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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킷브레이커
김 만 성
24인치 모니터 4개가 깜박거린다. 뉴스창이 가장 먼저 헤드라인을 쏟아낸다. 코스피 200지수 차트가 빨간색으로 봉을 만든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신다. 스스로 긴장하고 있다고 느끼면 이미 진 것과 다름없다. 어떤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담담해야 한다. 최대한 부드러운 눈초리로 모니터를 본다. 등가격에서 외가격으로 살짝 기운 풋옵션 12월 227.50물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뜬다. 1계약 당 1.80의 호가다. 사자 1.79 팔자 1.80. 호가마다 1000계약이 넘게 잔고가 쌓인다. 주문이 들고 나는 계약수도 최소 30계약 이상이다. 18만 원 선이면……,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킨다. 가격이 너무 세다. 적어도 30%이상은 떨어져야 한다. 1.26선까지 기다리기로 시나리오를 변경한다. 1.26이면 준비된 3억으로 2380 계약 정도를 매수할 수 있다. 최소 500%에서 많게는 1200%까지 내다 볼 수 있으니 최소만 달성하더라도 15억이다. 모든 것이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시장은 여전히 도지형 차트를 만들면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위 꼬리와 아래꼬리가 한없이 길어진다. 무수히 많은 눈들이 붉은 빛을 뿌리며 잽을 던지는 모양이다. 장 시작 후 10분이 경과하면 그날의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데 역시나 쿼트러플위칭데이답게 쉽게 예측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모양새다.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가 삼킨다. 물이 얹히지 않는다. 조짐이 나쁘지 않다.
의자를 힘껏 뒤로 젖혀 눈을 감는다. 시장이 글로벌 불확실성 때문에 상승에 저항을 받고 있지만 연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연말랠리까지는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오늘은 특별히 내릴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연말 배당을 앞둔 기관의 윈도우드레스효과까지 감안하면 지수가 오를 수도 있다. 지수가 오르면 풋옵션은 1.26까지는 충분히 내려올 것이다. 그 시간이면 정오가 되지 않을까.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심박동이 빨라진다. 투자자인 박 여사와 홍 사장 얼굴이 모니터에 사납게 떠올랐다 사라진다. 입술을 혀로 한번 적신다. 입술이 바싹 말라서 혀가 따갑다. 눈도 침침하고 뻑뻑하다. 눈을 한참 동안 감았다가 뜬다. 자세를 바꿔 엄지손가락 두 개를 모아 턱을 괸다. 시계가 있을 리 없는데 어디선가 초침 소리가 들리고 쇳소리까지 겹친다. 김범준? 귓속을 손가락으로 후벼 파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김범준 씨 되시죠? D신용회삽니다. 제가 왜 전화한지 아시죠?”
첫 직장은 채권추심업체였다.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책만큼이나 두꺼운 리스트를 보며 하루 종일 전화를 하는 것이 일과였다. 거리로 나서면 모두가 돈을 떼먹고 갚지 않는 도둑놈들처럼 보였다. 습관적으로 과정보고를 위해 전화를 돌리던 퇴근 무렵에 연결된 김범준도 내게는 도둑놈이었다. 금액도 2억이 넘었다. 신기한 것은 보통 이 정도의 금액이면 전화가 정지되거나 틀린 번호일 확률이 높았다. 김범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감정 없는 톤으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신입사원 때부터 수없이 연습한 톤이라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내일 입금할 테니 그리 아시오.”
내가 뭐라고 답변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뭐랄까. 수없이 연습한 내 목소리 톤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차갑고, 무감각한 목소리였다. 약간 쇳소리가 나는 가성이었다. 오싹 소름까지 끼쳤다. 나는 내가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2억이라는 돈을 바로 내일 갚는다니 그것은 지금 당장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거절의 메시지였다. 나는 쌍욕을 내뱉고는 오기가 발동하는 것을 억누르며 상대가 전화 받기를 기다렸다. 신호가 다섯 번쯤 울렸을 때 수화기를 드는 기척이 들렸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더 낮은 저음으로 목소리를 퉁겨냈다.
“씨팔, 당신 지금 장난하는 거야? 내일 2억 원 입금 못하면 그땐 어쩔래?”
