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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적극적인 신앙 히 10:32-39
주신 말씀 히10:32-39절을 중심으로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진정으로 올바른 적극적인 신앙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32절에서 수신자들에게 지난 날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했던 것을 기억해보라고 말합니다.
단지 어려운 싸움을 승리로 이긴 것을 회상하거나 무용담을 듣자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순간을 생각하며 다시 닥친 환난을 물리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선전포고를 하면서 새롭게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에게 ‘예전에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생각하며 승리하자’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위로와 격려를 합니다.
이 땅에 아직 치열한 영적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김연아처럼 세계 정상을 제패하기 위해서는 이기는 연습이 필요하고 이기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하지요. 이길만한 상대와 싸우며 실수하지 않고 승리할 때 큰 경기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해보자 이겨본자가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싸움은 단회적이지 않지요.
전쟁을 걸어오는 사단은 한 번만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지칠 줄 모르고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집요하게 도전하고 도발하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북한의 김정은이 금 년 들어 백 여발의 로켓과 방사포를 발사하며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보시면 알 수 있지요.
사단의 시험은 한 시험이 끝나면 바로 다른 시험이 찾아옵니다.
사단은 한 계획에 집착해 있는 척 하다가 신속하게 시험의 형태를 바꾸어 문제를 제기하고 또 재차 야기하고 도발합니다.
사단의 공격은 한 편에서 공격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한 편에서 공격이 개시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연속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땅을 떠나 아버지 품에 안길 때까지....여기 저기서 정신없이 꽝 꽝 터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맹렬히 공격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쉬지말고 기도해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지 않으실 줄 믿고, 사단으 연속적인 공격을 물리치고 승전가를 높이 부르기 위해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진정으로 올바른 적극적인 신앙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진정으로 올바른 적극적인 신앙은 무엇인가?
첫째로 처음 사랑과 열심을 지키라.(32-34)
처음 믿었을 때의 그 인내와 열심을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32절 말씀은 처음 믿었을 때의 그 인내와 열심을 돌이켜 보라 합니다.
33-34절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인해 구경거리가 되고 재산을 빼앗기는 등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기뿐만 아니라 더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자원하여 기쁨으로 돌볼 정도로 단단한 믿음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졌던 성도들이 어느새 모든 신념이 무너져버리고 언제 외부의 유혹이나 핍박에 넘어질지 모르는 약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014브라질 월드컵은 축구의 속설 [축구란 전후반 연장전까지 죽도록 뛰며 차다가 결국 독일이 이기는 경기다]라는 말처럼 독일이 우승의 영광과 함께 355억의 상금도 받아 챙겼지요.
월드컵은 감독의 무덤이라고 11명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요.
월드컵을 보면서 특히 공항에서 엿먹으라고 던지는 인사들을 보면서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요. 우리나라 공식적인 FIFA 랭킹은 56위 그렇다면 32강이 붙는 월드컵 본선에 들어간 것이 최고로 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평상시 실력이 안 되는데 어떻게 월드컵에서만 잘하라는 것인지 ....특히 독일은 한 감독이 10년 동안 투자하고 키워서 이제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고 우리는 일 년짜리 감독한테 책임을 묻는 냄비근성이 ...참 한심..
201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의 재현을 꿈꾸거나 홍명보 감독의 8강 목표제시가 잘못된 것이지 16강에 못 든 것은 실력만큼 평가받은 것이죠...
좋은 성적을 원한다면 국내리그 성원 그리고 유소년 축구의 육성 정치인이 배제된 축구인들에 의한 축구협회 운영등 고쳐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4강 8강을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16강 8강 4강 그리고 우승하기 위해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과학적인 육성 프로그램을 가지고 선수를 선발 육성하고 지원하고 양성하며 투자한 만큼 결과가 온다는 진리를 잊지말아야합니다.
사막에 나무만 심는다고 나무가 자라서 황사도 막아주고 풍성한 열매가 맺히나요? 아닙니다. 아까운 묘목만 죽이는 것입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으려면 습기가 증발하지 않도록 보호덮개를 깔아주고 수원지로부터 관을 연결하여 지속적인 수분과 영양을 공급해줘야 합니다.
