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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이 쏘스가 되어 세상이 창조된다
믿음은 소망을 이루기 위한 재료들이고 믿음의 사람들은 이를 증명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믿음으로 소망하는 것은 이루어 질 것이다. 다만 무엇을 소망하느냐에 달렸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우린 믿는다. 우리가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요구된다. 여기서 믿음의 본 질을 볼 수 있다.
지금 내 삶의 모습은 믿음의 결과물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은 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식이 인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 내 삶을 창조한다.
한번 되돌아보자. 과거에 난 무슨 말들을 하며 살았는가?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잠시 말 할 수 있으나 대부분은 나의 진심을 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도 내 믿음으로 창조된 인생에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남편의 탓도, 아내의 탓도, 자녀의 탓도, 대통령의 탓도, 세상의 탓도 아니다. 심지어 사단의 탓도 아니다. 다만 내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쏘스가 되어 내 삶을 창조한 것이다(히11:1~3)
# 우리에게 나타나는 말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 말은 저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나온다. 불신, 원망, 미움, 시기, 분노 등... 그래서 우린 회개해야한다. 믿음의 말을 하기 위해 마음을 먼저 정검해야 한다. 우리의 숨겨져 있는 자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듬어져야 한다. 지하 깊은 곳에 숨겨두면 안나올 거 같지만 반드시 말로 튀어나와 불법의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2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하나도 없으시다. 그림자도 없으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한다면 거짓말하는 자이고 불법한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미워하는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서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깨닫지 못한다 (요일1:5~11)
3 빛과 어둠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다
이 말씀에서 대조되는 것이 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 빛과 어둠, 의와 불법, 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즉,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어둠에 있는 것이고 불법을 행하는 것이며 벨리알(사단)에 속한 것이며 우상 숭배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용서하지 않고 심판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또는 거절감이나 상처, 내제되어 있는 분노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하나님께서 어둠이고 사단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실 우린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 오직 심판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고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합당한 댓가를 반드시 지불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된다. 다만 우린 불쌍히 여기고 용서할 뿐이다. (고후6:14~16)
4 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불법을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초대 교회는 마땅히 토라를 지켜 행했다. 토라를 준행하는 성도들에게 사랑을 강론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불법을 행하는 자와 같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랑이 없으면 맹인이 되어 토라의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토라를 아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자들은 사망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해 있으므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를 미워한다면 살인자가 되고 생명은 생명으로 갚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영생이 아니라 사망이 있게 된다. 그러나 예슈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린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보고 만져보았다. 그러므로 예슈아처럼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다. (요일3:10~16)
5 믿음으로 순교하기도 하고 믿음으로 휴거하기도 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엑설런트한(양,수,질 에서 더 많은, 더 뛰어난, 더 위대한) 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예배로 아벨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아벨은 의로왔기 때문에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죽음으로 아벨의 예배가 위대했다는 것이 증명됐다. 과연 우리는 의로와질 만큼, 믿음으로 위대한(뛰어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그리고 에녹은 믿음으로 휴거되었다. 휴거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휴거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많다. 그렇다면 우린 에녹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에녹은 율법을 가르치는 자였다. 그렇다면 가르치진 못해도 최소한 토라를 지키면서 휴거를 소망해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믿음으로 순교하기도 하고 휴거되기도 하였다. (히11:4,5)
6 우린 두가지를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첫째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그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이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정말 우린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는가? 혹시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고통당할거라 믿지 않는가? 혹시 어둠이 다리를 걸어 죽이려고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오히려 사단의 비유를 잘 맞추면 그래도 적당히 잘 살거라고 믿지는 않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단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조정을 받지는 않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린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한다. 우리가 얼마나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선행을 100배로 갚아주실 것을 믿어야 돌파할 수 있고 용맹하게 전쟁할 수 있다.(히11:6)
7 약속의 땅에서 이방인처럼 산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사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면서 아버지와 조카를 데리고 출발했으며 약속하신 땅에서 살면서도 자신도 자녀도 그 자녀까지 외국인처럼 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나그네처럼 사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예루살렘 성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히11:8~10)
