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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 직 책 | 육 사 | 이후 주요 경력 |
전두환 | 상임위원장 | 11기 | 제11, 12대 대통령 |
노태우 | 상임위원 | 11기 | 내무장관, 민정당대표위원, 대통령 |
정호용 | 상임위원 | 11기 |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국회의원 |
이춘구 | 사회정화위원 | 14기 | 국회의원, 내무장관, 민정당사무총장 |
안무혁 | 건설위원 | 14기 | 국세청장, 안기부장 |
민병돈 | 내무위원 | 15기 | 특전사령관, 육사교장 |
최평욱 | 운영위원 | 16기 | 보안사령관, 철도청장 |
허삼수 | 사회정화위원 | 17기 | 대통령사정수석비서관 |
서완수 | 사회정화위원 | 19기 | 특전사령관, 기무사령관 |
(5)민병돈<前 육사교장>
- 욕심 버리니 몸도 따라 건강 -
- 많이 걷고 음식 체질에 맞춰 -
“건강관리요? 모순된 얘기 같지만, 나는 특별하게 규칙을 정해 관리를 하려하지 않는 것이 바로 관리법이라고 봐요?”
군생활로 다져진 민병돈 前 육사교장은 건강에도 틈새가 없어 보인다.
육사(15기) 생도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불문에 들어선 그는 돌이켜 생각하면 부처님 말씀대로 욕심을 버린 삶의 철학이 건강을 유지시켰다고 말한다.
“욕심버린지 오랩니다. 욕심이 없으니 분노하고 섭섭해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 내가 꼭 바라는 것이 없으니 애를 태울일도 없습니다.”
불혹의 나이에 스스로 욕심없음을 감지했다는 그는 부처님 말씀 그대로 마음이 편안하면 자연 몸도 건강해진다고 강조한다.
“욕심을 놓으면, 우선 남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만사에 초탈하려는 노력을 하게되지요. 사적으로 또 세속적으로 이익을 탐하지 않으면 모든 밖으로부터의 시선이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런 삶이 어떤 이의 눈에는 바보로 보이고 또 어떤 이는 고집이 센 사람으로 봅니다. 바보가 되는 겁니다.”
경봉스님의 법어 중에 “바보가 되거라”는 가르침은 곧바로 육신을 건강하게 하는 즉효약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 세상이 바보로 채워지는 그때가 바로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제시한다.
또 한가지 뺄 수 없는 건강관리 비법으로 영양사인 아내 구문자씨의 사상체질에 입각한 음식관리를 꼽는다. 다행히 두 아들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태음인이라 조리에서 반드시 체크된다.
심지어 외식으로 태음인에 좋지 않은 음식을 취하는 날은 그 즉시 이를 해소시키는 ‘대안(對案) 음식’이 식탁에 올라온다. 여담으로 들려주는 ‘많이 걷기’도 그가 챙기는 건강법.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항상 미리 서둘러 약속장소로 출발해 전철이든 버스든 한 두 정류장 전에 내린다. 이것은 전역후 생활의 여유속에서 찾아낸 비법이다.
