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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의 바른 역사를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마고(麻姑)
www.coo2.net의 송준희 칼럼을 인용하였습니다
욕이 많은 글이므로 이해하고 보실분만 참고바랍니다
아래 글은 개인적인 의견이 많이 들어간 글이므로 단순 참고 바랍니다
글이 다소 거친점 이해바랍니다
글이 가는대로 쉽게 쓰려다 보니 본이아니게 거칠어 질 것 같습니다
일정시간 지난후 다소 무리한 문장 등은 정정합니다
감사합니다
p.s 이글은 인용불가입니다 (욕이 너무 많아 ^.^)
(강단이 욕먹는 이유)
강단이 욕먹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일반원인)
1. 원서를 주의깊게 안본다 (중국 정사 기록을 말한다)
2. 죽어라고 연구를 안한다 (할시간이 없다나 ?)
3. 고지도를 안본다 (인용하면 죽음이다)
(기타원인)
(1) 안하무인, 성골과 진골이 있다
(2) 도제식 조폭문화(따르는 놈만 키우고 나머지는 철저히 죽인다)
(3) 전공안하면 제 아무리 교수라도 전부 “재야”다
(4) 딸리면(^.^) 학계로 들어와 정정당당하게 학위따서 그때 보자고 한다
(5) 언어구사가 격하다 (쓰레기, 위서운운, 사기, 반말)
(6) 처음보거나 잘모르는 것은 학계에 인정을 받은 것인지 먼저 묻는다(니미랄^.^)
(7) 반도사관과 다르면 일단 위서다
(8) 반도 땅파서 유물이 안나오면 정사의 기록도 믿을 수 없다
(좁은데서 백날 파봐라 명문이 나오나)
등등
역사 매국노 이병도의 제자들이니
이병도가 한반도에 쳐박아 놓은 “한사군”을 버리면
근 60년 공들여 쌓아 놓은 연구업적(업적은 무슨업적, 역사 사기꾼들이지 ^.^)
및 저서들이 모조리 쓰레기(이미 쓰레기 이지만, 이 “쓰레기”는 그들의 전공용어입니다 ^.^)
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죽어라 매국식민사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러니 그자들은
죽어도 고지도를 책자에 인용 안함은 물론
한반도 한사군 지도외에는 절대 표시를 안합니다
되도록이면
어렵게
난해하게
일반인이 역사분야는 어렵다고 인식하게
일본의 어떤놈이 무슨소리 찌껄였다 등등
참내
내나라 역사를 연구하는데 일본 개자식들의 저서를 인용해야만
책같은 책을 저술했다고 나발(^.^)을 뷸고 다니는 세상이니
정신이 나갔거나 미친놈들이라 할 수 밖에...
조상의 기록을 해석하는 문제인데
어려울게 뭐 있는가 ?
나의 조상의 일기를
섬나라 개자식들에게 조언 구해가며 해석하는 넘들은 도대체 골이 빈놈들 아닌가 ?
어찌 하였던
지도를 인용하면 100페이지 글보다
엄청나게 쉽다는 것을
여기를 방문하시는 네티즌 여러분들은 이미 아실것입니다
본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고지도 모음은
우리역사 찾기에 혁명을 가져다줄 재산이요 보배입니다
많이 활용하시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OO들에게 증거로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지도를 인용하면 쉬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아래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신당서(新唐書) 권220 동이열전 백제의
기록입니다
강단의 해석은 이러합니다
(강단의 해석)
直京師東六千里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
(직경사동육천리이영빈해지양 서계월주 남왜 북고려 개유해내지 기동신라야)
백제는
경사(京師)①에서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하는데,
서쪽은 월주, 남쪽은 왜, 북쪽은 고려(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야 간다.
그리고 동쪽은 신라이다.
① 경사 :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을 가르킴. 지금의 서안(西安)
(문제점)
그런데 상기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1) 중국고지도를 안보고, 모르니 “영(瀛)”과 “빈(濱)”이 지명인지
알 턱이 없다
단한O도 고지도를 인용하여 책을쓴 O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거짓역사를 가르친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죄를 자백하는 행동을 할수 없음이라
지명임을 지도를 본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수 있다
이것을 한반도로 가져올 수 있을까 ?
