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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a poor wayfaring stranger
I'm travellin' through this world of woe
Yet there's no sickness, toil nor danger,
In that bright land to which I go
I'm going there to see my Father,
I'm going there no more to roam
I'm only going over Jordan
I'm only going over home
I know dark clouds will gather round me
I know my way is rough and steep
But golden fields lie just before me
Where God's redeemed shall ever sleep
I'm going there to see my Mother
And all my loved ones who've gone on
I'm only going over Jordan
I'm only going over home
I'll soon be free from earthly trials
This body rests in the old churchyard
I'll drop this cross of self-denial
And go singing home to God
I'm going there to see my savior
I'm going there, no more to roam
I'm just goin' over Jordan
I'm just goin' over home
나는 보잘 것 하나 없는 떠돌이 방랑자입니다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마냥 떠돌고 있지요
하지만, 이제 내가 가려고하는 밝은 곳은
어떤 아픔도, 고통도, 위험도 전혀 없는 그런 곳입니다
이제 난 그 곳으로 갑니다. 나의 아버지를 만나러
이제 난 그 곳으로 갑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되는 곳
나는 저 요단강을 건너가려합니다
내 마음의 고향으로 가려 합니다
내가 가는 길에 먹구름이 날 에워싸고
때로는 그 길이 몹시 거칠고 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곳은 드넓은 황금빛 들판이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놀라운 은총으로 모두가 영원한 휴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그 곳으로 갑니다. 나의 어머니를 만나러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나는 저 요단강을 건너가려합니다
내 마음의 고향으로 가고자합니다
곧 모든 고통은 끝이 나겠지요
그리고 이 몸은 교회의 묘지에 잠들게 되겠지요
그러면 저는 이제 금욕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찬양하며 제가 태어난 곳으로 가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가렵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으로
나는 저 요단강을 건너가려합니다
내 영혼의 고향으로 가려합니다
미국의 컨트리 여가수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가 1980년에 발표한 앨범 (roses in the snow)에 수록되었으며, 그해 빌보드 차트 7위까지 올랐다. 카세트 앨범으로 구입해서 테입이 늘어질 때까지 아주 열심히 들었던 최애 팝송중의 하나라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그저 인상적인 컨트리 팝 정도로 생각하지만, 일부이긴 하지만 미국 서부지역 사람들은 이 노래를 (백인 영가)라고 부른다. 기독교 찬송에서 (흑인 영가)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 알고 있지만 (백인 영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내가 처음 떠올렸던 인상적인 배경처럼...... 이 음악에는 서부개척시대의 위험에 노출되고 나약하기만 한 떠돌이 인간(백인)이 창조주에게 가졌던 갈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배경을 살펴보면 (백인 영가)라 불리는 이유가 비로소 이해가 되고 남음이 있다.
처음엔 성서의 시편을 인용하여 폴 게르하르트가 가사를 쓰고, 1666년 독일 작곡가 요한 게오르크 에벨링이 곡을 붙여 구전으로 전승되어 내려오다가, 미국 서부로 이주한 아일랜드 출신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꾸준히 불려지면서, 아일랜드민요로 알려진 채 애팔래치아지방에 구전되어왔다. 실제로 미국 남북전쟁 당시 디비 감옥의 예배에서 투옥된 죄수들의 입을 통해 서부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이때부터 다른 이름인 (백인 영가)로 불려졌다. 존 바에즈를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을 만치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불렀으나, 지금 이순간까지도 ‘영혼의 방랑자(Wayfaring Stranger )’라고 하면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가 오리지널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쨌거나 이 노래만은 반듯이 에밀루 해리스의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My Love, Don't Cross That River(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영화가 있었다.
도대체 왜 강을 건넌다는 사람을 그렇게 간절하게 죽자살자 뜯어 말리는 것일까?
낼름 다리하나 놓고 수시로 건너갔다 왔다 반복하면 될 것을, 왜 한 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저렇게 허리춤을 부여잡고 하소연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위에 게재한 노랫말처럼,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요단강(Jordan River) 이야기는 지금 건너라는 것인지 건너지 말라는 것인지 사뭇 아리송하기만 하다. 요단강 건너가면 좋다는 이야기 같기는 한데....... 저 나그네가 시방 강을 건너겠다는 것이여, 아니면 차차 생각해 보고나서 나중에 건너겠다는 이야기여? 언젠가 가기는 가야하는데....... 볼장 다보고 다니다가 생판 막장에나 꾸역꾸역 건너겠다는 말이 아니여, 시방?
