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보도자료 첨부> 2
이 요약본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를 차례대로 따라가면서 회칙의 전반적 내용에 대한 기본 개념의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괄호 안에 표기된 숫자는 회칙의 항 번호입니다.
이 회칙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에 나오는 후렴구인 “저의 주님, 찬미를 받으소서.”에서 그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 찬가는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아름다운 어머니”(1항)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 인간은 “흙의 먼지”(창세 2,7 참조)입니다. “우리의 몸은 지구의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공기를 마시며 지구의 물로 생명과 생기를 얻습니다”(2항).
“이 누이가 지금 우리에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누이에게 맡기신 재화를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남용하여 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2항). 누이의 울부짖음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하나 되어 우리의 양심이 “피조물에 저지른 죄를 인정”(8항)하도록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존경하는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님의 말씀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기후 변화를 일으켜 생활 양식을 파괴하는 인간은 지구의 물, 땅, 공기, 생명을 오염시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입니다”(8항).
그러한 뉘우침에 대한 적절한 응답은 이미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이 요구하였던 “전 세계적인 생태적 회개”(5항)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취약한 이들을 돌보고 온전한 생태학을 기쁘고 참되게 실천한 훌륭한 모범입니다. …… 이 성인은 우리에게 자연 보호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와 사회적 헌신과 내적 평화 사이의 불가분의 유대를 보여줍니다”(10항).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는 인간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 자기 자신과 맺은 관계, 타인과 맺은 관계, 피조물과 맺은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 줄 수 있는 패러다임인 온전한 생태학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15항에서 직접 설명하신 것처럼, 이러한 움직임은 환경 문제에 관하여 오늘날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과학 연구의 결과에 대하여 영적인 귀를 기울이면서 시작되는 것으로(제1장) “그러한 결과가 우리 마음 깊이 다가오도록 하여 그에 따른 윤리적 영적 여정을 위한 구체적인 기초를 마련해 줍니다”(15항). 과학은 우리가 지구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최고의 도구가 됩니다.
다음 단계는 유다-그리스도교의 전통, 특히 성경과 그 신학적 성찰의 풍부한 유산을 내용으로 삼았습니다(제2장). 그러고 나서 이 회칙은 “현재 상황의 근원”을 분석하며 “현재 상황의 증상과 그 가장 깊은 원인을 성찰”하고 있습니다(제3장).
이 분석의 목적은 온전한 생태적 틀을 수립하는 것입니다(제4장). 여기에는 그 다양한 차원에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고유한 자리와 우리와 주변 환경과의 관계”가 포함됩니다. 투명하고 포괄적인 대화를 강조하시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국제 정치, 국내 정치, 지역 정치의 쇄신을 위한 지침, 공공 분야와 기업 분야의 정책 결정 과정을 위한 지침, 정치와 경제의 관계와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위한 지침을 제안하십니다(제5장).
끝으로 “변화는 동기 부여와 교육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제6장은 “그리스도교의 영적 체험의 보화에서 발견되는, 인간 발전에 힘이 되는 지침들”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회칙은 두 기도문을 마련했습니다. 첫째 기도문은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함께 드릴 것이며, 둘째 기도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드릴 것입니다. 이 회칙은 서두와 마찬가지로 결론도 기도 안의 성찰로 마무리됩니다.
모든 장은 고유한 방식으로 각각의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회칙 전반에 걸쳐서 다음과 같은 주요 개념들이 반복되며 강조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환경 문제를 언급하고 풀어나가기 위한 방식으로 제안하신 대화는 회칙 전반에 걸쳐 나옵니다. 여기에서는 철학자와 신학자들,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정교회 신자(이미 언급한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 개신교 신자(프랑스 사상가 폴 리쾨르)와 더불어 이슬람교 신비주의자인 알리 알카와스의 업적이 언급됩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당신의 직무를 시작하시면서 교회에 제안하신 단체성의 핵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임 교황님들의 가르침과 바티칸의 다른 문헌들(특히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의 문헌들)을 인용하고 모든 대륙의 많은 주교회의들의 문헌도 참조하였습니다.