(2) 대륙백제의 흔적을 감추려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 25사를 되도록이면 인용을 안하려 한다
인용을 해도 잘못기록 되었을 가능성을 부각시킨다
(3) 중국정사 동이전은 한반도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송나라 고지도 조차도 대만과 만주와 한반도를 못 그리고 있는데
한반도 상황을 어찌 자세히 안다는 말인가 ?
태행산맥 동쪽의 화북평원의 동이의 역사를 기록한 것임을 얼빠진
OO들이
모르고 있다
중국민족이 태행산맥 동쪽의 동이에 대한 기록을
정사에 동이전 항목으로 기록 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의 하북, 산동, 절강성 등 중국 물산의 80%가 생산되는 화북평원
그 드넓은 곡창지대에 도읍을 정한 중국왕조가 7세기 이전 몇이나 되는가 ?
없다
이는 바로 화북평원이 동이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땅이
구리국 치우천자의 땅이 었고
구리국의 백성 묘민의 땅이었고
그뒤를 이은 고조선의 땅이 었으며
고조선의 뒤를 이은 삼국의 땅이었다
(오재성 선생님의 해설)
하여간 동일한 내용에 대한 “오재성 선생님”의 해설을 비교하여 살펴보자
百濟夫餘別種也
直京師東六千里而瀛濱海之陽(원문에는 瀛자에 삼수변이 없다)
西界越州南倭北高麗皆踰海乃至其東新羅也王居東西二城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즉, 백제는 지명 “영, 빈”의 남쪽에 있었다는 말이다
중국 고지도인 우적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거의 모든 고지도에 나오는 중요한 지명이다
결국
남제서에 나오는
중국 화북평원을 깡그리 통치한 “백제의 일곱태수”
동일한 지역의 태수들이 정무보고를 하러온 북한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주자사 진 무덤”
“치우천자, 기자의 활동지역”
이 모든 것은 백제의 대륙 실존을 증빙하는 증거들인 것이다
왜 숨기려고만 하는가 ?
백제가 대륙에 잠시 진출하였다고
참내 아니 한반도 조그만 백제가 무슨 힘으로 열배가 넘는 화북평원
전체를
깡그리 지배한다는 말인가 ?
도대체 무엇이 상식인가 ?
양식없는 떼놈들이 남제서 백제전 앞부분을 깡그리(너무 자주쓰는 표현이군요^.^) 삭제한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
이제 백제 본토가 그기에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연구를 해야한다
상식적인 얘기 아닌가 ?
한가지 더 인용하자면
고조선의 강 문제이다
사기 朝鮮傳 중에
장안(長安)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의 세 물이 있어
이것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고 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강을 이병도 떨거지들은 한반도로 가져와 대동강이네 청천강이네
떠들고들 있다
완전 무지의 소치인 것이다
송나라 우적도를 보면 강줄기가 표시되어 있다
산서성에 발원하여 하북성 북경아래를 거쳐 발해로 들어가는 강이
바로 고조선의 중심강이었던 “습수”라는 것을
이 습수에 열수도 있었고 산수도 있었던 것이다
설마
습수, 산수는 하북성에
열수는 대동강에 있었는데
이강이 하나로 합쳐진다고 해석하는 골빈 사람은(^.^) 없겠지요
바로 이사실을
강단의 얼빠진 학자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 슬픈 것이다
조금만 노력하여 찾아보고 하면 알수 있는 것을 왜 안할까 ?
이강에 대한 설명이 중국 하천의 기록인 “수경주”에 자세히 나오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항이다
이또한 고지도의 위력이다
백마디 얼빠진 역사교육을 단번에 거짓임을 밝힐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이다
습수(濕水)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영, 빈의 남쪽에 있었던 백제와 고조선의 습수를 연관지어 비교하면
중국 하북성, 산동성 옥토가 동이의 주강역이었음은 당연한 것이다
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숨기고 은폐하고
교육하지를 않는 것인가 ?
여기를 방문하시는 네티즌 여러분들은
이러한 움직일수 없는 증거들을 찾아내는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아직도 정리해야할게 너무 많습니다
운영자가 제시하는 예문을 참고하여 스스로가 원서와 고지도를 대조,
비교하여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있는 그러한 역사지식을 함양하시길 기대합니다
언젠가 운영자인 제가 소개한
서울대 손보기(孫寶基) 교수의 증언이 기억나시는 지요
"조작된 점제현신사비(棕蟬縣神祠碑)"에 대해서 말입니다
일제가
반도사관 주입을 위하여 날조한 역사유물을
그대로 눈감고 받아들여 체계화 하고
대를 이어 매국식민사관을 팔아 살고 있는
이땅의 이병도 떨거지들의 행태는 참으로 눈뜨고 보기어려운 지경입니다
(조작된 점제현신사비 棕蟬縣神祠碑)
(개 요)
-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에 있는 비.