가긴 간다는 건가? 아님 내 발로 스스로는 절대 못간다는 말인가?
그 강은 왕복이 없고 오로지 편도뿐이라고?
그럼 그 요단강(Jordan River) 건너편엔 도대체 무엇이 있는데? 고통도 없고 굶주림도 없고 늑대와 사자와 양이 함께 뛰어논다고 하지 않았어?
뭐여?
어쨌거나 ‘강을 건넌다’는 것은 일단 ‘죽는다’는 것이라고?
헐!!!
그러니 완전 일방통행이지. 죽었다 되살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요단강(Jordan River), 그것이 궁금해진다.
성경에서 요단강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죄를 씻는 곳(막 1:4~5)’이 이곳이며, ‘죄악의 세상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건너가는 장소(왕하 2:8, 11)’가 바로 이곳이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복된 처소로 들어가는 통과 문(신 3:25)’ 이자,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처소에 이르는 길목(신 11:31, 12:10)’이며, 동시에 ‘옛 자아가 죽고 새롭게 거듭나는 곳(요 3:22~23)’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의 동편 경계를 이루는 곳이 요단강(민 34:121)’ 이라는 위치에 대한 구체적 표현까지 이미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 볼 때 가장 중요한 결론은....... ‘요단강 건너편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약속의 땅 가나안’ 이라는 사실이다.
앞에서 에밀루 해리스가 노래한 것처럼........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두려움도 없는, 푸른 초원과 황금빛 들판에서 늑대와 사자와 양과 어린아이가 함께 뛰어노는 그런 천국이 바로 저 요단강 건너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가나안(Canaan)이다. 하나님께서 손수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마련해 놓으셨고, 인간의 삶이 워낙 질곡이 많아 예비해 두신 가나안에 실제로 올라와 살아가는 사람의 수가 너무나 적어서 몹시 마음이 아프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안타까움을 해결해주시기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 보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시면서 모든 인간을 모든 죄악에서 건저 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민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한 모세는 40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신앙에 대한 연단을 쌓은 결과로 마침내 요단강 가에 도달했다. 하지만 정작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선택받아 구원에 이른 새로운 인류는 여호수아의 인도로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갔던 것이다. 선택받은 그 민족은 그날 그렇게 요단강을 건넜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마침내 입성을 한 것이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선지자의 자리를 위임하고 산에 올라, 요단강을 건너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서는 유대민족의 긴 행렬을 바라다보면서 눈을 감았다. 정작 모세 자신은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것이다.
지금 나는 모세가 숨을 거두던 바로 거기 그 요단강 가의 높은 산언덕에 올라서 강 저편의 가나안을 건너다보고 있다.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가나안(Canaan)이 정말로 성경에 적혀있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직접 약속하신 땅’이 맞는지를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
걱정 근심 고통 배고픔이 없는 땅이 가나안이다. 양과 사자가 함께 뛰어놀며 살아가는 땅이 가나안이어야 하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손수 예비해 두신 땅이자 거룩한 약속의 완성’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시야가 보이는 강 건너의 풍광은 절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그런 풍경이 절대 아니다. 양과 사자가 함께 뛰어 노는 모습은 고사하고 개와 고양이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일까? 어쩌면 애초부터 모두가 거짓이었을까?
혹, 이곳이 성경이 이야기한 그 가나안이 아닌 것은 아닐까? 그럼 저곳에서 가나안을 놓고 피터지게 싸우는 저들은 또 뭐야? 바보야?
요란한 싸이렌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섬광과 함께 요란한 폭발음이 온 세상에 진동한다. 폭탄을 매단 드론이 하늘 가득 날아다니며 여기저기서 폭발을 한다. 굉음과 함께 전투기들이 까마득히 날아다니며 기총소사를 하고 미사일을 쏘아댄다.
지금 가나안 땅엔 온통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앰블런스 싸이렌 소리와 총성과 미사일 폭발음으로 지축이 흔들리고 있다.
정녕 이곳이 하나님께서 손수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란 말인가?
지금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아비규환 속 지옥불바다일 뿐이다.
정녕 가나안은 어디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과연 진실이었는가?
성스런 약속의 땅에서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저들은 누구인가?
누가 악의 축(axis of evil)이고, 누가 거대한 사탄(a giant demon)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누가 있어서 저들 악과 사탄을 막아내고 단죄할 것인가?
지금 약속의 땅 가나안이 저렇게 아비규환이 된 것은........ 혹, 구원의 약속과 천국이 이미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는 반증은 아닐까?