「찬미를 받으소서」의 핵심에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보게 됩니다. “우리 후손들, 지금 자라나고 있는 우리 자녀들에게 어떠한 세상을 남겨주고 싶습니까?”(160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질문은 환경만을 따로 떼어 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단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삶의 의미와 사회생활의 근저에서의 그 가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도록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 우리 활동과 모든 노력의 목적은 무엇인가? 지구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심오한 문제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환경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60항)
「찬미를 받으소서」를 읽고 양심 성찰에 새로운 차원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양심 성찰은 개인의 삶을 주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이끌도록 교회가 늘 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다른 이들과, 자기 자신과 어떠한 친교를 이루며 살고 있는지에 관한 것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자연과 어떻게 친교를 이루며 살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깊이 성찰하여야 합니다.
회칙 발표 전에 대중매체는 무엇보다도 현재 세계적 안건으로 토론되고 있는 환경 정책과 관련된 측면들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았습니다. 분명히 「찬미를 받으소서」는 이 분야에 이루어져야 할 중요하고 긴급한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영향을 미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문헌의 교도권적, 사목적, 영성적 차원이 뒤로 밀려 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의 가치와 범위와 깊이는 환경 정책 결정이라는 단순한 범위로 좁혀질 수 없습니다.
제1장 더불어 사는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17-61항]
제1장은 환경에 대한 최근의 과학적 발견을 피조물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통렬하게 자각하고 기꺼이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삼아 우리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19항). 그래서 이 장은 “현재의 생태적 위기의 여러 측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I.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 [20-26항]
오염, 쓰레기, 버리는 문화 오염은 사람들의 건강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며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쳐 수많은 사람들이 일찍 죽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20항). “우리의 집인 지구가 점점 더 엄청난 쓰레기 더미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21항). 이 상황은 ‘버리는 문화’에서 기인하므로, 우리는 재사용과 재활용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 방식을 도입하고 재생이 가능하지 않은 자원 사용을 제한하여 이러한 문화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점에서 제한된 진척만이 이루어졌을 뿐입니다”(22항).
공공재인 기후 “기후 변화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로 환경, 사회, 경제, 정치, 재화 분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25항). 기후 변화는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며 이주의 원인 가운데 하나이지만 “더 많은 자원과 경제적 정치적 힘을 지닌 이들은 대부분 문제를 호도하거나 문제의 증상들을 감추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26항).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가 관련된 이 비극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대응은 모든 시민 사회의 기초인, 우리 이웃에 대한 책임감의 상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25항). 기후를 보전하는 것은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중요한 도전 과제입니다”(25항).
물 문제 모든 인간, 특히 어린이들이 오염된 물로 병들어 죽어 가고 있으며, 대수층(帶水層)은 공장과 도시의 폐수로 끊임없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보편적인 기본 인권입니다. 물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며, 바로 그래서 다른 인권들을 행사하는 데에 전제 조건이 됩니다”(30항). 가난한 이들이 물에 접근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그들의 침해할 수 없는 존엄에 맞갖은 생명권을 부인하는 것”(30항)을 의미합니다.
생물다양성의 감소 인간이 초래한 식물과 동물의 멸종은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앞으로 나타날 결과들을 예측할 수 없게 합니다. “해마다 우리는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들은 영원히 사라져 버려서 우리가 전혀 모르게 되고 우리 후손들은 전혀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33항). 이것들은 그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인간을 위하여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관련되어 있습니다. …… 살아 있는 피조물인 우리는 모두 서로 의존하기 때문입니다”(42항). 풍부하고 다양한 생물이 있는 지역을 보호하는 것은 생태계 균형과 생명의 균형을 이루는 데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종종 초국가적인 경제 이익은 이러한 보호를 저해합니다(38항).
인간 삶의 질의 저하와 사회 붕괴 현재 개발의 모습은 인류 대부분의 삶의 질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며, 이는 “지난 두 세기의 성장은 늘 온전한 발전을 이끌지 못하였다는 것”(46항)을 보여줍니다. “많은 도시들은 거대하며 비효율적인 체계를 갖고 있으며 에너지와 물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습니다”(44항). 그리하여 건강의 측면에서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고 일부 특권층을 위하여 보존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자연과의 접촉이 제한됩니다(45항).
세계적 불평등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48항). 국제적인 정치 경제 토론에서 이러한 이들은 “단순한 부수적 피해자들”(49항)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참된 생태학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 됩니다. …… 그리하여 지구와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모두 듣는 것입니다”(49항). 해결책은 출생률 감소가 아니라 세계 인구의 일부에 해당되는 “지나친 선택적 소비주의”(50항)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미약한 반응 이러한 주요 주제들에 관한 차이점을 인식하시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비극에 대한 미약한 반응에 깊이 충격을 받으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비록 긍정적인 예들이 없지는 않지만(58항), “자기만족과 커다란 부주의”가 팽배해져 있습니다(59항). 문화와 적절한 통솔력뿐만 아니라 생활 양식과 생산과 소비 형태를 기꺼이 바꾸려는 마음이 부족합니다(59항). 그러하기에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는 법적 틀”을 시급히 마련하여야 합니다.
