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영화사4. /이영표
제2기(1930~40년)
세계적인 고양기
1) 승승장구하는 미국영화
무성영화의 역사는 1929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해 미국에 있어서 대공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공황은 미국의 영화기업을 도산의 위기에 몰아넣었지만 1927년 워너브라더스 회사의 최초의 토키 [재즈 싱어]가 히트하고 파산 직전의 회사를 구출, 각 회사가 일제히 토키로 전환하여 1929년부터 미국은 토키 시대로 들어갔다. 그 대신 토키 장치를 독점하고 있던 W.E(웨스턴 엘렉 회사)와 R.C.A(라디오 코프레이션 오브 아메리카)를 통하여 미국 영화기업은 월가의 은행자본, 록펠러와 몰간의 손에 쥐어졌다. 토키도 한때 영화를 연극으로 접근시켰지만 곧 토키 시대의 영화적 수법이 확립되어 말을 갖게 된 영화는 사상적으로도 한층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대공황 말기에 이미 문학, 연극에서 해방된 영화는 이번에는 반대로 문학, 연극의 역역까지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1920년대에 영화사상 가장 큰 고양기가 찾아왔다. 우선 미국에는 1929년의 공황으로 영구 번영의 꿈이 사라지고 32년 다시 심각한 금융공황이 엄습하여 미국 국민의 낙천주의를 봉쇄해버렸다.
1932년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자 미국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뉴딜이라고 불리는 정책을 썼다. 이것은 미국의 노동자나 농민의 이익으로 어느 정도 옹호하고 그들의 불만을 막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 아스킨 골드웰의 『타바코 로드』 등의 소설이 나왔다. 이러한 비판적 경향은 영화에도 나타나 20년대의 [행복한 결말]은 죽음과 절망으로 바뀌었다. 20년대의 갱영화와 40년대의 스릴러가 그것이다.
2) 갱영화와 스릴러
미국을 음침한 갱 왕국으로 그린 것으로는 마빈 루로이의 [범죄왕 리코](1920), 또 그의 [밤의 간호원], 루벤 마무리안의 [시가], 루이스 마일스톤의 [범죄 도시], 로버트 브라운의 [벼락부자], 하워드 혹스의 [암흑가의 얼굴](1932), 존 포드의 [나는 선인이다], 마이켈 커티스의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1938) 등이 있다. 이들 영화는 주로 미국의 악이 갱에 있는 것같이 그렸다.
3)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한편 찰리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1936)에서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된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를 풍자하였다. 이 영화는 카네기의 “일하고, 그것도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행복하다”라는 미국식 사고방식을 비난한 것이었다.
채플린은 다음에 파시즘을 풍자한 희극 [독재자](1940)를 제작하였다. 모델은 나치의 총통 히틀러였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독재자]는 미국이 낳은 최고의 영화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최대의 풍자 예술이 되었다.
미국 영화는 이 무렵 많은 걸작들을 만들었는데 프랑크 카프라의 풍자적 작품 [오페라 핫트], [우리 집의 낙원], [군중] 등이다. 또 월트 디즈니의 단편 만화 영화 [미키의 이동 별장]이나 [거위와 로봇] 등과 같은 작품들이 나타났다.
4) 변혁에의 관심
이즈음 세계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한때의 평화도 막바지였고 스페인에서는 내란이 일어나고,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였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였고, 독일은 다시 재군비를 선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검은 구름은 세계를 덮고 있었다. 이 위기감은 1920년대의 세계의 영화에도 반영되어 현실의식을 강하게 하였다.
미국 국민이 스페인내란에 관심을 갖고 공화정부에 동정하여 프랑코 및 그것을 원조하는 독일, 이탈리아를 증오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지식인이 스페인내란에 참가하고 총을 들고 반혁명 세력과 싸웠다.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그 하나였다. 그의 스페인내란을 취재하여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고, 이 작품은 샘 웃드에 의해 영화화되었다(1944). 그리고 윌리엄 데이터레도 이 내란을 취급한 영화 [붕쇄]를 감독하였다.
미국 국민은 스페인 외에도 중국과 기타 피압박 민족에 동정을 보였다. 펄 벅의 소설 『대지』가 1937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미국의 배우 폴 무니와 루이제 라이너가 공연하고 있지만 중국 농민을, 처음으로 같은 인간애로서 그린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였다.
미국 국민의 휴머니즘은 전기 영화에도 나타났다. 인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 생애를 바친 파스루나 에릿히의 전기 [과학자의 길](1936), [위인 에릿히 박사](1940)가 그것이다. 감독 월리엄 테이타레는 드레피스 사건으로 사회 정의를 위해서 싸운 프랑스의 작가 에밀 졸라의 전기 [졸라의 생애](1939)를 만들었고, 존 크롬웰은 미국 데모크라시 확립을 위해서 싸운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 [에이브 링컨]을 제작하였다.