지금 가나안에는 온통 전쟁과 기아와 절규와 반인륜적 파행만이 무수히 자행되고 있을 뿐이다. 서둘러 전쟁이 멈춰지고 치료와 인륜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이젠 우리 인간이 분연히 떨치고 나서서 신(神)을 보내고 지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성(神聖)이 아니라 인성(認醒)의 시대’를 이제라도 새롭게 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21세기가 시작되던 밀레니엄 벽두부터 인류는 새로운 전쟁의 국면을 맞이하고 말았다. 전면전 성격의 ‘세계대전’을 넘어서 국지적 성격의 ‘테러와의 전쟁’이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인류의 전쟁 역사는 9.11 테러 사태 이전과 이후로 확실하게 구분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이 말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참 잘도 같다 붙인다’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전쟁은 그냥 전쟁이다. 그 기원 또한 인류의 역사와 늘 함께 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다툼이 발생했고, 그 결과로 생명의 존엄을 경시하고 타인의 생명과 재물과 영토를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 벌어지는 사투가 바로 전쟁인 것이다. 역사적 시기와 주체와 여러 가지 이유로 선과 악의 평가가 엇갈리거나 뒤바뀌는 경우도 있겠으나...... 결론은 오로지 하나, 전쟁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설혹 신(神)이 명령한 전쟁이었다 해도 우리 인류는 하나로 굳게 뭉쳐 그 신의 명령을 거부했어야만 하는 것이다. 정당한 전쟁, 정의의 전쟁, 바람직한 전쟁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인류 역사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 전쟁의 원인은 (종교) (민족) (영토) 때문이다. 거기에는 늘 입에 개거품을 물고 반인륜적 행태로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면 또 항상 대다수의 어리석은 군중들은 그들의 선동에 놀아나 광란의 칼춤을 추기 시작한다. 거기에 더하여 그 선동자의 입에서 ‘그 모든 것이 전지전능한 신(神)의 뜻’이라고 부추기기 시작하면, 그때마다 인류는 미래에 대한 존망을 걱정해야만 했고 실로 엄청난 피로 톡톡히 그 댓가를 치러야 만 했던 것이다.
포탄이 날아와 사방에서 마구 터져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한 전쟁터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병사가 외쳤다.
‘참혹한 결과가 뻔한 이 전쟁을 왜 끝내지 않는 거야?’
그러자, 그의 옆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멈추게 하려고 두 손으로 누르고 있던 병사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신(神)도 가끔은 이런 전쟁을 즐기고 싶은 건가봐. 그리고 인간들 중에 이 전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자들도 여럿 있기 때문 일거야. 그들이 우리를 여기로 보냈어.’
'전쟁을 통해 먹고 사는 자들이야말로 인류의 공적이야. 그들이 바로 악마인거야.'
묻고 싶다. 지금 (가자지구)와 (서안지구)가 과연 저런 모습인가를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허구였을까? 아니면 가나안이 저곳이 아니라 다른곳에 있는 것일까? 모세가 엉뚱한 장소를 잘못 골랐나?
요단강(Jordan River)을 건너면 바로 가나안(Canaan)이다.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젓과 꿀이 흐르는 대지에 사자와 양과 어린아이가 함께 뛰어노는 약속의 땅이 바로 가나안인 것이다. 그 어원에는 ‘낮은 땅’ ‘갈대의 땅’ 혹은 ‘자주색 소라의 땅’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곳이다.
고대로부터 요단강 건너에서 시작하여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을 팔레스틴이라 불렀다고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처음 기록했다.
선사시대부터 본래 이곳에 살던 원주민은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헷, 히위, 여부스 등의 원주민 7족속이 흩어져 부족사회를 이루며 살아왔다. 이중에 후기에 팔레스틴에 유랑민으로 합류한 노아의 손자인 가나안(창 10:15)이 이끄는 유대부족이 처음 생겨났다. 팔레스틴이란 이름은 처음 페니키아의 뒤를 이어 지중해의 제해권을 차지하고 식민지 건설과 해상무역을 추진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곳을 차지하고 자신들과 교역을 하던 블레셋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던 명칭이었다. 팔레스틴이란 ‘블레셋 부족의 땅’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출 14:29,15:14) 수많은 제국들이 번갈아가며 서로 여기 이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를 원했다.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제국과 오스만이 번갈아가며 이 지역을 차지했고 지배 통치하면서도 이 지역의 지명은 언제나 팔레스틴 지역이었다.
