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곰배령 탐방의 매력은 원시림의 비경이 느껴지는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물소리 들으며 걷는 것과 정상에서 만나는 야생화 무리가 펼치는 장관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탐방객들은 곰배령 정상의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벼르고 또 별러서 오른 '곰배령'(1,120m)이었다. 야속하게도 태풍 '나크리'는 강원도 오지까지 간접 영향권에 들게 했다. 곰배령 정상의 비바람은 모자와 우산을 날려 보낼 정도로 거셌고, 비구름이 몰고 온 운무는 여름 야생화의 향연을 안개 속으로 꽁꽁 숨겨버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입산금지'라는 최악의 상황까진 벌어지지 않아서 곰배령 탐방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 얇은 비옷 하나에만 의지해서 오른 우중 산행이다 보니 온몸은 땀과 비로 범벅이 되었지만 신비스러운 곰배령를 마주할 수 있었다. 하늘 위 꽃밭,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그곳, 점봉산 곰배령을 다녀온 이야기를 싣는다.
■천연활엽수 원시림의 보고
약간은 번거로울 수 있지만 곰배령 탐방을 위해선 사전 예약(상자기사 참고)부터 해야 한다. 탐방이 시작되는 점봉산 생태관리센터까지는 차량으로 이동 가능했다. 다만, 설피마을을 지나 생태관리센터까지 이르는 길은 비포장이어서 차체가 낮은 승용차로는 엄청 조심 운전을 해야 했다.
'조선 협객' 백동수가 은둔처로 찾아왔던 오지 다양한 희귀 식물 서식 생태계의 보고 정상까지 5㎞, 천혜의 숲·계곡에 절로 힐링 계절마다 종류를 달리하며 피어나는 들꽃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
'조선의 협객' 백동수가 생각났다. 진동리 일대는 예로부터 세상을 등진 선비들이 은둔처로 찾아든 산간오지였다. 1773년 가난한 식솔을 이끌고 인제군 기린협(현 진동계곡)에 정착했던 백동수도 마찬가지였다. 무과에 급제하고도 서얼이라는 신분상 한계로 벼슬을 얻지 못하자 미련 없이 '한양살이'를 접고 그곳을 찾아들어 10년을 보냈다. 어쩌면 지금도 그곳은 세상을 떠나온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닐까.
본격 탐방에 앞서 점봉산 생태관리센터부터 들렀다. 생태관리센터 유선 전화는 아침부터 불이 났다.
"오늘 곰배령 탐방 예정대로 진행하나요? 예약을 못했는데 들어갈 순 없나요?"
매번 반복되는 질문인데 이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새벽에 내린 비로 인해 예약자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곰배령은 6~8월 연 평균 강수량이 59%를 차지하는 '하계다우형'입니다. 이는 영동 동해안의 더운 바람이 백두대간에 다다라 진동계곡 100리 길의 찬바람과 마주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지요. 여름에 비가 많고, 겨울에 눈이 많아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제국유림관리소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김호중 팀장의 설명이다. 곰배령을 관리하고 있는 점봉산 생태관리센터는 2010년 10월 개소했다. 곰배령을 찾는 인원도 매년 증가해 개소하던 해에 2만 9천128명이던 것이 2012년 4만 명을 넘어섰고, 지난해는 5만 2천661명이 다녀갔다. 1일 평균 275명.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한 점봉산 일대는 천연활엽수 원시림 보호구역으로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특히 이 지역은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이 교차되는 곳으로, 한국특산식물 25종, 희귀·멸종위기식물 25종 등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1993년엔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 2005년엔 백두대간보호구역으로 지정됐습니다."
■물소리 들으며 정상까지 걷다
탐방 코스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해발 약 720m 지점 생태관리센터에서 출발해 약 5㎞가 되는 해발 1,120m 곰배령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같은 길을 돌아 나오는 왕복 3~4시간 코스였다. 하지만 하루 3차례로 제한된 입산 시간을 감안한다면 대부분은 전날 진동리 일대 민박집이나 펜션에서 묵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곰배령에 오른다. 한데, 일체의 예약 과정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이도 없진 않단다. 그런 사람들에겐 생태체험센터에서 강선마을까지만 갈 수 있는 '간이입산허가서'를 쓰게 한다. 왕복하면 그것도 십 리 길이다.
활엽수 원시림의 비경이 느껴지는 곰배령 탐방로 모습. 사진은 점봉산 생태관리센터에서 강선마을 가는 길.
생태관리센터에서 강선마을까지는 길도 널찍하고 유순한 편이다. 산책하듯 오르면 30분쯤 걸린다. 강선마을엔 현재도 12가구가 살고 있다. 이 중 5가구가 민박집을 겸하고 있다.