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62-100항]
제1장에서 기술한 문제에 맞서기 위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몇 가지를 택하십니다. 성경의 설명은 피조물에 대한 인류의 “엄청난 책임”(90항)과 모든 피조물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자연 환경이 모든 인류의 유산이며 모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공공재”(95항)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관점을 보여줍니다.
I. 신앙이 주는 빛 [63-64항]
1. 신앙이 주는 빛 복합적인 생태 위기는 영성과 종교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와 학문의 대화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자연과 자신의 형제자매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데에 충분한 동기”(64항)를 부여합니다. 자연에 대한 책임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부입니다.
2. 성경 이야기의 지혜 성경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두 활동 방식은 긴밀하고 분리 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73항). 창조 이야기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죄가 창조 질서 전체의 균형을 어떻게 깨뜨렸는지를 성찰하는 데에 핵심이 됩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가지 관계, 곧 하느님과의 관계, 우리 이웃과의 관계, 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 가지 핵심적인 관계는 이 세상과 우리 안에서 깨어졌습니다. 이러한 불화가 죄입니다”(66항).
지구는 소유물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지구는 우리에게 관리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파괴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 장점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자연법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깊은 신앙심으로 창조주를 찬미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시편이 이를 상기시켜 줍니다.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성은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며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그분의 피조물을 우리 발아래 두며 짓밟아 버리는 무제한적 권리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러”(75항) 다른 세속적 권력을 숭배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3. 세상의 신비 “창조는 모든 것의 아버지께서 손을 내미시어 주신 선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76항). “우리는 창조된 것들에서부터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넘치는 자비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77항).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는 “하느님의 충만하심”(83항)에 이를 때까지 계속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보편적 친교 안에서 지성과 개별적인 정체성을 선물 받은 인간은 “고유성”(81항)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자신의 보호에 맡겨진 피조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으며, 인간의 자유는 발전을 촉진할 수 있고 퇴보를 야기할 수도 있는 불가사의한 것 입니다.
4. 창조의 조화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전하는 메시지 “모든 피조물은 각각의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84항).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경에 담겨 있는 고유한 계시와 더불어, 작렬하는 태양과 드리워진 어둠 안에도 하느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이 있습니다”(85항). 온 세상에서 그 상호 보완성을 통하여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풍요로움이 나타납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며, 우리를 찬미로 초대합니다.
5. 보편적 친교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르셔서 존재하게 된 우리는 모두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보편 가정, 곧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며 겸손한 존중이 가득 찬 숭고한 공동체를 이룹니다”(89항). 이는 우리가 지구를 거룩하게 만들고 있다거나, 인간이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같은 인간에 대한 세심함과 연민과 배려가 없다면 자연과의 깊은 친교의 감각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91항).
6. 재화의 보편적 목적 “지구는 본질적으로 공동 유산이므로, 그 열매는 모든 이에게 이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 부분을 소유한 이들은 모든 소유권에 적용되는 “사회적 담보”를 존중하여 이를 관리하라고 부름 받습니다(93항).
7. 예수님의 눈길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초대하시어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맺으신 부성의 관계를 깨달으라고 하십니다”(96항). 그리고 몸과 물질이나 삶에 기쁨을 주는 것을 무시하지 말고 “피조물과의 충만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라고 하십니다”(98항). “모든 피조물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99항). 세상이 끝날 때, 모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지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 세상의 피조물은 더 이상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이 모든 피조물을 신비롭게 간직하시며 그들의 목적인 충만으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100항).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101-136항]
이 장은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철학과 사회과학과 대화를 나누어 “그 증상과 심층적 원인들을 성찰”(15항)합니다.
1. 기술: 창조성과 힘 기술 발전이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기술은 “온갖 기술 지식, 특히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재원을 확보한 이들이 인류 전체와 온 세상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도록” 합니다(104항). 인류는 “올바른 한계를 정하고 바른 자제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105항)을 필요로 합니다.