다만,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 의해 팔레스틴 영토를 모두 점령하게 되는 유대정복전쟁이 성공한 이후로 유대인들에 의해 이 지역을 가나안(Canaan)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곧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땅’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러던것이 20세기에 이르러 세계지도에서 팔레스틴이란 지명은 어디론가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 스스로에 의하여 이곳을 가나안이라 부르는 경우로 점차 줄어갔다. 아마도 더 이상은 ‘젓과 꿀이 흐르지도 않고, 사자와 양과 이리가 함께 뛰어노는 땅이 아니라는 진실을 감출수가 없어서가 아니었을까?’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팔레스틴이 사라진 지도에 새롭게 (이스라엘 국가)와 (가자지구) (서안지구)라는 지명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시작점의 유엔(UN)이 설정한 지도에는 분명 (하나의 국가인 이스라엘)과 (하나의 국가인 팔레스틴)이 등재되었으나, 시오니스트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국가)와 두 개의 임시 지역인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로 나뉘어 기록된 것이다.
이는 전쟁 난리 통에 집 주인의 배려로 대문 옆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들어갔던 시오니스트들이 전쟁이 끝나고 보니 법원 등기소에 몰래 집주인으로 등기를 마쳤던 것이다. 그리고는 본래의 집 주인을 나가라고 내몰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그 거짓 등기부 등재가 모두 거룩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졌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등기부 등본이 유대민족에게는 유효할지 모르나, 모든 인류와 모든 종교가 인정하고 허락하는 등기부 등본은 아닐진데 말이다.
그것이 (팔레스타인 분쟁)의 본질인 것이다.
거기에 어처구니없게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하고 (지구방위대를 자처하는 미국의 정의에 대한 이중 잣대)가 이 분쟁을 부당함으로 이끌었고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모든것을 빼앗긴 사람들에 의한 피의 보복이 거듭거듭 이어져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백인들이 유대민족에게 저지른 참혹한 죄악의 댓가를 왜 애매하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신 배상해야만 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있고 그분이 진정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면...... 이 해괴한 전황을 물리시고 죄를 지은 자가 죄의 댓가를 치르게끔 하셔야만 한다. 누가 유대인들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는가? 누가 그들을 홀로코스트로 보냈는가?
진정으로 누가 악의 축(axis of evil)인가?
과연 누가 거대한 사탄(a giant demon)인가?
나는 알고 있다. 누가 악의 축이고 누가 거대한 사탄인지를 말이다.
이제 곧 나는 과감하게 그게 과연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힐 것이다. 후회 없이 말이다.
‘하나님! 저 광경이 아름다워 보이십니까?’
‘저 광경이 모두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에게 하신 약속의 결과란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대중매체를 위한 연출이었습니까? 무엇이 구원이란 말씀입니까? 신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이 바로 저런 것입니까?’
‘책임을 지셔야지요?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 주셔야지요? 더 이상은 십자가와 성경을 가지고 밥 벌어 먹고 사는 자들이 늘 떠들어 대는, 이게 다 신께서 더 크신 다른 뜻이 있어서 지금 고통을 주시는 것이라는 위선과 거짓에 놀아나지 않게 당신께서 직접 해결을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침묵이 금값인건 세속에서나 하는 말이고...... 차라리 전지전능이니 살아계신 유일신이니 하는 허명과 허세를 차라리 거두시던가요. 아님 창조주 사표를 내고 이참에 딴 차원으로 이주를 하시던가요?’
‘하나님,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저기가 가나안(Canaan)이 맞습니까?’
아주 오래전에 한 서방 기자가 ‘이슬람은 모두 테러리스트다’라는 기사를 썼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세계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러자 그 언론사는 잽싸게 공개 사과를 하며 이렇게 기사를 바꿨다.
‘이슬람이 모두 테러리스트는 아니다. 다만 테러리스트 대부분이 이슬람인 것은 맞다.’라고 말이다.
너희들 지금 장난하니?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되니?
‘서양인들은 모두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또라이 기질을 가지고 있다. 도무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악마와도 같은 인류 역사의 공적들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바로 그 또라이 기질에서 나왔다. 바로 서양인에게서 말이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말이다. 역시나 도처에서 거센 항의가 들어온다면 나도 이렇게 살짝 바꾸겠다.
‘서양인이 모두 히틀러나 스탈린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또라이들은 모두 피부가 하얀 유럽 영토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서양은 분명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 세상이다.’ 라고 말이다.