바로 반말로 내리깔았다. 법 테두리 안에서 채권을 회수하는 것이 원칙임을 알지만 이미 세상에서 한방 나가떨어진 사람들이 호락호락 제 발로 빚을 갚겠다는 일은 드물었다. 나는 악성채권을 전담하는 부서에서 결국 세상을 악하게 보는 법을 먼저 배웠다. 악을 이기는 법은 더 악해지는 것밖에 없었다. 좋은 말보다는 험한 말이 효과가 있었고, 은근한 협박과 무력행사도 실적을 올리는 수단이었다. 채권자 인적사항에 김범준은 45세라고 적혀있는 나이를 이용했다. 나이 많은 사람은 나이어린 공격수에게 기습을 당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 담배 피는 학생들에게 어른이 아무 말 못하는 세대를 한탄하기도 하지만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새카맣게 어린놈이 눈을 부릅뜨고 어른에게 반말로 대드는 경우, 정상인이라면 반은 돌아버린다. 자존심이 극에 달해 없던 돈도 나오는 게 여러 번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가진 것이 없는 군상들이 자존심은 더 셌다. 선배들이 만든 채권추심법칙 제1번에 나온 구절이었다. 나는 이 법칙을 적절하게 구사했다.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효과는 배가 되었다. 에미, 에비도 없냐는 게 그들의 유일한 항변이었다. 씨팔, 듣기 싫으면 돈을 갚든가, 라고 한마디 내뱉고 불량스럽게 침을 찍, 내뱉으면 해결되는 경우도 적잖았다. 이 사람도 다름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너, 사람 잘못 골랐다. 지금 이말 녹음 되었고, 내일 내가 돈 갚으면 니놈 모가지는 반드시 떼겠다.”
순간, 움찔했다. 녹음이란 단어가 화살촉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몇 번 제법 영리한 빚쟁이들이 소형녹음기로 녹음을 해 항의한 적이 있었다. 곤욕스럽긴 했지만 결국 그들이 빚을 갚지 못하는 한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녹음이었다. 그래도 녹음이란 단어는 섬뜩했다. 어쩌면 그라인더에 쇠가 갈리는 듯한 놈의 금속성 쇳소리가 파편처럼 신경을 건드린 건지도 몰랐다.
이번에도 자기 말만하고 전화를 끊었다. 녹음이란 단어가 맘에 걸리기는 했지만 놈이 정말로 아무런 대화도 하고 싶지 않는 거라고 치부했다. 퇴근길에 찝찝한 마음이 달라붙는 것이 싫어 소주를 한 병 마셨다. 그렇고 그런 못난 빚쟁이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털어버렸다.
문제는 다음날 터졌다. 팀장의 조회가 끝나고 업무가 시작되려는 9시 즈음이었다. 나는 인스턴트커피를 한잔 타 와서 자리에 앉아 오전에 전화할 목록을 눈으로 훑었다. 김범준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미친놈, 이라고 혼자 콧방귀를 뀌었다.
“나 김범준인데, 어젯밤 내게 전화한 놈이 누구야?”
출입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은 나는 쇳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그라인더에 쇠를 가는 그 소리, 어젯밤 그 놈이었다. 이번에는 그라인더로 날카롭게 갈린 송곳이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고 감지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보기 드문 중절모를 쓰고 윤기가 흐르는 양복을 입은 중키의 신사가 서 있었다. 짝 다리를 짚고 사무실을 쓰윽 둘러보는 눈길과 마주쳤다. 놈도 나도 그 시선에서 이미 승부가 갈렸음을 알아챘다. 놈은 정말 2억 원을 들고 내 목을 자르려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예감은 어디서 왔을까. 눈빛,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중절모 아래서 빛나는 눈빛은 여명의 부챗살처럼 강렬한 자기장을 발산하며 나를 향해 귀기를 쏘아댔다. 내가 어제 말했지? 네놈 목을 자른다고…….
“이 놈 목을 자른다면 내가 오늘 2억을 갚지요.”
쇳소리가 팀장에게 말했다. 허둥대는 나를 끌고 팀장 앞에서 볼펜모양의 녹음기를 꺼내더니 어제 내 목소리를 재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시위를 떠난 화살은 여지없이 내 목에 꽂혔다. 팀장은 웃는 것도 같고, 일그러진 것도 같은 애매한 표정으로 그저 허허하고 웃다가 그를 VIP실로 데리고 갔다. 잠시 후 팀장이 나와서 무조건 들어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고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언론에 저 녹음이 나가면 우리는 끝장이라고 입에서 침을 튀기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얼굴에서 피가 흐를 것 같이 새빨개진 팀장의 얼굴을 보며 나는 VIP실로 들어갔다. 악이 더 큰 악으로 제압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굴함과 연민도 필사적으로 드러내면 어떤 것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채권추심을 하면서 배웠다.