2. 기술적 패러다임의 세계화 지배적인 기술관료적 사고방식은 현실을 제한 없이 조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는 삶의 모든 측면에 관련되는 환원주의입니다. 과학기술의 산물들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결국 생활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기회들의 형태를 잡아가는 틀을 만들어내기”(107항) 때문입니다. 또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경제와 정치를 지배합니다. 특히 “경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기술의 모든 발전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109항).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술만을 믿는 것은 “전 세계의 체제가 안고 있는 가장 뿌리 깊은 진짜 문제들을 숨기는 것”(111항)을 의미합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은 인류와 역사의 발전과 동일시 될 수 없기에”(113항) 그렇습니다. “문화적 혁명”(114항)이 가치들의 회복에 필요합니다.
3.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 현실보다 기술의 추론을 중시하는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더 이상 자연을 타당한 규범이며 살아있는 피난처로 인식하지 않습니다(과르디니 참조).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인간의 자리와 자연과 맺은 우리의 관계를 이해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배’는 책임 있는 관리의 의미에서 더욱 올바르게 이해되어야만 합니다”(116항). 잘못 이해된 인간중심주의의 비판은 그와 마찬가지로 불균형적인 “생태중심주의”를 향한 변화가 아니라 “올바른 인간학”을 향한 변화입니다(118항). 이 “올바른 인간학”은 “인간관계의 중요성”(119항)과 모든 인간 생명의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습니다. “자연 보호에 대한 관심과 낙태의 합리화는 양립될 수 없습니다”(120항).
- 현실적 상대주의 잘못 이해된 인간중심주의는 “어떠한 것이 자신에게 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여기어” 현실적 상대주의를 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다양한 태도들이 서로를 촉진하여, 환경 훼손과 사회 부패를 야기하는”(122항) 논리가 담겨있습니다. “문화 자체가 부패하고 객관적 진리와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더 이상 성립되지 않을 때, 법은 자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123항).
- 고용 보호의 필요 온전한 생태학은 “노동의 가치를 고려해야 할 필요”(124항)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일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 성취를 위한 길”(128항)이기 때문입니다. “단기간에 더 큰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업 행위입니다”(128항).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참다운 혜택을 보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129항).
- 새로운 생명공학 주요 기준은 유전자 변형 식품이며, 이는 “복합적인 환경 문제”(135항)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이 경제적 발전을 가져와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지만 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134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특히 군소 생산자들과 농촌의 일꾼들, 생물다양성, 생태계망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가능한 정보를 고려하고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독립적인 학제적 연구에서”(135항)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4장 온전한 생태학 [137-162항]
이 회칙의 제안의 핵심은 정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온전한 생태학입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고유한 자리와 우리와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존중하는 생태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15항)입니다. 사실, “자연은 우리 자신과 분리되거나 우리가 사는 단순한 배경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139항). 이는 모든 분야에서 사실입니다. 경제와 정치, 여러 문화, 특히 가장 위협을 받는 문화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 문제와 인간 사회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늘날 환경 문제의 분석은 인간, 가정, 직업 관련 도시 상황의 분석과, 인간들 자신과의 관계 분석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141항). 따라서 “자연계와 사회 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과 사회와 관련된 두 가지 별개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입니다”(139항).
I. 환경 생태학, 경제 생태학, 사회 생태학 [138-142항]
1. 환경 생태학, 경제 생태학, 사회 생태학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지구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성분들은 우리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단편적이며 분리된 지식은 더 폭넓은 관점으로 통합되어야 합니다. 이는 “생태계들 사이의 관계와, 사회 상호 작용의 다양한 분야들 사이의 상호 관계”(141항)를 고려하려 하고, 또한 제도적 차원을 포함합니다. “사회 제도의 건전함은 환경과 인간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칩니다”(142항).
2. 문화 생태학 가장 넓은 의미에서 “생태학은 인류의 문화적 보화를 보호하는 것도 포함합니다”(143항). 이는 민족들의 권리와 문화를, 그들 문화의 지역 사회 주체들의 적극적 참여와 “토착 공동체에 대한 특별한 관심”(146항)으로 통합하여야 합니다.
생태학의 인간적 차원은 또한 “인간 삶과 우리 본성에 새겨져 있는 도덕률의 관계”(155항)를 나타냅니다. “우리의 몸은 환경과 다른 생명체와의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확립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을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이며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피조물을 마음대로 다룰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됩니다”(155항).