8 하나님께서 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를 구하는 자들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믿음 안에서 죽었고 멀리서 언약이 성취될 것을 바라보았으며 설득되었고 수용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이고 순례자임을 고백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언약을 얼마나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며 사후에 이루어질 것을 수용하고 동의하고 있는가? 이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창조하시고 조성하시는 한 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여호와의 법도로 통치될 것이며 예슈아께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다.(히11:13,14)
9 발 붙일 만한 땅도 주시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에게 애굽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땅을 약속하셨지만, 생전에는 발 붙일 만한 땅도 얻지 못하고 후손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같은 약속을 하셨다. (행7:5)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사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에서 얻은 땅은 막벨라 매장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언약의 땅에 뭍히리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이었다.(창23:2~4)
10 믿음이 있으면 되돌아가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 아들이 결혼할 나이가 지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언약을 믿고 돌아가지 않았다.(히11:15) 하나님께서 고향 땅을 떠나게 하시고 언약의 땅을 주신다고 맹세하셨으므로 종에게 아들은 데려가지 말고 아내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만약 어떤 여자도 따라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종과 아브라함이 한 맹세는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이처럼 우린 믿음을 증명하는 여정을 살아가고 있다. 어쩔 때는 틀릴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일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선택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바라볼 뿐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결코 과거 우상 숭배하던 바벨론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단하고 언약에 굳게 붙어있기로 작정했다(창24:6~8)
11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더 나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고 가진게 없을 수도 있다. 이 땅에 막벨라 굴만한 땅만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매장지 조차 없을 수도 없다. 우리의 나그네 같은 가난한 삶은 하나님께 불명예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아들 예슈아께서 범죄자처럼 취급받고 조롱과 비난속에 죽었지만 그게 아버지께는 가장 큰 영광이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환영 받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거룩한 도시를 짓고 계시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받으시고 자랑스러워하신다. 초대 교회 때 순교하신 믿음의 사도들도 이러한 믿음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히11:16)
12 여호와께서 부활의 하나님이심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음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을까? 그는 이미 이삭을 통해 별과 같이, 모래와 같이 많은 민족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렇게 때문에 언약하신 하나님을 믿고 이삭을 드릴 수 있었다. 즉, 언약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죽은 자도 살리실 거라 믿고 드린 것이다. 이처럼 언약을 믿는다면 우린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언약궤에 들어가 있는 십계명은 헌법과 같은 최고의 언약이다. (히11:17~19)
13 믿음으로 축복하고 경배하고 아기를 알아본다
믿음으로 이삭은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다.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을 믿음으로 축복하고 경배했으며 요셉은 믿음으로 자신의 해골을 들고 출애굽해달라고 명령했다. 또한, 모세가 태어나자 아름다운 아기임을 보고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어기고 살리기로 결단했다. 이처럼 모든 성경은 믿음의 증거들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행하였고 그렇게 세상은 창조되고 역사가 되었다(히11:20~23)
14 수모를 받고 고난 받는 것이 더 큰 부요함이다
믿음으로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 불리는 것을 거절했다. 잠시 이땅에서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 당하는 것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보화들보다 메시아의(기름부움 받은 자) 수모를 받을 것이 더욱 값어치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보상하시는 여호와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드시 상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린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다르게 공의로 판단하시고 상주시는 분이다.(히11:24~26)
15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것처럼 참았다
모세는 절대 권력 파라오 왕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처럼 바라보고 인내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믿음의 눈을 들어 그분을 바라본다면 인내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히11:27)
16 믿음으로 절기를 지킨다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장자가 죽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유월절 예식을 시작하고 지켰다. 또한 믿음으로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다가 모두 멸망했다. 홍해를 건너기 위해 믿음이 필요한 거 처럼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도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있으니 절기를 안지켜도 되고 법에서 자유해져서 샤밧을 안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에 말씀을(하나님의 모든 명령,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생명을 다해 지키는 것이다.(히11:28,29)
17 성경은 모두 믿음으로 창조된 역사들이다
믿음으로 7일동안 여리고를 포위했더니 7일째에 무너졌다. 기생 라합은 외국인이었지만 여호와를 신뢰하고 정탐꾼을 평안하게 영접하여 믿음의 계보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계보를 이으신다. 또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고 의를 행하고 약속을 얻고 사자의 입을 막고 풀무불의 뜨거움도 차갑게하며 칼을 피하기도 하고 용맹하게 전쟁하기도하고 이기기도 했다. 이처럼 성경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창조된 역사들이다. (히11:30~34)
18 수전절도 믿음의 역사이다.