여기서 처음 믿은 첫 사랑은 물론 개인적인 첫 믿음과 첫사랑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초대교회 바울의 믿음 예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즉 성도는 예수님의 자기희생 섬김 헌신 봉사의 사랑을 회복해야 하며,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견고한 믿음의 반석위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처음에는 영원히 변치 않겠다고 너는 나의 반쪽이라고 한 순간이라도 너를 잊지 않겠다고 너 없는 나는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하고 고백하던 때를 잊어버리고 결혼하여 살다보면 서로의 단점 약점 그리고 불협화음 때문에 헤어지고 싶고 더 좋은 것이 눈에 보여 헤어지는 경우가 있지요. 미국의 경우 이혼율이 60% 즉 열 쌍중 여섯 쌍이 이혼한다합니다.
혹시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을 처음 만난 감동과 기쁨 속에서 세운 계획과 목표를 잃어버리고 세상의 흐름에 밀려 부평초처럼 떠돌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이적과 표적 기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수 없이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배반하고 결국은 예수님마저 부인하고 죽이는 죄를 짓고 말았지요.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의 그 사랑과 열절을 잃고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면 다시 그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그 뜨거운 모습으로 날마다 감사의 찬양을 부르며 앞에 남은 천국 길을 힘차게 달려가길 소원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즉 믿음으로 인해 고난 받는 이웃,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인들이라 생각하고 세상이 외면하는 자리에 그리스도의 따뜻한 빛과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33)
천국에 소망을 두면 이 땅의 시련이나 아픔은 넉넉히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께 합당한 자기희생, 헌신, 봉사, 섬김들의 덕목을 실천하는 십자가를 기쁘게 지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길 축원 합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진정으로 올바른 적극적인 신앙은 무엇인가?
둘째로 하늘의 시계를 보며 이 땅을 살아가라(35-37)
담대한 자가 하늘에서 큰 상을 받는 법이니 모쪼록 믿음의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큰 상급을 받는 근거인 담대함 파르레시안( παρρησίαν)은 무엇인가요?
확신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지킬 때 천국에서 보답받는 다는 확신만 있다면 성도는 어떤 고난과 핍박도 충분히 참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상은 큰 보상으로 신앙을 지키는 성도는 누구라도 받을 수 있는 천국의 보상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용기를 갖는 다는 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기에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한 척하고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신앙인은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므로 나아가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용기와 담대함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그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곧 주의 나라를 위해 그의 뜻을 지키려고 세상의 모진 풍파에도 굴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진 성도되기 원합니다.
이러한 용기와 담대함은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된 성도의 마음에 좌정하신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며, 또 시련의 순간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으로 얻어지는 줄 믿습니다.
이 용기와 담대함이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얻게 할 것이기에 우리가 비록 땅에서 살지만 하늘에서 주ㅡ실 큰 상급이라는 시계를 보며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담대함이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굽히지 않는 것 즉 주님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믿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담대하다고 평가하시지 세상 것 을 얻기 위해 용기를 내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기 위해 하늘 시계를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갈 때 큰 상을 얻는 담대한 주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37절 말씀은 잠시 후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터이니 이 시련의 기간을 참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잠시와 인간이 기대하는 잠시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이 성경이 기록된지 이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리스도의 재림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임박한 종말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37절은 상반절은 구약 성경 이사야26:20 하반절은 하박국2:3고난 가운데서 인내하라는 말씀의 인용으로 대적자의 분노가 지나가기까지 잠시 잠깐 동안 숨어 있으면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어 대적의 죄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즉 조만간 아주 잠시 동안이 지나면 오시는 이가 오실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은 경건한 신앙인들을 핍박하는 이들에게는 두려움일지라도,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인내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기쁨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이시며 동시에 구원주로써 곧 오셔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약속된 복을 주실 것을 믿으라 하십니다.
하늘에 속하여 천국의 시계를 보는 성도들과 땅에 속하여 세상의 시계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난 5월22일 천주교와 NCCK가 ‘신앙과 직제 협의회’ 선언을 통해 카톨릭과 일치를 위한 조약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성도들이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된거냐구 ...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라 우상종교임을 모르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 많지요.