강선마을을 지나면 강선산림 통제소가 나온다. 여기서 한 번 더 입산증 검사 절차를 거친다. 본격 산행이 시작되는 셈이다. 진동계속을 끼고 가는 이 길은 계속 완만하다가 정상을 1.3㎞ 남겨둔 지점부터 약간 가팔라진다. 곰배령 탐방로는 특이하게도 물소리를 들으며 거의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산림 통제소를 지나 곰배령 정상까지는 오솔길이 이어졌다. 버드나무류 중에서도 맑은 계곡 옆에서만 자라는 '쪽버들', 산골짜기 물가 옆에서 자라는 '난티나무', 깊은 산골짜기에서나 볼 수 있는 '뜰메나무' 등 평소 보기 힘들었던 나무들도 만났다. 때로는 각자 나이보다 수백 배나 더 먹은 수령의 나무들을 보면서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밑동이 어마어마한 주목도 마찬가지였다. 활엽수가 많은 숲인 만큼 땅은 좋아 보였다. 활엽수 아래는 고사릿과 식물인 관중 등으로 뒤덮여 원시림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활엽수 원시림의 비경이 느껴지는 곰배령 탐방로 모습. 사진은 강선산림통제소 앞 징검다리 계곡길 풍경.
아마도 봄이었다면 홀아비바람꽃, 꿩의바람꽃, 한계령풀, 얼레지 등 수많은 봄 들꽃이 화려하게 장식했을 길이다. 지금은 8월의 녹음이 절정을 이루면서 숲길의 꽃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덕분에 여름 곰배령의 주인공 들꽃은 햇볕을 가리는 고목이 전혀 없는 산 정상에나 가야 만날 수 있었다.
■야생화의 천국, 곰배령
누군가가 말했다. "하늘이 보이면 다 온 거예요!" 조금 더 힘을 냈다. 야생화 사이로 나무 덱(deck) 탐방로가 보였다. 곰배령 정상이다. 저 멀리 작은 점봉산(1,297m)과 가칠봉(1,164m)이 안개 속에서 드러났다 숨었다를 반복했다. 주황색 동자꽃과 분홍색 둥근이질풀, 보랏빛 산꼬리풀과 영아자, 노란색 마타리, 하얀색 참취와 톱풀, 구릿대까지 색깔의 향연이 비바람 속에서 펼쳐졌다. 거기다 색색깔의 비옷까지 더해지면서 풍경은 환상이었다. 사람들이 왜 이곳을 '천상의 화원'이라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봄과 여름철, 강원도 인제군의 점봉산 곰배령은 야생화 천국이다. 사진은 왼쪽위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여름 들꽃인 동자꽃, 둥근이질풀, 산꼬리풀, 참취, 도라지모싯대, 영아자, 마타리, 구릿대, 톱풀. 일부 산림청 제공
곰배령 정상에서 한 시간도 넘게 머물렀다. 바람에 찢긴 비옷은 너덜너덜해지고, 머리는 젖어서 영락없는 거지꼴이었지만 마음만은 풍성해졌다. 곰배령은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이 매력이라고 하더니 딱 그대로였다. 비 하나 피할 데 없는 황량한 산 정상에, 계절마다 종류를 달리하며 스스로 피어나는 들꽃에게만 허락된 그곳, 1년에 8개월, 그중에서도 일주일에 단 5일, 그리고 하루에 딱 300명에게만 입산허가 된 그곳이 바로 곰배령이었던 것이다. 다시 안 오고는 못 배긴다는 곰배령에게, 눈이 오면 다시 찾을 것을 약속하고 산을 내려왔다. 옛날 옛적 선조들이 산나물 말려서 지게에 얹고 넘어가던 '보부상 장터길'의 애환이 서린 그곳이, 이제는 21세기 아름다운 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TIP
■곰배령 탐방 사전예약제
수~일요일 입산 허용. 예약은 산림청 홈페이지(www.forest.go.kr)에서 휴양·문화(숲에On)→산림생태탐방→점봉산 곰배령 예약하기 순으로 하면 된다. 매주 수요일 오전 9시부터 4주차 일요일까지 예약 가능. 올해부터 입산 인원이 300명으로 확대됐다. 단, 하절기(4월 23일~10월 31일) 1일 3회(오전 9시, 10시, 11시), 동절기(12월 16일~이듬해 1월 31일) 1일 2회(오전 10, 11시). 산림청 예약이 마감된 경우, 진동리 민박집을 통하는 '마을 예약'을 이용할 수도 있다. 신분증 지참. 인제국유림관리소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033-463-8166.
■찾아가는 법
부산에서 출발하는 곰배령 탐방은 자가용(7시간 소요)이나 대중교통 모두 간단하지 않다. 자가용은 경부고속도로~동해대로~동해고속도로 양양IC에서 빠져나와 논화교차로~서림삼거리~진동삼거리~곰배령길 점봉산 생태관리센터로 도착하면 된다. 부산여행자클럽(051-912-6112)은 전일 오전 전용버스 편으로 오대산국립공원 월정사, 대관령 양떼목장 등을 돌아보고, 진동리 펜션에서 묵은 뒤 다음날 아침 첫 회차로 곰배령에 오르는 상품을 팔고 있다. 15만 8천 원.
■잘 데와 먹을 곳
생태보호를 위해 탐방 인원도 제한하지만 취사 행위도 금지돼 있어 식사나 숙박은 진동리 일대 민박집, 펜션, 식당 등을 이용해야 한다. 먹거리로는 막국수, 산채비빔밥, 산채정식 등이 유명하다. 진동2리 110가구 중 절반가량인 50여 가구가 민박집 혹은 펜션을 운영 중이다. 곰배령 탐방 코스 1.7㎞ 지점 강선마을에서 묵을 수도 있다. 다만, 차량에서 내려서 그곳까지 걸어 가야 한다. 김은영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