믿음으로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즉, 썪지 않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얻기 위해 자신을 고통에서 구해내지 않고 고문을 기꺼이 받으며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감옥에 들어가며 돌에 맞고 톱으로 켜지고 시험을 당하고 칼에 죽고 양과 염소 가죽을 입고 도망다니며 궁핍함과 환난과 학대를 받은 것은 마카비서에 나오는 순교자들 이야기에게 들을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며 풀려나기를 구하지 않았고 여호와의 법도(율법)가 영광을 받도록 자신의 생명을 드렸다.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법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가능하다. (히11:35~37)
19 자기 공의로 자기 생명만 건진다.
만약 어떤 나라가 하나님의 법도(토라)를 지키지 않음으로 범죄하여, 여호와께서 기근을 보내셔서 그 나라를 끊으려 한다면 그곳에 믿음의 사람 노아, 다니엘, 욥이 있다해도 자신의 공의로 자신만 살 수 있다. 혹은 사나운 짐승을 보내 그 땅을 황폐하게 할 때, 그곳에 그 세사람이 있을지라도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신들의 공의로 자신만 살고 땅은 황폐할 것이다. 또한, 칼이 그 땅에 임하여 사람과 짐승을 끊으려 할 때, 그 세사람이 있어도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신만 살거라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셨다. 이처럼 불법의 강도에 따라 다르게 심판하신다. 결국 자신의 믿음으로 자기 자신만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기 때문에 이 땅의 모든 보화보다 중요한 가치이다.(겔14:13~18)
20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전염병을 내리신다해도 자기 공의로 자기 생명만 건진다. 나의 공의로 자녀를 구원할 수 없다. 자녀들이 공의를 행해야 그들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이처럼 칼과 기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보내 우리의 불법을 다스리시는 이유는 그럼에도 남은 자가 있어 끌려 나오는 자녀들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여호와께서 왜 재앙을 내리셨는지 이유를 알게 되고 위로를 받을 거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혹시 내가 의로운 다니엘 같은데 삶에 환란이 온다면,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혹은, 우리가 범한 죄의 결과로 환란이 온 것이라면 회개하고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끝까지 남은 자가 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유없이 인생에 고난을 주는 분이 아니시다. 마침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에 합당한 자녀로 삼으실 것이다(겔14:19~23)
21 성도들에게 세상은 그렇게 값어치 있지 않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세상은 말씀을 포기할 만큼 값어치 있지 않다. 그래서 광야나 산, 동굴과 토굴로 도망다니면서도 말씀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에 따른 언약은 성취되지 못했다. 그저 믿음으로 후대에 성취될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가 없이는 성취하지 못하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은 과거에 성취를 시작하여 지금도 성취되고 있고 온 세대에 걸쳐 성도들이 함께 성취해낼 것이다. 모든 것이 성취되었을 때 예슈아께서 왕으로 약속에 땅에 오셔서 통치하실 것이다. 우리도 그 언약의 성취를 위해 지금 동참하고 있다. 내가 성취할 수 있는 언약의 부분이 있다니 멋지지 않은가? (히11:38~40)
22 우리가 없이는 온전하게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증거로 순교한 성도들이 다섯째 인을 뗄때 제단 아래에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공의로운 심판을 행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때 다른 형제들도 하나님께서 합당한 영광을 받으실 때 까지 즉,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성취되고 완성되기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은 우리가 얼마나 가치를 매기느냐에 달려있다. 당연히 생명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이것은 순교로 증명될 것이다. 순교의 수도 성취되고 완성된다. 이 또한 전 세대에 걸쳐 함께 완성해가는 것이다.(계6:9~11)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레올람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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