빚쟁이들 중에는 제법 순수한 인간들도 가끔은 있었다. 인생의 느닷없는 변화구를 맞아 빚쟁이가 되고, 채권추심업체의 독촉을 받는 처지에 있었지만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꽤 됐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일단 내 입장에서 보면 가여웠다. 정말 운이 없는 경우이기도 했고, 때론 영악하지 못해서 빚을 짊어진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이들은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반드시 빚을 갚을 테니 시간을 달라고……. 대개 그런 치들은 빚을 갚았다.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사는 방법이 정해진 규칙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한편으론 그렇게 사는 게 답인 사람들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조건 그치들처럼 필사적으로 잘못했으니 선처해 달라는 비굴할 정도의 구걸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VIP문을 열자말자 놈의 바짓가랑이부터 붙잡았다.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한번 그 말이 터지자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설움이 몰려왔다. 눈물의 저수지가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저절로 눈물이 솟구쳤다.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살려달라는지 밑도 끝도 없이 반복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바짓가랑이가 눈물로 범벅이 되자 놈이 발을 털어내며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다 한 번의 실수는 있는 법이지. 보통사람들 피 빨아 먹지 말그라.”
쇳소리는 여전했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살았음을 느꼈다. 그 순간 팀장의 새빨개진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 번 눈물을 닦지 않고 말했다. 최대한 높은 톤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에는 정말 죽어도 잊지 않겠다는 그 말이 진심에서 우러났다. 살다보면 인연이라 여겨지는 만남이 있다. 나는 그날 제대로 임자를 만났고, 삶의 수레바퀴가 커다랗게 궤적을 그리며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 달에 나는 채권추심 최우수직원으로 뽑혀 사장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가 어떻게 2억을 빚졌고 또 어떻게 그렇게 단박에 2억을 갚았을까, 라는 호기심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채무자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 내 삶을 흔들었다. 세상은 빚진 자와 빚 받을 자로 간단하게 나누어버린 내 인간관이 흔들렸다. 그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다.
9시 30분이 되자 호가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괴었던 턱을 풀고 자동으로 재빠르게 마우스를 잡는다. 정지 상태였던 화살표모양의 커서가 화들짝 놀라며 요동을 친다. 스탑오더 주문 창에 100이라는 단위를 세팅한다. 호가가 1.26까지 내려온다면 마우스의 왼쪽을 살짝만 눌러도 1260만원의 풋옵션이 바로 매수된다. 편두통이 재발한다. 1.50까지 내려온 호가는 한 두 계약만으로 깜박거리며 거래가 체결될 뿐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다. 나는 모니터의 우측상단에 감시카메라처럼 자리를 잡고 깜박거리는 표준시계창을 본다. 9시31분 21초! 한번 잽을 넣어볼만한 시간이다. 한 두 계약을 가지고 소위 피라미들이 시장을 저울질하고 있다. 마우스를 쥐었던 손에 들어갔던 힘을 뺀다. 나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마우스에서 손을 떼어 턱을 괸다. 커서가 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조는 모드로 돌아간다.
뒷목덜미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방음장치를 한 사무실은 명멸하는 호가 창의 움직임만이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탁, 탁, 내리치는 내 손 주먹 소리만 커진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시간 모니터를 보며 배팅할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을까. 작은 모니터 안은 적막과 달리 충혈 된 수많은 눈이 주시하고 있는 전장과 다름없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약봉지를 본다. 이겨내자! 다시 한 번 입술을 혀로 적신다. 여전히 혀가 아프다. 생수병을 들어 물 한 모금 마신다.
*
김범준은 주식시장의 재야고수였다. 주식시장과 재야고수라는 말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소위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몇몇 사람들이 모인 곳이 주식시장이라고만 인식하던 때, 초야에 묻혀 사는 가공할 무술을 갖춘 인물정도로 해석하고 보니 주식시장이 무슨 무협의 세계도 아니고 어떻게 고수가 존재하는가 싶었다. 달리 생각하면, 내가 근무하는 채권추심업계도 고수가 있었다. 나 역시 고수라 불리는 전설적인 선배들에게서 채권추심의 방법을 배우지 않았던가.
나는 삼고초려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서 재야고수의 원칙을 사사 받기를 원했다. 말하자면 그의 수제자가 되고 싶었다. 그도 나에게서 어떤 싹수를 보았을까. 차트 하나만을 보고 선물·옵션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나를 칭찬했다. 나는 그가 제시한 아주 단순한 원칙을 가장 잘 실행했고 실패할 확률도 거의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그와 함께 숙식을 함께하며 M투자자문사를 차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10여년의 실패 끝에 나름의 투자원칙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의 투자원칙은 2억의 빚을 단박에 갚고도 투자자금으로 4억을 마련한 성과로서 증명되었다. 그 10년 동안 가족도, 친구도 모두 떠났다. 말을 하지 않아서 목소리가 쇳소리로 변했다고 했다. 철저히 자기를 고립시키고, 골방에 들어앉아 그가 싸운 시장은 고요한 폭풍전야의 바다 같았다.
