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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유 게 시 판** 스크랩 불편한 출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것들-독일편
김대식 추천 0 조회 53 11.12.21 15:2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유로스타를 이용해 우리는 파리에서 쾰른으로 향했다. 쾰른은 식민지, 콜로니아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이곳은 한 때 로마의 식민지였다. 우리 일행은 쾰른에 도착하자마자 역 광장과 연해 있는 쾰른대성당을 마주한다. 압도. 기괴. 그리고 전쟁의 상흔을 온몸으로 안고있는..쾰른 대성당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1238년에 시작해서 1880년에 완성된, 무려 632년에 걸쳐 축성된, 높이 157미터, 그리고 아직도 2차대전 중에 포격당한 상흔 이곳저곳을 수리하고 있는 대성당. 우리는 쾰른대성당의 첨탑앞에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카메라로담기에는 무리인 높이가, 차라리 왜소하게 보이는 효과로 나타날 지 모르겠지만 우선 쾰른대성당의 이모저모를 올려본다. 

두개의 첨탑- 왼쪽 첨탑은 수리중이다

 수리한 부분이 포화에 그을린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쾰른대성당 첨탑선단부-1880년 선단부가 첨탑위에 올려짐으로써 쾰른대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단부탑을 만들어 측면에 각국의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

쾰른대성당의 분수대

달팽이 모양의 배수구

쾰른대성당 건축의 시발이 된 동방박사 3인의 유골을 모신 성관(Magis Shrine),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관이다.

이곳 스테인드글라스창 또한 유명하다. 바이에른 국왕인 루드비히 1세가 기증하였다.

쾰른대성당 대주교들의 무덤-지상에도 대주교들의 무덤이 있었으나 대부분 지하에 모셔져 있다..

지하묘소로 들어가는 입구

지하묘소내 전경

 

독일의 2일차.

일정 때문에 마인쯔로 향했다. 독일에서의 일정은 쾰른에 숙소를 두고 마인쯔와 뒤셀도르프를 왔다갔다해야 하는 상황, 우리는 마인쯔 일정 중간에 구텐베르그 박물관에 들르기로 했다. 마인쯔는 구텐베르그의 고향이다. 신경질적으로 사진을 못찍게해서 휴대전화로 몰래몰래 찍어온 것들이다. 아마도 우리때문에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라는 칭호를 뺏기고, 엘고어의 주장처럼 한국에서 금속활자에 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때문일까?

박물관의 벤치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은 기록상으로는 1434년~1444년 사이에 첫 인쇄본이 나왔다고 전해지나 그것은 실험적인 것일 뿐, 공식적으로는 1457년 8월 14일 인쇄한 46행짜리 시편의 인쇄가 공식기록이다(이곳 구텐베르크 박물관에서는 1444년으로 기록하고 있다).직지심체요절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았으나 박병선 박사의 연구와 노력으로 1377년에 인쇄된 직지심체요절(공식명으로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되었다.

물론 기록상으로는 이규보가 자신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서 최윤 등이 유학의 예의를 집대성한 상정고금예문을 부친의 지시로 금속활자로 복원하였다고 밝히고 있어서 1234년 정도가 금속활자의 시작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나 상정고금예문이 발견되지 않는 한 직지심체요절이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다. 2005년 엘고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조선의 인쇄술로부터 영향받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엘 고어의 주장을 모티브로 씌여진 것이 오세영의 소설 <구텐베르크의 조선>이라는 책이다.

 

아래의 사진은 문헌을 통해 구텐베르그가 만들었다는 인쇄기를 재현한 것이다. 사실 이 부분도 애초에 구텐베르그가 포도압착기로 인쇄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원래의 초기인쇄기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어쨌거나 구텐베르크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아래의 것이다.

 

최초로 인쇄된 마인쯔판 성서 시편(당시 인쇄물이 아니라 해당 활자로 재현한 것임)- 컬러로 인쇄할 수 있는 정교함이 특징. 

1444년에 마인쯔판 시편이 인쇄되었다고 기록하는 문건을 전시하고 있다.