5) 토키는 색채를 낳았다
토키는 영화의 색채를 다양하게 만들기도 했다. 음과 색에 의한 혁명의 가장 눈부신 성과는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였다. 디즈니는 1928년 처음으로 만화에 소리를 넣었다. [증기선 위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색채를 넣었다. 시리 신포니의 이름을 붙인 일련의 단편 [숲과 아침], [세 마리의 돼지]. [토끼와 거북이]가 그것이다. 계속해서 그는 세계최초의 색채 장편 만화 [백설공주](1938)를 완성하여 이후 매년 만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피노키오], [판타지], [밤비] 등이 그것이다.
6) 프랑스 영화의 깊이
영화의 발전은 미국에서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도 또 이 연대에 걸작을 낳았다. 르네 클레르는 [파리의 지붕 밑](1930), [파리제], [르 미리온](1931), [자유를 우리들에게](1933), [최후의 억만장자](1934), [유령 서쪽으로 가다](1935)를 감독하였고, 자크 페데는 [외인부대](1933), [미모 사관](1935), [여자만의 도시]를 감독하였다.
또 장 르노아르는 [밑바닥](1936), [큰 환영](1937), [라 마르세비에스](1938)를 감독하였다. 줄리앙 듀비비에는 [자본가 골다](1931), [상선 데이나시치](1934), [골고다의 언덕](1935), [우리들의 동료](1936), [망향], [최후의 무도회](1937), [미로의 끝](1939) 등을 감독하는 등 가장 정력적으로 활약하였다.
이들 작품의 대부분은 세계 영화사상의 걸작으로서 기억되는 것들이지만 특히 크레르의 [최후의 억만장자], 페데의 [여자만의 도시], 르노아르의 [밑바닥]은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들의 영화도 당시 국제적인 위기 상황을 그린 것들이었다. 유럽의 파시즘을 풍자한 [최후의 억만장자], 스페인내란과 파시즘의 침략의 위협을 풍자한 [여자만의 도시], 평화의 위기와 전쟁의 무의미를 나타낸 [큰 환영] 등은 토키 시대 영화 사상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들이었다.
7) 나치 통치하의 걸작들
이즈음 독일에서 활약한 G.W. 파프스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는 반전영화 [서부전선 1918년](1930)을 만들었다. 이외에 프랑스에서 제작한 [돈키호테](1933)에서 전성기를 보였지만 곧 히틀러에 의해서 추방되었다. 또 레온틴 사간의 걸작 [제복의 처녀](1931)가 개봉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제복의 처녀]는 양친을 여읜 16세 소녀의 여선생님에 대한 사랑을 그린, 최초의 메인스트림 레즈비언 영화이다. 아래는 [제복의 처녀]의 포스터.
이외에 에리크 샤베루의 [춤추는 회의](1931), 폴 신나의 [꿈꾸는 입술](1932)이 우수했지만 나치의 지배로 급속도로 독일 영화도 쇠퇴하고, 겨우 [미완성 교향악](1933)의 빌리 포르스트가 활약한 정도였다.
또한 히틀러 치하의 유일한 걸작으로는 레니 리펜슈탈의 장편 기록영화 [올림피아/민족의 제전](1938)이 있었다. 이것은 나치의 의도와는 반대로 올림픽 그 자체의 평화적 의도와 인류 융화의 광경을 기록하고, 전쟁의 공황에 위협받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평화의 귀중함을 가르쳤다.
8) 영국의 다큐멘터리 운동
영국은 전후 미국 영화에 눌려 있었지만, 30년대 정부의 원조로 기록영화가 발전하여 존 그리어슨의 [유망선](1939)을 비롯하여 많은 걸작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그리어슨의 [공업국 영국](1933), [석탄의 얼굴](1935), 베이질라트의 [발바도스의 풍자집](1932), 아서 엘톤의 [주택문제](1935), [항공우편](1935), 폴 로자의 [영국의 얼굴](1935), [조선소], 에드가 안스테이의 [6시 반 소식] 등이 있다. 이 기록영화운동은 후의 영국 극영화에 영향을 주어 그 역할은 프랑스의 전위영화 운동과 비교되게 된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 [암살자의 집](1933), [서른아홉의 밤](1935), [간첩 최후의 날](1936)은 그 일례이다. 히치콕의 영화의 풍부한 실경 사물의 대사, 그의 교묘한 몽타주는 영국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그 원류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