“첫째도 욕심, 둘째도 욕심, 마지막도 욕심이다. 욕심을 버리면 얻을 수 있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원칙이야.”
스승의 원칙은 하루 5%의 수익이었다. 장 시작과 함께 그날의 코스피지수가 변화를 끝내고 안정을 취하는 순간부터 매매는 시작되었다. 대개는 30분정도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9시30분이면 전날과 당일에 시장을 좌우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반영되었다. 상승일지 하락일지 아니면 힘겨루기일지 9시30분이면 대개 결판이 났다. 그리고는 지루한 상승과 하락의 반복을 오후 3시까지 이어갔다.
스승은 지루한 반복 장에서 약간의 틈새를 공략했다. 콜과 풋의 호가 사이에서 수수료 0.1%를 제하고 1틱이나 2틱 정도의 수익만을 취했다. 대개 1천원에서 2천원 사이의 작은 수익이었지만 500번에서 1000번의 매매가 발생하는 순간 수익이 쌓여 하루 5%의 수익은 무리 없이 달성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작은 변화가 스승에겐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는 틈새시장이 되었다.
선물·옵션은 미래 주식시장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 때문에 도입된 파생시장이었지만 한국의 높은 아이티기술과 참여자들의 투기성 때문에 위험을 헤지하고 시장의 예측력을 높인다는 기능을 뒤로하고 꼬리가 머리통을 흔드는 ‘웩더독’ 현상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한국시장은 꼬리인 선물·옵션이 머리통인 현물시장을 좌우했다. 외국인들은 높은 정보력과 단합된 방향성으로 선물·옵션의 강자로 군림했다.
기관들은 때론 외국인에 편승하기도 했지만 주로 현물투자의 위험을 헤지하기 위해 이 시장에 참여했다. 문제는 개인이었다. 개인은 헤지도, 예측도 필요 없는 불나방이었다. 시쳇말로 한방에 훅 가거나 한방에 큰돈을 쥐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제로섬게임의 잔혹한 면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날마다 불에 그슬어 죽는 개미들이 속출했지만 자고 일어나면 얼마의 돈을 마련해서 또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그나마 선물은 기본예탁금이 1500만원이 있어야 가능한 시장이라 개미들의 참여가 제한되었지만 옵션은 달랐다. 몇 십만 원부터 몇 백만 원에 이르는 푼돈들이 모여 각축을 벌였고 결국엔 그게 쌓여 스승처럼 억 단위의 빚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M투자자문사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자 스승은 나에게 원칙 하나를 더 보태주었다.
“통제할 수 없으면 피해라. 세상을 움직일 정보를 스스로 쥐고 있지 않으면 내일은 아무도 알 수 없지. 예측하려 하지 말고 무조건 피해라. 그래서 하나의 원칙을 더하마. 오버나이트는 죽음이다.”
오버나이트는 포지션을 취하고 하루를 넘기는 전략이다. 예측이 맞는다면 20~30%수익은 금방 실현되었다. 그러나 예측이 틀리다면 그만큼의 손실도 감수해야 했다. 나는 오버나이트를 감행하자는 쪽이었다. 하루정도를 예측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문가가 아니다, 라는 게 내 관점이었다. 당일 내내 외국인과 기관의 흐름을 파악하고, 포지션을 읽으면 하루정도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고, 그간의 경험으로도 맞는 확률이 80%이상이었다. 스승은 단 1%라도 통제할 수 없으면 어느 날 욕심이 한방을 유혹할 것이고, 조금씩 쌓아온 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10년간 모든 것을 잃었던 사람이기에 어쩌면 그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수익 앞에서 그 말을 거역하기란 힘들었다.
내게도 점점 더 고객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맡겨진 회사 자산에 대한 수익률체크는 철저했다. 시스템을 만들어 매니저가 홀로 단독 행동하는 것을 금지했다. 고객들은 처음 약속한대로 하루 5%대로 수익을 쌓아가는 M투자자문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 중심에서 나 역시 신뢰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6개월이 지나자 새벽2시까지 해외시장을 체크하고, 6시에 일어나 해외시장의 결과와 당일 매매전략을 짜는 반복된 행위가 서서히 싫증나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일과 후에 술도 한잔 하고 적당히 소비하고 싶은 욕망이 나를 부추겼다. 모든 고객들의 1차 상담은 스승의 몫이었지만 스승의 눈을 피해 몇몇의 고객들과 별도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만들었다. A구좌를 만들고 철저히 운용수익의 10%만을 성과급으로 받아가던 원칙을 무너뜨렸다. 고객과도 별도의 라인을 통해 실시간 리딩을 시도했다. 균열은 작은 곳에서 시작되었지만 서서히, 그러나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으로 나를 무너뜨렸다.
