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전쟁기념관 가까이에 있는 박진전투전적비-전적비 기단이 클로버 모양을 하고 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후원하고 굴렁쇠배움터가 여는 <낙동강 습지 삶이야기 찾기> 다섯 번째 시간으로 '한국전쟁 아
픔을 담고 있는 낙동강 이야기' 라는 주제로 창녕군 남지 일대를 둘러봤습니다.
오늘 강의는 오종식 샘이 맡아 주었습니다.
간곳은 남지읍 고곡리에 있는 모은각과 선정비, 박진전쟁기념관이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은 북쪽과 남쪽 그리고 미군이 치열한 전투를 치룬 곳입니다.
낙동강 전투 당시 낙동강 둘레에 살던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는 <창녕이 겪은 6.25전쟁-창녕문화원 발행>을 참고해서 옮깁니다. 창녕이 겪은 6.25전쟁에서는 낙동강을 중심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군인들 중심에서 백성들 중심으로 쓴 책입니다. 이 책을 아이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아이들 눈높이에 맞도록 새롭게 만들어서 보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해서는 안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윤씨 부자 참나눔을 기리기 위해 창녕사람들이 세운 모은각(창녕군 남지읍 고곡리 252-7)
▶윤씨 부자 참나눔을 기리기 위해 창녕사람들이 세운 시혜비각(창녕군 남지읍 고곡리 252-7)
* 피란 중에도 공동체 나눔을 실천한 사람 윤씨 부자
-남지읍 고곡리 살구정에 가면 모은정이 있다. 앞에 <경인란세관정현부자시혜비>가 비각 안에 있다, 8월3일 피난길에 오른 남지사람들은 밀양 초동면 신호리 초동 수리조합저수지 제방에 도착한다.
8월8일 해질 무렵 이미 수천명의 피란민이 재방을 덮어 이들은 모두 풀 섶에 앉고 누워 밤을 맞이했다. 손씨가 이곳에서 만난 사람은 윤 정현(당시44세)이다. 6척의 큰 키에 건장한 40대 농부가 산더미 같은 보리짚 더미 앞에 서서 피란민들을 불러 모아 땅바닥에 깔보리 짚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윤씨는 이틀째 피란민에게 보리짚을 나눠 주고 있었다, 방에 비가 내리자 피람민을 10여가구에 분산시켜 비를 피하도록 했다. 노인과 어린이들을 위해 죽을 쑤어 주었다. 10일이 지나자 피란민들도 양식이 떨어졌다.
윤 씨는 창고를 영어 보리를 찧어 보리쌀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고, 땔감 소금, 된장까지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피란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 갚겠다고 했다.
10월까지 피란을 하고 있었으니 윤씨도 가진 식량이 다 떨어졌고 된장마저 다 떨어져 소금으로 반찬을 대신하기도 했다. 윤씨 가족도 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본 피란민들의 감동은 말 할 수 없었다. 1956년 11월 윤씨를 위한 위로연을 갖기도 하고 윤 씨의 선덕을 기억하는 주민들에게 모여 달라는 유인물을 군내 각 마을에 돌렸다, 6개 읍면 약 300여명이 참석하여 사은 행사를 했다. 헌시가 200여편 사은문이 10편이었다.
사은 행사를 하기전에 윤씨를 찾아 곡식과 돈을 전달하고자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 기회에 모은계를 조직하여 윤 씨의 정신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살구정에 1973년 12월 은혜를 사모한다는 모은각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시혜비를 세워 매년 그를 기리고 있다.
이런 일은 전국에서 처음 있었던 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에 널리 보도 되었고, 보은계 활동상황과 계원 명단을 기록한 창선록을 발간하였다. <윤씨부자세관정현병인란시혜비>에 새긴 글은 다음과 같다. 난리에 먹을 것이 없으니 어떻게 살소냐, 시든 얼굴들 허등지둥 하는 사람이 수백명이로다 아버님 말씀이 이를 구원하라 하시기에 아드님이 이를 행하여 두 달이 경과하니 가산이 다 기울어졌도다 이가 은혜가 된지라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않으리오 하여 비를 마련하여 천억대를 길이 보이노라. |
▶남지읍 칠현마을에 있는 선정비 두 개.