위영란 기자(yryui@buddhap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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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님의 글을, 글이 실린 며칠 후 인터넷 서핑 중에 접하고 반론을 쓰려하였으나 해외로 나갈 일이 생겼고, 그래서 이 글은 북유럽의 한 나라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고 노트북을 가지고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열악한 그 지방의 'internet cafe(우리의 PC방)' 사정으로 올리지 못하다가 귀국하여 이렇게 올리는 것입니다. 교장님의 글이 실린 지 3주일 가량이나 지난 후에 올리는 글이니 만큼 시의성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나, '민족공조는 속임수일 뿐'이라는 교장님의 글은 시의성을 따질 겨를이 없을 만큼 엄청난(?) 글인데다, '민족공조'에 시의성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뒤늦게나마 반론글을 올립니다. 저는 이 글이 교장님의 글 옆에 나란히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길 바랍니다. 교장님께서는 <동아일보>의 지난 1월 30일자 여론마당의 글 <'민족공조'는 속임수일 뿐이다>에서 소위 '민족공조'에 대해 '비아냥'으로 일관하십니다. 갈라진 민족국가에서 '민족공조'하자는 것이 무슨 그리 큰 흉이라고 그렇게 조롱을 하고 계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그들이 '민족'을 부르짖을 때는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라구요? 그렇다면 우리 갈라진 남북에게 '민족'이란 말은 영원히 써서는 안 될 말인가요. '민족'을 말할 때 교장님은 왜 오로지 '속임수' 만을 떠올리는지요? '민족공조'가 무엇입니까? 갈라진 남과 북이 '서로 돕자'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싸우지 말고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돕지 않고 합칠 수 있습니까? (물론, 이 질문은 교장님께서 남과 북이 합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면 속임수가 두려우니 아예 합치지 말자는 말씀이십니까. 도무지 무슨 의도로 그런 폭언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열되지 않은 나라가 민족주의를 부르짖는다면 배타적, 우월적 민족주의로 흐름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한 민족이 둘로 갈라져있는 상황에서의 민족주의란 위의 민족주의와는 다를 것이며, 필경 민족통합을 위한 민족주의일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요? 물론 '민족공조'를 하자면서 그걸 이용해서 무언가 다른 것을 얻어내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그것대로 철저히 검증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남북이 한번도 민족공조를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 상황에서 '속임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우리가 지난 2000년의 6. 15 선언 말고는 언제 민족공조를 한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나요? 그 6.15선언도 미완의 민족공조일 뿐입니다. 답방도 이루어지지 못 했을 뿐 아니라 부시의 등장으로 그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무슨 '속임수'가 있었던가요? 그리고 느닷없이 '단군릉' 얘기는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평소에 가지고 계시던 조각지식을 이 김에 나열해 놓은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한가지 목표-'민족공조는 속임수다'-를 향하여 논리적 무리를 무릅쓰고 돌진하고 계신 것으로 비쳐집니다. "이러한 저들의 통일전선전략에 말려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동조하는 것인지 우리 내부의 일각에서도 요즘 '민족우선', '민족공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도 '통일전선전략'이란 반세기전 냉전시대의 케케묵은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민족우선'이나 '민족공조'를 얘기하면 '통일전선전략'에 말려든 것입니까? 무슨 논리가 그런 논리가 있습니까. 그 바로 뒤에는 또 이런 말을 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민족(남북)끼리 공조해 미국을 상대로 핵문제도 해결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살려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통일하자고 한다. 가슴에 와 닿는, 듣기 좋은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물론 주한미군은 당연히 제 나라로 돌아가야 하고...참으로 속 들여다보이는 술책이다." 교장님,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건지요. "민족끼리 공조해서 미국을 상대로 핵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문제입니까,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주한미군은 당연히 제 나라로 돌아가야 하고..."가 문제입니까? 주한미군이 제 나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요? 무엇 때문에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되도록 우리나라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건지요? 