- 지정번호 : 북한 국보급 제16호
- 소재지 : 평남 온천군 성현리
- 크기 : 높이 1.51m, 너비 1,09m, 두께 0.12m
- 종류 : 비석
북한 국보급 제16호. 높이 1.51m, 너비 1,09m, 두께 0.12m.
염제현신사비라고도 읽는다.
현재 읽을 수 있는 글자는 59자이며, 그 내용은 산신(山神)을 제사한
기록으로,
85년경에 세워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점제현은 낙랑군의 속현으로 이곳에 있는 성현리의 어을동고성(於乙洞古城:土城)의
성지가 그 현성(縣城)이었으며 이곳이 바로 그 유적이다.
1913년에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처음으로 조사하였다.
토성의 동북쪽 약 485m 지점의 밭에서 발견된 비신(碑身)은 위쪽 부분이 조금 손상을
입었으며, 그 모양은 화강암 자연석의 1면을 갈아서 가장자리는 장방형의 윤곽을 만들고,
그 안을 세로로 7등분하여 그 획내(劃內)에 예서로 각자(刻字)한 것으로,
규모는 작으나 학술적인 가치는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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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발견한 인간이
역사왜곡의 말살의 원흉 일본놈 이마니시 류(今西龍)라는 사실과
아래 손보기 박사의 증언을 잘 비교하여 보면
일본놈들이
그먼 하북성 산해관 유역 갈석산 바위에 있는 비문을 떼다가
하북성 갈석산 유역에 있던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날조하기 위해
(왜냐면 고조선이 하북성까지 진출했다고 밝혀지면 조선의 위대성이
탄로나기 때문에)
평안남도 온천까지 배로 수송하여
여기가 낙랑군이라고 조작을 하였는데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하수인 이었던 이병도가 대를 이어
조작에 가담하고 은폐, 조작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병도가 한사군을 반도로 끌어들인 역사원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당연히 응징이 있어야 함은 물론 모조리 쓸어 버려야 합니다
이하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990년 1월 17일 한배달 대담내용)
- 손보기 : 연대 명예교수, 고고학 박사
- 이태형 : 한배달 초대회장
- 조옥구 : 한배달 사무국장
- 박서량 : 한배달 이사
- 윤진평 : 한배달 이사
(대담 내용중 점제현신사비 부분 발췌)
(손보기)
.......
점재현신사비도 지금 있는 곳은 2천년 전에는 물이 들어왔던 곳인데
어떻게 그곳에 비를 세울수 있겠어요 ?
옛 사람들은 비를 세우기도 하지만 산의 바위를 쪼아내고
그곳에다 꽉끼어 맞는 비를 세우기도 하였어요
갈석산에 보면 신사비의 돌을 조금떼어내고
갈석산의 돌을 떼어서 맞추어 보면 딱 맞아요
일본인들이 배로 실어다가 10리 밖에 못와서 그곳에 뉘어놓고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배경으로 비의 사진을 찍어서 그곳이
낙랑의 점제현이다.
그러니 확실히 낙랑군이 아니냐라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조옥구) 점제비란 무슨내용인지 궁금합니다
(손보기)
그 비(碑)로 낙랑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점제현이 있었으며,
점제현장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비였어요
방향이 갈석산에 맞으며,
돌산을 쪼아 다른비석을 그곳에 맞춘 것 이지요
(이태형) 갈석산의 현재위치는 어디입니까 ?