마치 큰집이라는 인식을 갖은 성도조차 아직도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로마의 각종 종교와 황제숭배사상 태양신 숭배사상등을 뭉뚱그려 괴물을 만들어 보편적 교회라는 카톨릭이 되었고 이들은 교황을 신의 대리인으로 마리아를 하나님의 아내로 마리아 승천설까지 만들고 성인과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참담한 자들입니다. 물론 그들이 종교학적으로는 건전한 종교임을 인정하나 신학적으로 그들은 우상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타종교와 독재의 타도, 사회정의의 실현, 부정부패의 척결, 민주화운동, 환경보호운동등은 함께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배의 대상이 다른데 타종교와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카톨릭과 한 몸을 이루어 함께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행동하겠다는 일치(한 몸) 운동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요? 이들은 땅의 시계를 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비록 몸은 이 땅에 있을지라도 눈은 언제나 하늘을 보며 천국의 시계에 주목하는 구별된 성도되기 원합니다.
천국 즉 하늘을 바라보는 성도는 결코 영적 간음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성도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시계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을 기억하며, 계획은 영원히 살 것처럼 장기계획 프로잭트를 세우되, 행할 때는 매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자세 즉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긴박한 자세로 살면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에 만전을 기하시길 축원 합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진정으로 올바른 적극적인 신앙은 무엇인가?
셋째로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라 (38-39)
바울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논증하기 위해 하박국 2:4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뒤에 나오는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단지 믿음뿐 아니라 그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 앞으로 나아가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고백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그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 을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믿음이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삶이며, 그렇기에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더 나아가면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안전할 때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곧잘 고백을 하지만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이전의 고백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뒤로 물러나며 허둥대기 일쑤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만 입술로만 하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이를 행동으로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말하는 의리 으으리하는데 진정한 의리는 믿음대로 베드로처럼 물위를 파도를 보지 않고 예수님만 보며 가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는 말에 도취되어 앉아서 입술로만 고백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지 보다 진지하게 묻고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골리앗이 매일 나와 하나님을 모독하는데 앉아서 사울처럼 딸을 주겠다고 상급이나 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목숨 걸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기게 해주시리라 믿음으로 담대히 용기를 갖고 나아가 진정 살아 있는 믿음임을 증명하는 것이 적극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한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39절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이니라”한 말씀에서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άπώλειαν아폴레이안)은 ‘물러남으로 벌을 받게 될자들’ 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두려움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믿음이 없을 때 따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을 심판과 멸망뿐이라는 것입니다.
돌격 앞으로! 명령이 떨어졌는데 아이구 무서워하고 주저하거나 뒤돌아서면 총살형을 면하지 못합니다.
고난에 직면하여 뒤로 물러서는 자는 눅9:62“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한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믿음에서 떠나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어 영원한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이 위기를 맞고 있다거나, 문제를 실제보다 훨씬 크게 보는 편향적 시각 때문에 주님보다 그 문제들을 크게 보고 두려움으로 뒷걸음치다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육신보다 영혼의 온전한 보전이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이 살아도 그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우리 일생의 우선순위를 몸이 아니라 영혼에 두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일시적으로 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혼을 망하게 하는 것이므로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인생들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 자기 이름을 떨친다 해도 그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가지고 순전하게 보전해야 할 것은 몸이 아니라 영혼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한 길, 가나안을 향해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범람한 요단을 향해 과감히 발을 옮길 수 있는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를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뒤돌아보며 애굽의 고기가마와 부추등 야채를 그리워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앞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모든 행동에 분노하시고 징계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 삶 속에서는 자꾸 애굽을 그리워하고 뒷걸음치는 날들이 너무 많지 않나요?
믿음이 있노라하면서도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움츠러들고 의기소침하고 뒤로 물러나는 경우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성도라 자처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것은 성도의 본질에 반하는 행동일 뿐 아니라 개나 돼지가 토했던 것을 먹고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뒹구는 것과 같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버림받는 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대장되신 예수님이 계시므로 움츠러둘거나 의기소침하여 패배의식이나 후퇴라는 단어 대신에 오직 앞에 있는 하늘 도성을 향해 날마다 힘차게 달려 반드시 승리할 줄 믿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진정으로 올바른 적극적인 신앙은 무엇인가?
첫째로 처음 사랑과 열심을 지키라.(32-34)
둘째로 하늘의 시계를 보며 이 땅을 살아가라(35-37)
셋째로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라 (38-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알고서도 주님을 떠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매우 엄중한 죄를 짓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고, 어떤 환난과 시련 고통이 있을 지라도 처음 사랑과 열심을 지키며 믿음의 행동을 보이며 하늘의 시계를 보며 이땅을 살아가는 올바르고 적극적인 신앙을 지키므로 하늘에서 귀히 쓰임받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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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설교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 배를 드린 선주 사랑과 진심으로 큰 은혜의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