이제 그만 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주한미군은 우리에게 정신박약 아편입니다. 스스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음에도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아니 스스로 일어날 생각을 아예 못하게 만드는 아편입니다. 우리나라는 반세기를 그렇게 살다가 의지박약 국가가 되어버렸고,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의지박약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라를 그렇게 만든 주역들의 모습이 교장님에게서 어른거립니다. 평생을 남에게 의존해서 스스로 일어서려는 생각을 못하다가 결국은 앉은뱅이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그렇게 만든 주역들의 모습이. 교장님, 우리나라, 외세가 없어도 북측을 그렇게 두려워해야 할만큼 허약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장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허약한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정신은 거의 박약 수준에 가깝습니다. 지난 수십년을 독재정권은 그 불법적이고 정통성 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측의 위협을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 왔고 거기에 국민은 오랫동안 세뇌되어 있습니다. 그 공백을 주한미군이 메우고 있다고 인식이 일반화하게 되었고 그래서 주한미군이 나가면 마냥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신박약 증세로부터 먼저 벗어나 스스로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준비를 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 하고 남의 보호국을 자처하려 하는 그 부끄러운 모습의 뒤에는 바로 교장님 같이 냉전시대의 사고를 아직도 업처럼 달고 다니는 분들이 계시고 그것을 부추기는 못된 언론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여태껏 그런 식으로 먹고 살아온 추한 언론이 아직도 힘을 쓰고 있는 부끄러운 세상입니다. 끝으로 교장님께서는 "그런 자칭 민족주의자들이 1950년엔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고 남침했다니...지난해 6월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넘어와 우리 구역에서 경비중이던 남측 해군 함정을 기습공격해 25명의 사상자를 낸 만행을 또 뭔가. 휴전선 일대에서 우리를 겨누고 있는 중화기들과 100만 병력은 또 뭔가. 저들은 이미 같은 민족이기를 포기한 것이다"라고 쓰셨습니다. 이제는 지겨운 '올드 레퍼토리'입니다. 휴전선 일대에서 우리를 겨누고 있는 중화기와 100만 병력에 대해서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우리도 똑같이 그들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으며, 북측이 반민족적이라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반민족적 아닙니까. 100만 병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60만이라 덜 반민족적이란 얘기입니까? 사태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실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북측이 중화기들을 휴전선일대에 전진 배치한 것은 그들 나름의 생존전략입니다. 그들로서는 목숨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최대한 공격적인 배치를 해 놓은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든 나라가 바로 미국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힘이 없어 덩달아 미국을 따라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이 바로 '외세공조'의 다른 이름, '한미공조' 아닌가요? 물론 우리에게는 위협적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도 위협하지 않을테니 그 쪽도 치워라, 서로 대화해서 풀자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민족공조' 하자는 것 아닙니까? 서로의 심장을 향해 겨눈 총부리를 치우고 같이 평화롭게 잘 살아보자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6.15 공동선언 하나만 놓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왜 그 최초의 민족적 쾌거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지. 지금 미국과 북측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대립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세공조'하자구요?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북측만 인명이 살상되고 황폐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금 동족간의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하고 결국 남측도 황폐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왜 우리가 우리의 의사에 반하여 다시 서로를 죽이고 죽어야 하는 전쟁을 벌여야 합니까? 그것도 또 다시 우리 땅에서. 저는 북유럽의 노르웨이라는 나라에서 체류중 이 글을 썼습니다. 세계의 10개국 대표와 회의를 하기 위해 그곳에 갔습니다. 