“오늘부터 박 이사는 운용에서 손떼라.”
내 외도를 눈치 챈 스승의 극약처방이었다. 처음 스승을 만났을 때처럼 바로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면 어땠을까를 잠깐 생각해본다. 나란 인간의 뇌구조는 그러나 그런 구차함이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원칙을 알고 있는데 언제라도 되돌아 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나는 어깃장을 놓았다.
“떠나겠습니다. 이제 스승님의 그늘을 벗어나 내 길을 개척하고 싶습니다.”
“내가 미리 갔던 길을 그렇게도 가고 싶으냐?”
“알고 있으니 그리 가지는 않을 겁니다.”
“욕심이다. 욕심을 갖는 순간 고요한 모니터 안의 세상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세상이 될 것이야.”
“욕심이 좀 더 큰 세상을 알게 할 수도 있잖습니까. 욕심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판에서 욕심은 곧 죽음이다.”
“그럼 죽겠습니다.”
나는 고집을 피웠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나는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스승에게 대들었다. 사실, 나는 절도 있는 삶이 싫었다. 계획된 룰대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 잡히는 삶이 싫었다. 그렇게 정해진 대로 가는 길이 삶이라면 얼마나 숨 막힐까. 정 안되면 스승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면 될 것이라고 마음 한 쪽에서 유혹했다.
“나는 내 방법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디 니 원칙을 찾기를 바란다만 지금 네 방법은 틀렸다. 원칙을 찾지 못한다면 빨리 원점으로 돌아와라. 기회는 얼마든지 다시 있을 것이다. 가라 이 놈!”
스승은 더 모질게 몰아치지는 않았다. 내게 M투자자문의 지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달랑 몸만 빠져나왔다. A구좌는 깡통이 되었고, 별도라인을 구축했던 고객들은 나를 고소했다. 스승이 원칙을 발견하기 위해 보냈던 10년을 나는 6개월 만에 그대로 답습했다. 다시 스승의 원칙으로 돌아가려했으나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덩이가 매일매일 무리수를 두게 했다. 오버나이트의 승률은 5할로 줄었고 하루 1000번의 매매를 하는 귀찮음은 스윙으로 변해 한방을 노렸다. 요행이 맞는 날은 하루에도 2-3배의 수익을 안겼지만 2-3배의 손실을 안는 날도 다반사였다. 폭음이 잦아졌고 규칙적인 생활은 문란해졌다. 시황을 읽지 못하니 당연히 무리한 투자가 계속 되었고 승률은 점점 낮아졌다.
쿼트러블위칭데이! 네 마녀가 과연 어떤 춤을 출 것인가.
눈치 보기 극심할 듯.
특별한 이슈가 없는 상황에서 무난한 만기 예상.
마녀는 심술을 좋아한다.
10시. 모니터 뉴스 공시 창에 각 언론사마다 경쟁하듯 소식을 쏟아낸다. 내가 타깃으로 잡은 227선에서 강보합과 약보합으로 오르내린다. 헤드라이만 보면 현재 호가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상태다. 미스리 메신저를 통해 검증되지 않는 정보도 질세라 팝업 창을 만들며 춤을 춘다. 조막손 세력부터 큰손까지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짠 대로 오늘 변화무쌍한 차트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들이 쏟아내는 정보가 오늘은 다 헛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미리 준비한 기사체형 ‘찌라시’ 자료를 다시 한 번 점검한다. 서킷브레이크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순식간에 주가가 요통을 치는 그 짧은 순간이 기회가 되어야 한다.
(루머·속보) 북한 특수공작팀으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들이 서울시 지하철의 주요 환승역에 폭탄설치, 특별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폭파하겠다는 협박문을 청와대에 보냈다고 함.
(속보) 신도림역과 영등포역에 폭발물 탐지견과 경찰 출동/사진첨부.