4. 공동선의 원칙 온전한 인간 생태학은 “공동선의 개념과 분리 될 수 없는 것”(158항)입니다. “불의가 판치고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빼앗기고 소모품처럼 여겨지게 되는”(158항) 오늘날의 상황에서 공동선을 위한 노력은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158항)에 기초한 연대를 이루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5. 세대 간의 정의 공동선은 또한 미래 세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삶이 짧아 기다릴 수 없는” 오늘날의 가난한 이들을 잊은 채로 “세대 간 연대와 분리된 지속가능한 발전을 더 이상 논할 수 없습니다”(159항).
제5장 접근법과 행동 방식 [163-201항]
이 장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에 관한 문제를 다룹니다.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국제 정책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이 참여하는 대화와 행동을 위한”(15항) 제안이 필요합니다. 이 제안은 “현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자기 파괴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163항)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실천적인 제안이 이념적으로 피상적이거나 환원주의적인 방식으로 개발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적이며 이 용어는 이 장의 모든 절에 나와 있습니다. “폭넓은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쉽지 않은 환경 문제들이 있습니다. …… 교회는 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정치를 대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특정 이익이나 이념이 공동선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솔직하고 열린 토론을 권장하고 싶습니다”(188항).
I. 국제 공동체의 환경에 관한 대화 [164-175항]
1. 환경에 관한 대화 상호 의존은 우리에게 “소수 국가들의 이익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 세계적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안하며, 공동 계획을 가진 하나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164항). 이 회칙은 겁내지 않고 국제적 역학을 과감하게 비판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환경에 관한 세계 정상 회담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치적 의지가 결여되어 참된 의미가 있는 효과적인 세계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166항). 그런데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서 시작하여 여러 교황님들께서 되풀이하여 말씀하신 대로 필요한 것은 세계 통치의 형태와 수단입니다(175항). “이른바 ‘인류 공공재’의 전체를 다룰 통치 제도에 대한 합의”(174항)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새로운 국가적 지역적 정책을 위한 대화 “지역 사람들과 단체들은 …… 더 큰 책임감, 더 강한 공동체 의식, 다른 이를 보호할 준비, 그리고 창조 정신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179항). 또한 우리 자신의 땅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이익만을 추구하고 눈앞의 선거 승리에만 초점을 맞춘 근시안적인 효율성의 논리를 버려야 합니다.
3. 정책 결정 과정의 대화와 투명성 환경과 사회의 관점에서 경제적 제안들을 분석하고 평가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182-188항). 어떤 정책과 사업 계획이 “참다운 온전한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는지를 “식별하기” 위하여, 솔직하고 투명한 정책 결정 과정의 수립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185항). 특히, 새로운 계획의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포함한 투명한 정치적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특혜의 대가로 특정 계획의 실제적인 환경 영향을 은폐하는 부패는 대부분 올바른 정보를 주지 못하고 충분한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 허점투성이의 합의만을 낳을 뿐입니다”(182항).
4. 인간 성취를 위한 정치와 경제의 대화 세계 금융 위기를 계기로 “윤리 원칙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새로운 경제와 더불어 투기 금융 관행과 가상의 부를 규제하는 새로운 방식”(189항)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환경은 시장의 힘으로 바르게 보호되거나 증진될 수 없는 재화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90항). 다른 시점으로 보는 것은 “생산과 소비의 감소가 때로는 또 다른 형태의 진보와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니다. “자연 자원의 지속가능한 사용을 촉진하려는 노력은 돈 낭비가 아니며 오히려 중기적으로 다른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입니다”(191항). 더욱 근본적으로 “발전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것”(194항)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과 관련됩니다. 동시에 “정치학이 없는 경제학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196항). 정치학과 경제학은 함께 새로운 온전한 접근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5. 과학과 종교의 대화 경험 과학은 삶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만일 우리가 조화롭게 살고 희생을 하며 남을 배려하는 중요한 동기를 잊는다면”(200항) 과학기술적인 해법들은 효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종종 종교적 언어로 표현됩니다.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걸맞게 살아가야 하며 신앙에 어긋나게 행동하여서는 안 됩니다.
6. 종교들은 “자연을 보호하고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며 존중과 우애의 관계망을 수립하는 대화”(201항)를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학문 간의 대화도 학문적 고립 극복에 도움이 됩니다. “다양한 환경 운동들 사이에도 개방적이고 존중하는 대화가 필요합니다”(201항). 대화에는 인내, 자제, 관대가 필요합니다.