그 중에는 6개국이 유럽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도 다르고 민족도 다르고 이념도 조금씩 다릅니다. 그리고 그 옛날 우리가 서로 싸우던 비슷한 무렵에 서로를 죽였던 원수지간의 나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럽연합이란 것을 만들어서 10여개의 나라가 마치 한나라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남북을 바라보자니 참으로 한심했습니다. 도대체 남들은 민족과 언어가 달라도 지금은 모든 것을 잊고 저렇게 사이좋게 잘 살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 아픈 상처를 덧내가며 살고 있단 말입니까. 무엇이 우리 사이를 그렇게 가로막고 있단 말입니까. 말이 다릅니까 민족이 다릅니까? 오로지 다른 것은 이념뿐인데, 이념이란 이젠 살아가는 방식일 뿐입니다. 그것이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려야 할 이유인가요? 교장님은 왜 그토록 '민족공조'를 비아냥거리시는 건지요? 그러면 '외세공조' 해서 벌어질 결과에 자신 있으신가요? 교장님, 왜 갈라진 우리 한반도에서 '민족공조'가 속임수일 뿐인지 속 시원히 대답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아일보>에게 한마디. 재작년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그리고 특히 대선기간 동안에 보여주었던 <동아일보>의 때로는 <조선일보>를 능가하는 야비하고도 퇴행적 논조와 보도태도를 보며 이제 우리는 '조중동'에서 '조동중'으로 그 순위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악의 축' 신문의 순서가 반드시 발행 부수 순서대로 가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보면서 나의 그런 심증은 더욱 굳어져 간다. |
대한민국지키기· 친북좌파종식 위해 3·1국민대회 연다 |
뉴스일자: 2007-0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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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총은 일터로, 한총련은 학교로 돌아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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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全敬雄 (조갑제 닷컴 기자) |
5월20일 오후2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위치한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 앞에서는 평택시민단체협의회, 팽성상인연합회가 주관하고 국민행동본부, 대령연합회, 재향군인회가 참가한 가운데 ‘평택미군기지 확장촉구 및 불법폭력시위저지 주민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날 결의대회에는 약 2000여 명의 주민, 재향군인, 시민단체 회원들이 참여했다. 결의대회가 시작되기 15분 전 지방선거를 앞둔 각 당 후보의 거리 유세단이 선거유세를 하려다 주최 측의 권유로 결의대회에 참여했다. 대회장 주변에는 5월4일과 5일, 범대위가 군인과 경찰을 폭행했을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팽성지역 상인들은 결의대회 참가자들에게 생수와 부채 등을 나눠주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결의대회는 평택발전협의회 김창규 회장의 개회사로 오후 2시 정각에 시작됐다. 김 회장은 “여러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다”며 이 대회를 열게 된 배경과 왜 결의대회를 열게 됐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김 회장은 “지난 5월4일과 5일 양일에 걸쳐 불법반미친북세력이 국군의 철조망 스무 군데를 뚫고 난입해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군을 마구잡이로 팼다”며 “이에 우리 평택 시민들은 분노를 감출 수 없어 반미친북을 외치는 불법집단을 규탄·응징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를 열었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의례와 이헌현 한미 부동산협의회장의 경과보고가 이어졌다. 경과보고가 끝나고 김기호 평택상인연합회장의 대회사가 시작됐다. 김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2004년 중반 정부의 미군기지 평택 이전 발표가 있을 당시 대추리 사람들이 시위를 벌였을 때 주민들은 ‘저 사람들이 땅값을 좀 더 보상받으려고 저러는구나’라고만 생각하고 노인들이 농토를 내주려니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땐가 문정현이라는 신부가 등장하고 대학생들이 농활을 핑계로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일이 이상하게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은 대추리 농민을 볼모로 자신들의 이념적 성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논밭에 죽창을 꽂고 마을에는 ‘미국놈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적힌 빨갛고 노란 깃발이 마을에 휘날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듣도 보도 못했던 통일 연대니 민중 연대니 하는 단체들이 마을에 들어와 ‘미제 앞잡이 물러가라’는 연극제까지 열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이런 모습은 내 나이 육십 평생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며 “이제야 그들의 목적이 대추리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됐고 이제는 도저히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저 검은 세력이 평택에 발을 못 딛게 해야 한다”며 말을 맺었다. 