팍스넷, 씽크풀, 와우넷, 슈어넷, 솔론, ETomato, 다음, 네이버, 야후, 네이트, 파란까지 주요 종목정보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번도 세팅을 확인한다. 108명의 아이디를 준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익명이면서 실존하는 이들의 이름으로 동시에 정보를 뿌려야 먹히는 일이라 수고로움을 무릅썼다. 노숙자들을 상대로 한 명 한 명 주민번호를 얻으면서 나는 황홀한 추락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는 순간만을 그렸다. 꿈속에서도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히는 장대음봉이 자주 나타났다. 그런데 공교롭게 108명이라니……. 그저 최대한 많이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지 않은 익명의 사람을 확보하는 데만 신경을 썼는데 108이라는 숫자가 낯익다. 108번뇌와 108배가 동시에 떠오른다. 좋은 징조인가. 나쁜 징조인가. 그저 그런 징조인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의 쪼가리가 토막토막 오버랩 된다. 한번 재생된 기억은 스톱버튼이 고장 난 비디오처럼 돌아간다.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이라고 여겼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그동안 누구도 나에게 서킷브레이커를 작동하지 않았다. 장대음봉이 아닌 장대양봉의 서킷브레이커가 지금, 내 삶에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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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문 회사를 나와서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던 나는 여전히 재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처음부터 가진 것 없었으니 빈털터리가 되어도 손해 본 것은 없었다. 빚 독촉을 받았지만 최악의 경우엔 파산을 신청하면 그만이었다. 내게 책임은 없었다. 한판 멋지게 살다 가면 그만인 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구질구질하게 무슨 사명을 띤 양 절제하고, 아끼고, 통제하기 싫었다. 그것도 인생이고 내 것도 인생이라고 나는 여전히 독기를 창창히 내뿜었다. 누가 옳은 것인지는 무덤에 들어가 봐야 알 일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생활정보지에 투자자를 모집하는 광고였다. 억대를 투자할 수 있는 두 세 사람 정도면 족했다. 그 정도면 내 나름대로 한방을 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박 여사를 만났다.
박 여사는 주식 때문에 이혼까지 당한 여자였다. 사람을 상대하는 수완이 좋아서 카페를 운영해 현금흐름이 그래도 좋았다. 박 여사는 사람을 쉽게 믿었다. 그동안 증권사에 갖다 바친 돈이 수억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40대 후반인 박 여사의 수완이라면 굳이 주식투자를 하지 않더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능력 있는 여자로 보였다. 가끔씩 들린 그녀의 카페는 언제나 손님들로 넘쳤고, 아르바이트생이나 종업원이 그녀에게 몇 번의 교육만 받으면 나긋나긋한 서비스우먼이 되었다. 박 여사는 돈에 굶주린 사람들을 자동으로 잉태하는 커다란 자궁과 같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늘 돈에 배고픈 인간들을 잘도 낳았다. 한번 태어난 박 여사 같은 이들은 투자라는 달콤한 환상에 중독된 채로 불나방처럼 고요한 모니터의 세상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그 불나방이었다. 다만 불이 뜨겁다는 것을 잘 알고, 잘못하면 날개가 타고 몸이 타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 운명일진데 불을 피해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기꺼이 불나방으로 나는 살기로 결심했다. 박 여사는 그래서 어쩌면 나와 운명처럼 엮인 인연이었다. 박 여사 역시 기꺼이 주식시장의 불나방으로 사는 운명을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박 여사는 매주 1000만원씩을 나에게 주기적으로 맡겼다. 나는 박 여사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몇몇의 사람들이 광고를 보고 찾아왔지만 이것저것 따지고 쟀다. 박 여사 같은 사람 한명 정도만 더 있으면 싶었다. 상담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이 거칠어졌다.
“나를 믿고 그냥 돈을 맡기려면 오고, 어떤 것 하나라도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도로 가시오.”
거친 말은 찾아온 사람들을 내치는 방법이 되었다. 별 미친놈 다보겠다는 시선으로 갸웃거리다 사람들은 되돌아갔다. 그런데 홍 사장만 예외였다. 대신 자신이 한마디 하겠다고 했다.
“여태껏 별짓 다 해봤으니 한 번 더 속는 셈치고 5000만원 맡길 테니 어디 잠수나 타지 마시오.”
홍 사장은 정말 인생을 포기한 사람인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어떤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이 사람에게는 반드시 수익을 안겨주고 싶었다. 이판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홍 사장도 불나방이었지만 이런 불나방은 이미 뜨거운 불꽃쯤은 무덤덤하게 타고 넘을 수 있는 불사조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기꺼이 홍 사장 돈을 받았다.
박 여사와 홍 사장 투자금은 스승의 방법을 이용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매일 5%의 수익만을 노리며 철저히 데이트레이드로만 운용했다. 한 달 운용성과는 85%였다. 둘은 놀라지 않았다. 가히 주식 판에서 닳고 단 사람들의 태도였다. 대신 투자금을 늘렸다. 홍 사장이 1억을 추가로 입금했다. 박 여사는 술을 한잔 사겠다고 했다. 주름이 졌지만 뽀얗던 박 여사의 목덜미가 떠올랐지만 문자를 남겼다.
‘저는 오래 투자하지 못합니다. 3개월만 운용하고 미국으로 가려 합니다. 술 마신 것으로 할 테니 2억만 한번 투자 하세요. 제 몫은 수익금의 20%만 챙겨 주시구요.’