▶박진전투전적비-박진전쟁기념관 옆 삼에 있다.
▶박진전쟁기념관. 전쟁을 기념 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기념해야 된다는 지적이 있다.
**박진을 중심으로 낙동강 전투에 얽힌 이야기 중에 많이 알려져 있는 이야기 두 개를 <창녕이 겪은 6.25 전쟁>이라는 책에서 참고한 글을 옮깁니다.
*영화 ‘퓨리’ 주인공 어니스트 코마 중사 이야기
-전차 한 대로 적 500명을 물리친 "어니스트 코마"상사는 '낙동강 전투의 영웅'이다.1950년 8월31일 밤, 그는 부하 4명과 함께 전차 안에서 물밀 듯이 몰려오는 북한군을 맞아 9시간 동안 싸웠다.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너는 적에게 포를 발사하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포탄과 총탄이 떨어지자 수류탄을 던지며 사투를 벌였고 전차위로 올라온 적군을 포탑과 포신으로 돌려치며 떨어뜨렸다. 철야 전투 후 정신을 차려보니 적군 시체 250여 구가 널려 있었다. 그 날 낮에 아군의 도움으로 살아 올 수 있었다. 어니스트 코우마는 중사에서 상사로 특진 되었고, 미군에 주는 최고의 훈장인 매달오브아너 받았다. 전쟁 영웅으로 초고 대우을 받았다.
1950년 8월 31일밤 코마 중사가 2사단 72전차대대 A중대 M-26전차장으로 장갑자를 끌고 사단의 최측방인 9연대 A중대지역을 순찰 중이었는데, 20시가 되자 당 주변에 안개가 심하게 끼기 시작했고, 22시가 되자 적의 박격포탄이 강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22시 15분이 되자 포격이 연달아 아군진지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군은 적의 포사격에 대응해 대표사격을 했다. 당시 참호 속에 있던 보병들은 강에서 첨벙거리는 소리 등 여러 소음을 들었다, 22시 30분이 되자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고, 코마 중사는 바로 정면에서 부교를 놓고 있는 북한군을 발견했다. 2차 도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23시 경에는 북한군과 아군 A중대 보병간의 교전이 붙었고 아군보병은 후퇴를 시작했다.
8월 31일 밤 11시 30분에는 인민군 4개 사단이 총 공격을 시작하여 미제2사단 정면 4개소에서 도하를 감행하여 방어정면 10km,종심 13km까지 돌파하고 진줄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군 진지는 남지,장마,영산의 남부와 계성, 창녕,유어, 대합,대지의 북부로 두 동강이 나서 2개 지구로 분단되고 8월 공세 때 초점이었던 클로버 고지의 대봉리의 여러 고지도 다시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만큼 창녕의 운명이 급박했다. 인민군이 현풍 도하를 감행할 때 인민군 제10사단은 움직이 않았다. 이 10사단이 공격을 감행했다면 좌측 지역인 대합, 이방의 미군 진지는 완전 괴멸되었을 것이다.
북한군 3개 사단이 남지에 도하하여 장마로 진출하면서부터 미 2사단 진지가 양분되자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미해병여단의 사용이 필요함을 통감하고 동경에 있는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장군에거 보고하여 재재 돌출부에 병력을 투입하게 하였다. *.전쟁이 남긴 상처들 -전쟁이 끝나고도 논밭에 매설하여 놓은 지뢰를 터트려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한 때는 목발, 짚은 사람, 눈이 없는 사람, 손이 없는 사람 등의 불구자가 많았다, 전선과 탄피가 많이 쌓여 수거하여 팔기도 했다. 그 두이 정부에서 수거해 갔다. 군인들의 시체가 부패한 곳은 몇 년간 농사가 되지 않았다, 비료기가 많아 가을 수확기까지 벼가 자라기만 하고 결실을 하지 않다가 가을 서리를 맞으면 그대로 말라버렸다. -늑대가 많아졌다, 늑대가 많아져 어린 아이가 등 인명피해가 생겨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군 병력을 동원하여 늑대 소탕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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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읍 농협 마트 옆에 있는 졸가시 나무. 일제 강점기에 심은 나무다, 우리나라에서 볼수 있는 졸가시나무 중에 가장
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