이어 민병돈 前육사교장이 연사로 나섰다. 민 장군은 “존경하는 평택 시민 여러분, 안녕하지 못하시죠? 요즘 온 국민들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편안하지 못합니다”라며 연설을 시작했다. 민 장군은 “좌익단체들이 미군기지 이전을 저지하겠다고 끈질기게 불법폭력시위를 저지르더니 기어이 철조망을 뚫고 군을 공격했다”며 “공무수행 중인 군경을 폭행하는 게 다반사인 친북반미좌익세력들은 폭도”라고 말했다. 민 장군은 여순 반란을 예로 들어 범대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민 장군은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도 여수 순천의 주민들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며 “그 때도 14연대 내에 숨어있던 비밀공산주의자 조직이 연대를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켜 그 두 고장을 유혈이 낭자한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범대위에 대해 설명하며 “어떤 주민이 어리석게 자신의 고향을 난장판으로 만들겠냐”며 “이곳에서 난동을 부린 대다수도 외부인이다. 이곳이 쑥대밭이 되건 생계가 곤란해지건 외지인이 다수인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민 장군은 범대위의 목적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들의 목적은 한미동맹을 깨뜨리고 김정일의 대남공작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우리가 여러분들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울 것”이라며 시민들을 격려했다. 다음 연사로는 선진화국민회의 사무총장인 서경석 목사가 나섰다. 서 목사는 “이번 일을 보면 맥아더장군 동상철거기도 사건이 생각난다”며 말문을 열었다. 서 목사는 “일전에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려는 자들을 보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며 평택에 온 이유가 “맥아더장군 동상 사건 당시에는 애국 시민들과 함께 하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여러분과 함께 하며 평택을 지켜야겠다는 결심 때문에 왔다”고 말했다. 다음에는 이훈희 한미친선협회장이 나왔다. 이 회장은 “범대위는 빨치산과 다름없다”며 “평화로운 내 고장 평택에서 불법폭력시위를 방치하면 지역경제가 파탄나는 것은 물론 국가존립조차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어 “지금 여기 팽성읍의 낙후함을 보라”며 “문 닫은 가게가 대부분이고 한집 건너 한집마다 방세 놓는다는 글이 마치 팻말처럼 붙어있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 회장은 집회에 모인 주민들에게 “이제는 두 팔 걷고 나서서 쇠파이프·죽창을 든 불순세력을 이 땅에서 영원히 몰아내자”고 주장했다. 이 회장의 연설이 끝나고 현상돈 평택시민단체협의회장과 정태열 평택재향군인회장 등 지역 사회단체장들의 연설이 이어졌다. 이들 또한 범대위의 문제점과 평택 팽성읍의 생존권 문제를 설명했다. 정태열 평택재향군인회장은 “민노총은 일터로, 한총련은 학교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외쳐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마지막 연사로 나선 최인식 국민행동본부 사무총장은 “공권력을 죽창, 쇠파이프로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김정일이 보낸 간첩이나 남로당이 아니겠느냐”며 “노무현 대통령이 법을 제대로 집행했다면 평택 시민들이 이처럼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연설이 끝나고 인공기와 한반도기를 불태우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이날 퍼포먼스는 경찰과의 별다른 마찰 없이 끝났다. 이어 나라사랑어머니회 권명호 대표의 구호제창과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의 만세삼창을 끝으로 결의대회는 1시간30분가량이 지난 오후 3시30분경 막을 내렸다. 민병돈 前육사교장과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과 캠프 험프리 기지의 책임자, 평택경찰서장 등은 집회가 무사히 치러진 것에 감사하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행사가 끝나고 지역 주민들에게 범대위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정말 그렇게 장사가 안 되는지 살기 어려운지 묻자 이훈희 한미친선협회장이 대답했다. “이 지역에 제 고향입니다. 제가 태어날 때 여기엔 단 일곱 가구가 살았습니다. 지금은 인구가 약 3만2000명입니다. 이들 모두가 지금까지 여기 미군들 덕분에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2004년 11월부터 나타난 범대위 때문에 지금 팽성읍 사람들이 굶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주변을 한 번 돌아보세요. 정말 임대한다는 쪽지가 명패같이 붙어있어요.” 옆에 서 있던 한 주민도 거들었다. “언론에 정말 문제가 많소. 여태까지 경찰들이 죽창에 찔리고 쇠파이프에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가는 걸 보면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방송에는 나오지도 않더라고. 그게 무슨 언론이고 방송이요? 이번에는 군인이 맞으니까 그나마 방송에 나오는 것 같아서 씁쓸했어요.” 한편, 이날 집회에는 SBS, YTN, KBS 등 공중파 방송과 연합뉴스 등 여러 언론사들이 와서 대회가 끝날 때까지 열심히 취재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오후 11시 현재 KBS는 이 집회를 단신으로 처리했고 YTN은 보수단체들의 이념투쟁 집회로만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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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한국 2006-05-22 오전 11:14:00 |