‘우리 박 이사! 믿어요. 20%가 뭐예요. 이번처럼만 수익 내요. 30% 박 이사에게 돌릴 테니. 그리고 그날 술 한 잔 꼭해요.”
12시30분이 지나자 지수가 서서히 상승폭을 높여간다. 그러나 고점에서 출회되는 프로그램 매물도 만만찮다. 다행히 외국인은 풋으로 방향을 잡고 개인과 기관은 콜로 포지션을 잡아간다. 점심시간 타이밍도 괜찮다. 1.32P! 예상했던 것보다는 높지만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 마우스를 바투 쥐고 클릭 한다. 순간적으로 100계약이 체결된다. 호가가 1.33으로 바뀐다. 잠시 숨을 고른다. 다시 호가가 1.32로 내려오고 1.31에 급속도로 쌓였던 매수 잔고가 사라진다. 더 이상 지수가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는 흐름이다. 투자주체창에 확연히 기관과 개인들이 콜포지션을 늘리는 게 보인다. 주문 창에 100에다 0하나를 더 붙인다. 1000계약 1억 3200만원이 순식간에 체결된다. 또 한 번을 클릭 한다. 1000계약이 이번에는 1.30에 체결된다. 코스피 200지수는 외가격인 231.10P에서 1분봉을 양봉으로 만들면서 길이가 위로 늘어난다. 스탑오더 예약에 100계약을 1틱 단위로 주문을 넣는다. 넣어놓은 주문이 1.30에서 1.26까지 숨겨놓은 지뢰폭탄처럼 검은 점으로 나타난다. 미스리 창을 띄운다. 각 주식포털에 108명의 아이디로 동시에 속보를 뿌린다. 눈을 감는다.
(루머·속보) 북한 특수 공작 팀으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들이 서울시 지하철의 주요 환승역에 폭탄설치, 특별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폭파하겠다는 협박문을 청와대에 보냈다고 함.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눈을 뜨자 좀 전까지 점진적으로 상승하던 코스피 200지수가 거짓말처럼 장대음봉을 만들며 하락하기 시작한다. 스탑오더 창에는 풋 225.70물이 2400계약 잔고가 표시되어있다. 수익률이 요동을 치며 상승한다. 순식간에 1.27이던 호가가 1.60까지 오른다. 108명의 아이디로 뿌린 내용을 재전송하는 팝업창이 모니터에 블록을 만들며 불쑥불쑥 나타난다. 매도 기타호가 창에 6.30을 타이핑하고 2400계약 매도 예약을 넣는다. 이번엔 108명의 아이디를 30명, 30명, 48명으로 나눠 1초 간격으로 속보를 넣는다.
(속보) 신도림역과 영등포역에 폭발물 탐지견과 경찰 출동.
10초를 기다렸다가 탐지견의 줄을 잡은 무장경찰의 사진을 5번에 나눠 각 포탈 창에 흩뿌린다. 스탑오더 창을 바라본다. 호가는 3.0을 막 넘어선다. 1.5배의 수익이 발생한다. 잠깐 마음이 흔들린다. 이쯤에서 털고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순간, 2억이 넘는 빚과 원칙을 말하던 스승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나리오대로 간다. 최소 5배! 이번 딱 한번이다. 그리고 편히 살자.
잠시 모니터의 표준시계창을 본다. 1시10분.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면 낭패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빨리 실행에 옮겨야 한다. 호가 창을 바라본다. 3.50까지 오른 호가는 잠시 주춤거리며 숨고르기를 한다. 창문을 연다. 신도림역이 보이고, 기차가 도착했는지 출구에서는 사람들이 사방으로 빠르게 빠져나온다. 100여 미터 거리에서 기폭장치를 누른다. 나는 마음속으로 폭발음을 듣는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지금쯤 신도림역 지하 2층의 사물함이 몇 개 날아갔을 것이다. 심하게 연기도 피워오를 것이다. 1차 폭발 성공!
속보를 뿌린다. 호가 창을 본다. 5.70까지 오른다. 다시 기폭장치를 누른다. 속보를 뿌린다. 호가 창을 본다. 시간이 잠시 정지하는 것 같다. 모니터 하단에 붉게 풋 227.5, 6.30, 2400계약 매도체결이라고 뜬다. 째깍째깍 시계소리와 쇳소리가 다시 들린다.