(손보기) 산해관 근처에요
(윤진평) 옛 고조선의 경계, 즉 지금의 난하입니다
(손보기)
낙랑이 세우기 전에는 일인들이 갖다 놓을 수 없었어요
이런것들을 만화로 하고 싶어요
또 하나 이승만의 위정을 만화로해 일반인에게 알리고 싶어요
이승만의 가장큰죄는 일본이 패망한뒤, 대한민국을 세울 때
친일파 들을 등용해 애국자로 만든 것이지요
그때 국가로부터 포상받은 사람은 이승만과 이시영 밖에 없어요
(중략)
(평안남도 온천군)
(갈석산)
- 갈석산은 산해관 좌측 하북성에 있다
(이동경로)
휴 시펄놈들(^.^) 멀리도 가져왔다
이래놓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반도 낙랑유물전 벌이고 있으니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정말
손보기 교수의 증언이 맞다면 일본놈들 참으로 장하고 용감하다
갈석산에서 평안남도까지 끌고올 정도로
우리 민족정기 말살작업이 중요했다는 말이겠지.......
(결론)
오늘 올린글은
이떠한 연유가 있어 이글을 올린 것입니다
무어라 꾸짖는 네티즌 분들이 있겠지만 감내하고 올립니다
널리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혼자 한탄조의 글이었지만
이글을 꼭 보셔야 할분이 있어 올리는 것이오니
부디 보시고
올바른 우리역사를 찾아가는 의로운 분들에게 힘이 되어 주시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백제관련 “영, 빈”과 관련된 오재성 선생님의 글을
재인용 소개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신당서(新唐書) 권220 동이열전 백제의 기록)
直京師東六千里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
(직경사동육천리이영빈해지양 서계월주 남왜 북고려 개유해내지 기동신라야)
이중 영(瀛), 빈(濱), 해(海)는 중국대륙에 있었다
(안내 : 그림을 클릭하시면 큰 그림을 보실수 있습니다)
(중국 고지도 화이도 상 "영", "빈", "해")
해(海)를 바다로 볼 것인가 지명으로 볼것인가의 문제입니다
瀛濱海(영빈해)가 거의 같은지역에 존재하므로 지명으로 보는 시각도
고려해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오재성 선생님의 해설을 올려드립니다
늘상 드리는 말씀 비교하시어 가장 합리적인 지식만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해설 : 오재성)
"영빈해지양"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풀이해 볼수 있습니다
(백제 기록에 대한 새로운 시각)
신당서 백제전에서
百濟夫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瀛濱海之陽(원문에는 瀛자에 삼수변이 없다)
西界越州南倭北高麗皆踰海乃至其東新羅也王居東西二城에서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라고 풀이해 볼 수도 있다
① 瀛(원문에는 삼수변이 없음)
瀛은 "영"으로 발음하고
남을영, 풀다, 싸다, 넘치다, 지나치다 등 많은 해석이 되고 있고,
물수를 변으로 하는 영은 절운이 같으니 같이 사용했는데
이를 "의성가차법"이라 할수 있으며 지도에 나오는 글자 밖에 없다.
② 濱
濱은 발음은 "빈"인데 물가빈, 끝, 임박하다로 풀이한다.
海는 바다라고 풀이하고 넓다, 많다로도 풀이 한다
濱海는 바다에 잇닿은 지대, 연해라고 풀이한다
③ 陽
陽은 볕, 밝을, 거짓, 봄양으로 풀이하는데(아래 사전원문 참고)
시경에 의하면 "在南山之陽"이나 "山南水北"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즉, 산을 기준으로 할때는 따뜻한 햋빛이 드는 남쪽을 의미하고
물을 기준으로 할때는 햋빛이 먼저드는 북쪽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신당서 기록은 역사를 나타내는 위치에 대한 기록이니
"영, 빈, 해"를 지명으로 볼수도 있는데 모두 하북성, 산동성 남쪽 지명들이다.
이것은 바로 남제서에 있는 군명과 연계하여 본다면
당연히 "영빈해"는 지명으로 풀이해 볼수 있는 것이다
"영"은 이성절(怡成切)과 瀛영 怡成切은 절운이 같으니 같이 사용되어
왔다.
瀛洲는 전설상의 산이라고도 하였고 삼신산의 하나라 하였다.
"영빈해지양"을 풀이하면
국사편찬위원에 번역된 동이열전에서는
"경사에서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해 있다"고 풀이하고
이민수씨 번역본 조선전에는
"서울 동쪽 6천리 되는 곳에 바다를 남쪽으로 있다"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남제서의 지명인
청하, 광양, 성양, 광릉의 위치가 하북성에서 강소성까지 있었으니
그 지역안에 있는 지명 "영, 빈, 해"로 볼수도 있으니 새롭게 해석하여
본다면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라고 풀이해 봄직하다
(당서원문)
(陽자 사전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