"요즘 세대, 군대 적응 못하고 갈등 일으켜" 민병돈 전 육사교장 밝혀 조선닷컴 internetnews@chosun.com 입력 : 2005.06.20 15:59 28' ▲ 민병돈 전 육사교장 경기도 연천 최전방 GP에서 장병 8명을 사살한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해, 민병돈 전 육사교장은 “요즘 세대는 군대에 무척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민 전 교장은 20일 오전 CBS ‘뉴스레이다’에 출연, “지금 세대 사람들은 엄격하고 짜여져 있는 생활, 군기가 확립된 분위기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체질”이라며 군의 신세대 장병 관리의 어려움을 대변했다. 민 전 교장은 이어 “외아들이거나, 고생 안하고, 공부만 잘하라는 얘기를 듣다가 (입대 후)바뀐 환경에서 견뎌내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군대란 계급사회에서 이 사람들이 무척 적응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그렇게 본다”고 말했다. 민 전 교장은 ‘이번 사건으로 국방부 장관이 경질돼야 하는가’란 질문에 “장관 문책하면 예하 군으로 압력이 내려가고, 더 큰 폭발 사건이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이사람도 70년초반에 전방에서 실탄차고 근무했다. 내위상관이 그때 고등학교 졸업하고바로 군에왔는 데 나이가 만 20세이고, 이사람은 26세였다. 우짜노. 그는 상병이고 나는 일병인 데... 그래도 참고 지냈다!!!!!!!!!!!!!!! 세상 자미있게 살자! 우리 항공인은!! |
6월 민주화시위 진압 계엄령 군사기밀 자료 문건 입수 (1987년)
「1987년 6월 민주화시위 진압 계엄령」 군부 반대로 취소
당시 특전사령관 閔丙敦 장군 증언 및 군사기밀 자료 문건 입수
-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1987년 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의 「6ㆍ29 민주화 선언」이 있기 10일 전인 6월19일, 전국적인 규모로 번지던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기위한 계엄령 준비 명령이 군에 내려졌으나 군부(軍部) 반대로 무산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내용은 月刊朝鮮이 최근 입수한 「작전명령 제 87-4호」(군사2급비밀) 제하의 비밀 문건과 당시 특전사령관이던 민병돈(閔丙敦) 장군의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그동안 6월19일 군에 내려진 명령은 위수령(衛戍令)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민병돈(閔丙敦) 장군은 月刊朝鮮 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1987년 6월19일 주요 지휘관들에게 계엄령 준비 지시가 내려졌으나, 군이 강력하게 반대해 이를 취소시켰다』고 말했다.
「작전명령 제 87-4호」 비밀 문건에는 「11군단장을 부산·경남 지구, 9군단장을 충남북 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이라는 명령문이 있다.
육군본부가 작성, 참모총장 명의로 주요 지휘관들에게 6월19일 배포된 이 비밀 문건은 급하게 작성된 듯 내용을 첨가하거나, 별첨으로 작성된 전투편성표에 부대 배치도 변경 등을 手記(수기)로 작성하고 있다.
「작전명령 제87-4호」는 날짜는 적시하지 않은 채 군의 임무를 「육군은 현 임무를 수행하면서 ''87년. 6월0일0시부로 소요진압작전을 실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계엄령 준비명령이 1987년 6월 당시 전국적으로 번지던 대규모 시위 진압을 위해 내려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민병돈 장군은 『특전사ㆍ수방사 같은 주요 부대에 명령이 하달되었다며 그냥 군대가 움직인다면 유혈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민장군은 『당시 보안사 보안사 처장인 장석규 준장과 손수태 대령 등 일단의 준장 및 영관 장교 등 비교적 소수의 장교들이 반대 건의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민장군은 『군부의 계엄령 반대 건의를 당시 보안사령관인 고명승(高明昇) 장군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말했다. 당시 소수 장교의 계엄령 반대 건의가 대통령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지휘통제력을 가진 특전사령관이 뒤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대통령도 잘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전명령 제 87-4호」에 포함된 작전개념 항목에서는 ▲26사단, 3특전여단, 해병 2개 연대를 11군단에 배속 ▲9사단을 9군단에 배속 ▲7·11특전여단을 31사단에 배속 ▲706 특공연대를 39사단에 배속 ▲20사단, 30사단, 1·5·9특전여단, 701·705·708특공연대를 수방사에 배속 등의 부대 이동을 지시하면서, 「전, 후방 경계부대는 ''87.6. . 시부로 진도개 둘과 동일한 경계태세를 유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부산지역에서 운용될 예정이던 26사단, 대전 지역에서 운용될 예정이던 9사단 등 전방 부대의 이동 지시가 눈길을 끈다. 경계태세 「진도개 둘」은 對간첩 작전과 같은 수준의 경계 명령이다.
