로 받을 나이는 지났으니 또한 행복이지요. 손자에게 할아버지 저 세상 가거든 내 길을 가르쳐 줄 테니 저승의 안 뜰까지라도 쫒아와 나를 구하라고 얘기 하였지만 정말 농담이었습니다.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 사회, 경제, 문화, 특히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상상도 못할 세상을 살고 있으니 이 또한 행복입니다. 50여 년 전 여주 시골집에서 서울을 가려면 자갈길을 흙먼지 날리며 네 시간 넘게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얀 교복은 누렇게 찌들어 다시 빨아야 했는데, 이제 그 버스길은 잘 포장되어 한 시간이면 당도하는 자가용길이 되었고, 그것도 싫으면, 전철로 갈 수 있으니 세상에 대고 불평불만 이야기하면 안 되겠지요.
세상이 바뀌고 달라져도 사람 몸은 어쩔 수 없이 늙어야 하나 봅니다. 10년 전 방광암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재발되고 또 수술하고 지금도 병원을 가끔 가는데(방광암은 병축에도 들지 못하는 쉽고 가벼운 질병입니다), 한 가지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작년 봄, 심장 쪽에 통증이 있고 혈압이 올라 심전도, X레이 검사를 하고 혈압강하제를 복용하는데, 앉았다가 일어서면 어지럽고 기분이 개운치 않아 며칠 전,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신경과, 순환기내과를 오가며 폐, 심전도, 위내시경, 심장 초음파, 머리MRI, 뇌혈류검사, 운동 부하검사, 혈액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말씀이 좀 싱거워 맥이 풀렸습니다. 검사결과 전혀 이상이 없고 기립성(起立性)저혈압 같다는 것입니다. 3주일 치 약을 복용하고 시간 나는 대로 1~2개월 후에 다녀가라네요. 그리고 덧붙이는 의사 선생님 결론이 ‘술을 마시지 말라’였습니다. 술 때문에 혈관이 경련을 일으켰다나요. 술 마시지 말라는 한마디를 듣기위해 2주 동안 이틀에 걸쳐 50여 만 원의 비용을 들인 것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복용하고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혈액검사결과를 보더니 의사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그러나 어지러움 증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말이 없으니 저는 답답하지요. 또 결론은 ‘술을 마시지 말라’입니다. 그 후 저는 술을 멀리 하고 있습니다. 머리 어지러운 게 조금 차도가 있으니 다행이랄까요. 마을회관 체육실에서 러닝머신으로 걷기운동과 가벼운 역도운동도 다시 시작하였고 조금 따뜻해지면 자전거도 다시 타기로 아내와 약속합니다.
주변에 뇌졸중(중풍)에 걸려 자신과 가족이 큰 고생하는걸 보면서 제일 악질이 중풍이라고 단정합니다. 저도 그런 병만은 피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병원을 찾아 다닌것이구요. 건강에 관한 불안감, 스트레스,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 애 좀 쓰겠습니다.
만약 아내가 또 백 살까지 살자고 이야기한다면 생각 좀 해 보자고 긍정적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는 것이니까요.
귀한 시간, 귀한 지면(紙面)에 별것도 아닌 개인사를 늘어놓아 송구합니다.
벌써 봄이 오고 있습니다. 고통을 이겨 내며 도전과 새로운 출발을 준비합니다. 새 봄에는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겨울을 넘어 새 생명을 이어가겠지요. 자연과 땅을 존중하는 삶,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는 삶 되시고 건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새 봄에는 좀 더 여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