제6장 생태 교육과 영성 [202-246항]
이 회칙의 마지막 장은 모든 사람을 생태적 회개로 초대하는 핵심 부분입니다. 문화 위기의 뿌리는 깊으며 습관과 행동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육과 훈련이 열쇠입니다. “동기 부여와 교육 과정 없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15항). 모든 교육 분야의 참여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학교, 가정, 매체, 교리교육”(213항)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I. 새로운 생활 양식을 향하여 [203-208항]
1. 새로운 생활 양식을 향하여 현실적 상대주의와 소비의 문화가 존재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인류는 최악의 것을 자행할 수 있지만 또한 정신적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서 벗어나 선한 것을 선택하여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어떠한 체제도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개방성, 곧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작용하는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도록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을 완전히 억누를 수 없습니다. 저는 온 세상의 모든 이에게 우리의 이러한 존엄을 잊지 말라고 호소합니다”(205항). 생활 양식과 소비자 선택의 변화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힘을 발휘하는 이들에게 큰 압력을 행사”(206항)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대안적 삶의 방식을 참되게 발전시킬 수 있고,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208항).
2. 인류와 환경의 계약에 대한 교육 환경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환경 교육은 행동과 일상 습관, 곧 물 절약, 쓰레기 분리 수거, 나아가 “필요 없는 전등의 소등”(211항) 또는 난방비 절약을 위한 따뜻한 옷 입기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211항).
3. 생태적 회개 신앙과 그리스도교 정신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 세상의 보호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도록”(216항) 깊은 동기 부여를 해 줍니다. 개인적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 문제는 공동체 관계망이 다루어야 합니다”(219항). 생태적 회개는 감사와 관대를 의미하며 창조성과 열정을 발전시킵니다(220항).
4. 기쁨과 평화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제안된 것처럼 “자유롭게 의식적으로 발휘된 냉철함은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223항). 이와 마찬가지로 “행복은 우리를 해치는 일부 욕구를 억제하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이 줄 수 있는 많은 다른 가능성들에 열려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223항). “우리가 식사 전후에 잠시 멈춰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그것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227항).
5. 사회적 사랑과 정치적 사랑 “온전한 생태계는 또한 폭력과 착취와 이기주의의 논리를 타파하는 단순한 일상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230항). 그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사회를 사랑하고 공동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애덕에 대한 “탁월한 표현입니다”(231항). 사회에서 자연과 도시 환경을 보존하면서 공동선을 위하여 활동하는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6. 성사의 표징과 안식일 거행 우리는 또한 하느님을 가까이 만나 뵙고 또한 그분의 신비의 징표를 담고 있는 창조를 묵상하면서 그분을 만납니다. 성사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연을 받아들이시는지를 특권적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는 물질과 육체를 부인하지 않으며 그것들에 완전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특히 성찬례는 “하늘과 땅을 결합시킵니다. 성찬례는 모든 피조물을 품고 그 안에 스며듭니다. …… 그러므로 성찬례는 또한 환경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위한 빛의 원천이며 동기로 모든 피조물에 대한 관리자가 되라고 우리를 이끌어줍니다”(236항).
7. 삼위일체와 피조물들의 상호 관계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의 친교를 이루시는 한 분 이신 하느님을 믿으면서 삼위일체가 모든 피조물에 그 표징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239항). 인간은 또한 삼위일체의 역동성을 본받으라는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 다른 이들, 모든 피조물과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 자신에서 벗어납니다”(240항).
8. 모든 피조물의 모후 예수님을 돌보시는 마리아께서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사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가 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공정을 노래합니다”(241항). 마리아 곁의 요셉은 복음에서 의로운 사람이며 노동자로 참으로 온유하고 강한 인물로 나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을 보호하도록 가르치고 힘을 실어줄 수 있습니다.
9. 태양 넘어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한없는 아름다움 앞에 서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영원한 삶은 경외를 함께 나누는 체험이 될 것이며, 그 경험 안에서 눈부시게 변모된 모든 피조물은 합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궁극적으로 해방된 모든 가난한 이에게 줄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243항). 우리의 고난과 근심이 희망의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 중심에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생명의 주님께서 언제나 현존하여 계시기”(245항)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도록 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기쁘면서도 불편한 이러한 긴 성찰의 결론으로”(246항), 교황님께서는 두 가지 기도, 곧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인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드릴 것을 제안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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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 원문보기 글쓴이: 사랑과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