저 울부짖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들에게서 무엇이 느껴지고 보이는가?
어떤 절박한 간절함과 슬픔과 좌절과 고통과 두려움이 어린 눈망울마다 가득 담겨져 하염없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다.
저 어린아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신이 있다면 저 아이들은 지금 신에게 어떤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지금의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참혹한 전쟁터와 가족이 죽어나가는 시련과 아픔과 고통을 저 어린 마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불가항력처럼 벌어지고 있는 비 인륜적 전란 속에서 왜 저들이 저런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단 말인가? 신이 축복해주신 구원의 영역에서 제외된 내버려진 아이들이란 말인가? 신께서 내정한 특정 집단을 위해 기꺼이 희생되어야 하는 대속 제물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 신(神)에게 침을 뱉어주겠다. 그 자체로 이미 거룩함을 헌신짝처럼 버린 가짜 창조주일 것이다.
지켜보고 있는 나의 마음은 아프다 못해 찢어지고 부서지고 대단히 고통스럽다.
저 아이들이 자라서 ‘그 누군가에게 반듯이 복수하겠다고 손에 무기를 집어 든다면.........’ 나는 감히 선뜻 나서서 말리지 못할 것이다. ‘참아야 한다’거나 ‘하나님의 정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저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설명하고 말릴 자신이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의롭지도 못하고 공평하지도 못한 비 인륜적 만행에 대해서 아무런 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수는 또 다른 피의 복수를 거듭거듭 반복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는 저들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복수의 전사로 성장해 나설 것이라는 것을 예견해 본다. 왜냐면....... 나라도 당연히 그러했을 테니 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복수를....... 그 방법과 사용하는 무기가 어떤 것이든...... 나는 그것이 테러이며, 그들이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며, 죄악을 먼저 저지른 자에 대한 응분의 대가거나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충분히 묵인해 줄 수 있겠다. 어쩌면 오히려 그것이 정의로운 복수일 수 있다.
지금 저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라.
어디에서 테러리스트의 싹을 찾아낼 수 있는가?
'피의 맛과 화약의 냄새에 취한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시오니스트들아 잘 보아라.'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부디 전쟁을 멈춰 달라’고 절규하는 아이들의 간절한 손짓을 가만히 살펴보아라.'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니?'
'그 눈망울과 손짓을 어디서 보지 못했니?'
'그것 보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한다면 너는 유대인 자격이 없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셨던 사람이 아닌 것이야?'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마. 저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을 어디서 보았니?'
'바보야. 그건 바로 네 모습인거야.'
'네 부모의 눈물이고 네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짓인거야.'
'너는 유대인이고 저들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너희는 수천 년을 같은 곳에서 함께 뛰어놀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함께 생활한 형제이며 가족인 것이야. 수천 년 동안 너희는 그냥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고 또 가나안 사람들이었던 것이야. 혼인을 통해 너희는 서로 섞였다고....... 유대인이 단일민족이니? 아니야. 너희는 복합민족이야. 몰라?'
'홀로코스트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살려달라고 손짓하던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이 바로 지금 저 전쟁 한복판의 아이들의 모습인 것이야.'
'시온주의? 웃기고 자빠졌네.'
'신께서 노아의 방주를 행하셨던 이유는....... 바로 시오니스트 같은 놈들을 먼저 제거하려고 하셨음인데......... 실패하신 것이지.'
'실패?'
'그것도 여러 번씩이나?'
'나는 이럴 때마다...... 조물주의 전지전능은 허구라고 봐.'
'그런데 거기다가 총을 쏘고 폭격을 해?'
'네 가슴과 네 조상의 심장에 대고 총질을 해댄다고? 그래서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시집살이 호되게 당한 며느리가 더 호되게 못된 시어머니 노릇을 한다고 말야. 가스실에서 겨우 살아나오더니 이젠 남을 서슴치 않고 폭탄밭으로 몰아내는 구나. 참 거룩하게 유대인스럽다. 아멘!!!!!'
' 히틀러가 작정했던 일이 성공했더라면, 우리는 홀로코스트에서 사라진 유대인들을 위해 한 번만 울었으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의 후손들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벌리는 사태를 거듭 반복해서 행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이 또 울어야 하는지가 두렵다. 차라리 그때 히틀러가 성공했었더라면......... 시온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을 지켜보자면 차라리...... 가끔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가 악의 축인가?'
'거대한 사탄은 과연 누구인가?'
--- 이번엔 진도가 잘 나가지지가 않네요.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