<그외 유럽 각국의 초기 인쇄기들>

 

 

독일에서 3일째. 우리는 쾰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뒤셀도르프로 이동하였다. 점심을 먹기위해 뒤셀도르프의 상징, 라인타워(Reheintrum) 꼭대기 식당을 찾았다. 지상에서 168미터인 그곳은 빠른 속도로 돌고 있었고 식사를 마칠쯤에는 전체 뒤셀도르프의 전경을 다 볼 수 있었다. 사실 밥먹는 내내...어지럽긴 했다.

식당에서 내려다본 라인강

식당에서 내려다본 미디어하버

식당에서 내려다본 뒤셀도르프시내

점심을 마치고 우리는 일정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국무장관을 예방하였다. 정부청사의 건물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서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따뜻했다. 

 

독일에서 마지막날

쾰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하기 전, 오후3시까지 시간이 있었다. 그날은 2011년 11월 11일 11시 11분부터 쾰른에서는 오랜 전통의 사육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사육제는 부활절까지 이어지는데 이미 그전날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도 그 축제에 참관하기로하고 아침일찍 루드비히미술관을 보고 사육제를 구경하고 난 다음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루드비히미술관>

미술관초입의 그림- A.R. Penck의 독일의 나(Ich in Deutschland(west), 1984.) 

그리고 또하나. 

 

마침 루드비히박물관에는 피카소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어서 볼거리가 많았다. 다행히 피카소에 대한 다큐, <파키소의 예술과 사랑>, 그리고 피카소가 프랑소와 질로를 만나는 이후 10년을 그린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안소니 홉킨스, 나타샤 맥켈론, 줄리앤 무어 주연의 영화 <Surviving Picasso>를 보고난 연후라 더 흥미로왔다.

 

<피카소의 사진전>-피카소를 취재한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모아 전시-피카소의 치기어린 악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을 못찍도록 했으나 몰래 휴대전화로 찍었다. 들키기 전까지의 사진들을 올린다.

피카소 생전, 피카소를 찬양하기 위해 기획된 스페인의 투우쇼..피카소 옆의 여인이 마지막 여인인 자클린 로크다.

 

<피카소의 작품들> 작품의 경우는 사진기로 못찍게 했지만 휴대전화로는 허용해주었다.

이 작품은 설치작품으로 피카소가 가장 사랑하였던 프랑소와 질로와의 사이에 난 아들 클로드, 그리고 딸 팔로마를 위해 만든 작품이다. 이때 피카소는 가장 가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아이들에게도 사랑스러운 아버지로 기록되고 있었다. 피카소는 종종 자신을 수탉으로 표현하는데 역설적이지만 수탉은 가정에 얽매인 가장의 의미가 담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외 설치미술들 

 

 

피카소의 그림들

 

피카소의 자화상

 

 

 

<피카소의 조각작품들> 

 

<피카소의 도예작품들> 

 

 프랑소와 질로의 모습이다

 

루드비히 미술관을 둘러보고 우리는 11시 11분 라인강변의 쾰른광장으로 나갔다. 사육제는 서부독일방송(WDR)이 생중계하고 있었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카운트다운을 시작으로 시작되었다. 사육제의 이모저모를 올려본다.

카운트다운 직후

WDR의 중계

<사육제 참가자들의 이모저모>

꿀벌이 참 예뻤다.

 스스로 눈을 가리고...특정 사건과 관계없음을 밝히는...

아침부터 만취한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구급차도 대기하고

소시지 구이를 파는 간이 주점은 신난다.

피터네 주점은 손님으로 넘쳐나고

우리가 묵던 숙소는 소변보려는 사육제 참가자들로 줄서있고(1인당 0.5유로). 

엉망이 된 쾰른역광장 

포즈 취해달랬더니 외면하는 아이

포즈취해 달랬더니 예쁘게 포즈취해주는 아이 

이 아이의 예쁜 눈망을 끝으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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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1.30 23:38

    첫댓글 잘 봤습니다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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