위수령(衛戍令)은 일정지역에서경찰력만으로 치안유지가 어렵게 됐을 때 시ㆍ도지사의 요청으로 군부대가 출동, 단순한 치안유지 활동을 벌이는 명령이다. 계엄령은 헌법에 근거해 계엄이 선포된 지역 내에서 군이 사법, 행정 등을 완전 장악, 통제하는 명령이다. 계엄이 발령되면 군은 언론·출판·집회 및 결사·신체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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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月刊朝鮮 9월호 「閔丙敦 장군 인터뷰」 기사에서 발췌)
―6·29 선언 직전, 직선제 개헌 요구에 4·13 호헌 조치로 5공화국이 맞서는 등 정국이 요동을 쳤습니다. 全대통령이 당시 衛戍令(위수령)이나 계엄령 선포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까.
『고민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일부 부대는 출동 직전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갔었지. 그때 軍에서 중심을 잡은 거야. 그것은 우리 아니었으면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었어』
―어떤 중심을 잡았다는 겁니까.
『요 부분이 추측에 의해 많이 얘기가 되는데, 아직 인적 증거라든가 물적 증거가 공개된 적은 없어요』
老장군은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생각 끝에 그는 『나 혼자 한 일이 아니라서…』라고 혼잣말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때 소위 준비명령이라고 하는데, 그런 명령이 떨어졌어요. 특전사·수방사 같은 주요 부대에 명령이 떨어진 거죠. 아다시피 나는 그때 특전사령관이었고. 그때 그냥 군대가 움직였으면 역사상 또 한 번의 비극이 왔을 겁니다. 당시 나는 고위 장군이었어요. 그때 내 생각이 「이제 또 혼란이 오면 안 되겠다, 또 유혈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건 막아야 한다」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보안사 보안처장인 장석규 준장과, 손수태 대령 등 일단의 준장 및 영관 장교 등 비교적 소수의 장교들이 반대건의를 하기로 결심했어요. 이미 준비명령이 내려온 상태에서 대통령에게…』
―직접 全대통령을 만나서 건의한 겁니까.
『아니지, 그런 거는 보안사령관이 하게 돼 있어요. 나하고 육사 동기인 高明昇(고명승) 장군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죠. 나는 보안사 장석규 보안처장에게 우리 생각을 高明昇 장군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라고 했어요. 사실 張처장은 나와 의기 투합한 후배였습니다. 高明昇 장군은 그 건의 뒤에 내가 버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난 특전사령관이고 「총칼」을 가지고 있고 …, 그 뒤에 내가 있거든. 高明昇 장군은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대통령 앞에서 강력하게 건의했어요. 준비명령은 취소해야 한다고. 그게 받아들여진 겁니다. 비록 대다수가 하나회 소속이지만 그때 영관급 장교들하고 장군 몇몇은 민주화 유공자라고 볼 수 있어요. 그때 「네, 알겠습니다」 하고 그대로 軍이 움직였으면 어떻게 됐겠느냔 말입니다』
―준비명령은 계엄령이었습니까. 위수령이었습니까.
『위수령이라고 말이 돌았었는데 준비명령의 내용을 보니 계엄령이었어요』
―계엄령은 全대통령 본인의 결심이었습니까. 주변 사람들의 권유였습니까.
『글쎄 누가 건의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대통령이 결심했었으니까 준비명령이 떨어진 거죠』
―장군님을 비롯한 일부 장교들의 반대가 반란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겠습니다.
『우리가 반대건의도 안 한 상태에서 순종을 안 하면 그건 반란이 됩니다. 일단은 강력한 건의를 해서 반대 건의하는 측의 의지가 대단히 강하다는 걸 느끼게 했지요. 그 뒤에 막강한 지휘통제력을 가진 특전사령관이라는 놈이 버티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밖에 없어요. 더군다나 나같이 고집 센 놈, 들어야 할 말은 철저히 듣지만 안 들을 말은 절대로 안 듣는 나 같은 놈이 거기에 있다고 하면 쉽게 「잔말 말고 따르라」는 소리는 못 하죠. 더군다나 그 분이 내가 뭐 한다고 하면은 굉장히 신중하게 생각해 가지고 꼭 성공한다는 걸 알아요. 한때 나를 「스탈린」이라고 불렀던 일도 있었어요. 지독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