“사기와 스킬은 다르다. 절대 사기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개인이 조직을 이길 수는 없다. 돈을 벌려면 대주주가 돼야겠지만 그들이 자본을 활용할 수 있는 시장에서 활동하는 스킬만으로도 우리는 돈을 벌 수 있으니 대주주 부럽지 않은 날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스승이 처음 코스피 200지수 차트를 내게 설명하며 해준 말이다. 사기와 스킬이 다르다니. 결론이 좋으면 사기도 스킬이 되는 시대다. 정보를 쥐고 있지 않은 개인이 한번쯤은 정보를 만들어 내는 게 뭐 그리 나쁜가. 남북으로 대치된 상황, 한번쯤은 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딱 한번 사용하는 것이 사기인가. 아니다. 스킬이다. 모니터에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었다는 팝업창이 뜬다. 이제 30분 간 말 그대로 고요한 세상이 된 것이다. 노트북을 닫는다. 가방을 챙기고 시계를 본다. 1시 32분. 책상위에 놓여있는 불룩한 약봉지를 일별하고 사무실을 나간다. 등 뒤로 번호 키 잠그는 소리가 난다.
신도림역 근처에서 사이렌소리가 난다. 매캐한 연기 냄새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연이어 터진다. 나는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간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 입구로 일단의 경찰이 급하게 뛰어온다. 스마트 폰을 연다. 서킷브레이커가 작동된 시장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이 멈춘 코스피 200지수 차트화면 위로 무수한 팝업창이 연속으로 뜬다.
(속보) 청와대 공식논평 - 신도림역 사물함 폭발은 북한의 소행과는 상관없는 투기세력의 소행으로 판단. 경찰이 수상한 거래 포착 용의자 추적에 나섬.
화면을 끈다. 최대한 담담한 모습으로 출입문을 향한다. 스스로 긴장하고 있다고 느끼면 이미 진 것과 다름없다. 어떤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담담해야 한다. 안경을 한번 치켜 올린다.
(끝)
수상소감
김만성 : 69년 고흥군 거금도에서 남.
현재 한화증권 광주지점 부지점장으로 재직.
6년 전 여름, 머리끝까지 차오르던 ‘무엇’을 견디지 못하고 감히 10일간의 휴가를 내고 몽골여행을 감행했다. 칭기즈 칸의 고향이라는 빈데르 솜과 광활한 초원을 굽이쳐 흐르던 오논 강을 보면서 머리끝까지 차오르던 ‘무엇’과 대면했다. 말 잔등에 올라 눈을 감으니 바람이 불어왔다. 다시 눈을 뜨니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내 안에서 질주(疾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바람처럼 달려 언덕 같던 지평선에 다다르니 저 만큼 지평선이 또 물러나 있었다. 달린 것은 말인데 오히려 내 숨이 가팠다. 말에서 내렸다. ‘무엇’이 말을 걸어왔다. ‘니가 뛰는 그동안 내가 숨이 가팠다고…….’ 그 순간 메뚜기 몇 마리가 날아올랐다. 허브향이 코를 찔렀다. 초원이 온통 허브 천지였다. 그때 나는 ‘무엇’에게 말했다.
‘이제 숨차지 않게 할께.’
여행에서 돌아와 한화증권으로 이직했다. 즐겁게 일하고, 여유를 가지려고 애썼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과 했던 약속이 파기될 뻔도 했다. 그때마다 허브 향과 함께 하르륵 날아올랐던 메뚜기를 떠올렸다. ‘무엇’과 얘기를 나누며 글을 썼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소설이 되었다.
땀 흘리며 일하는 즐거움을 놓을 수 없다. 더 열심히 내 분야에서 뛰고 달릴 것이다. ‘무엇’이 때론 숨차다고 말해도 오히려 유산소운동이니 더 건강해질 것이라고 말하겠다. 한화증권과 연을 맺고 투자의 길을 가는 모든 고객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서킷브레이커」는 나의 몽골여행처럼 숨 가쁘게 달리는 분들에게 드리는 선물이다. 잠깐 말에서 내려 땅에 서면 아름다운 메뚜기가 허브 향과 함께 하르륵 하르륵, 당신에게로 날아갈 것이다.
소설을 통해 세상 보는 법을 일러주신 ‘생오지’ 문순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고마리 소설모임, 생오지 문학회 문우들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일하면서 소설을 쓰는 나를 응원해준 사람이 있다. 작은 첫걸음이지만 꾸준히 갈 수 있도록 또 응원해 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한다.
첫댓글 이제 시작이지요? 다음 번에는 더 좋은 소설로 뵙기를~~ 축하합니다.^^
~ 와, 당선소감도 금상감이네요,,,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이 카페가 아닌 다른 통로에서 수상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 이번 수상을 계기로 <주식의 고수>처럼 한층 높은 경지를 기대합니다,,,
공지사항에서 못보았습니다. 어쩌다 와서 보니~ 반가운 일이 있었군요.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