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탕과 석쇠 구이가 손짓하는 쪽빛 겨울 바다 / 오태진
쏴 하고 끝없이 파도 치는 소리가 잠을 깨운다. 여기가 어디길래 바닷소리가 들리나. 잠결에 잠깐 헷갈린다. 어슴푸레 밝아 오는 창, 대관령 자락 200년 금강송이 에워싼 휴양림 숲 속의 집이다. 파도 소리가 아니라 송림을 쓸고 가는 솔바람 소리다.
모질게 추운 주말 강릉에 와 하룻밤 묵은 것은 휴일 하루 온전히 동해안을 쏘다니기 위해서다. 주섬주섬 챙겨 입고 경포에서 속초까지 진짜 파도 소리 들으러 나섰다.
경포해변 남쪽 강문 솟대다리에 섰다. 코끝 맵싸하게 찬바람이 몰아친다.
카메라 셔터 두어 번 누르기 무섭게 손가락이 곱았다.
맑게 갠 겨울날 으르렁대는 바다를 마주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여름 동해가 코발트빛 연한 수채화라면 겨울 동해는 진한 쪽빛에 청록 물감 덧칠한 유화다. 잉크처럼 짙푸른 먼바다가 내달려 오면서 에메랄드빛이 됐다가 발치에서 옥빛으로 부서진다. 머리를 치켜세우고서 멀리 강문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가 고래떼 같다.
아침 속 풀이는 강문 횟집촌 초입 태광식당에서 했다. 7000원 하는 말린 우럭 미역국 한 그릇이면 아무리 뒤집힌 속도 금세 가라앉는다. 생선뼈 푹 고아 고소한 국물에 미역을 넉넉하게 넣고 끓였다. 우럭 살은 부스러져 간간이 씹힌다. 미역 빛깔이 우러난 녹색 진국에 밥 말아 싹싹 비웠다.
예순여섯 여주인은 강문 토박이다. 아버지가 '머구리'라고 부르는 잠수부였다.
배고프던 시절 아버지가 우럭을 잡아 오면 미역국에 넣고 끓여 온 식구가 한 대접씩 물배를 채웠다. 지겹게 먹던 그 가난의 음식이 스물 몇 해 장사 밑천이 됐다.
새벽 경포에 온 여행자와 사진가들의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영혼의 음식이 됐다.
워낙 추워선지 경포해변마저 휑하다. 말 두 마리가 바닷바람 속에 서 있다. 손님 기다리는 말의 눈이 슬프다. 느릿하게 북으로 차를 몰아 순긋·사천진·연곡 해변을 지난다. 찻길 바로 옆이 바다라 내릴 필요도 없다. 눈길 당기는 풍경을 만나면 차를 세운다. 흘러간 레이 찰스 노래 틀어놓고 차창 내리고 싸 온 커피를 마신다.
주문진 남쪽 영진해변 갯바위에 물새들이 뭔가를 기다리듯 앉아 있다.
그러다 파도가 바위를 덮칠 즈음에야 날아오른다.
파도가 피워 올린 물보라와 무지개 속을 이리저리 비상(飛翔)한다. 그러곤 다시 바위에 내려앉아 다음 파도를 기다린다. 고기 잡는 것도 잊은 채 요동치는 겨울 바다를 즐기고 희롱한다.
주문진항에선 차가 밀렸다. 싸고 싱싱한 생선 사고 회 먹으러 온 행렬이다.
크고 작은 어시장 중에 사람 사는 냄새가 제일 물씬한 곳이 부두 바로 남쪽 바닷가 좌판 수산물 종합시장이다. 천장만 씌운 가건물 안에 활어·선어·자반·조개, 온갖 난전이 빼곡하다. 생태 세 마리, 고등어 일곱 마리, 꽁치 스무 마리를 1만원씩에 사 얼음 채운 스티로폼 상자에 담았다. 3만원어치 들짐이 묵직한 게 횡재라도 한 것 같다.
난전에서 바닷가 따라 부두 쪽으로 가는 골목엔 생선 굽는 냄새가 꽉 찼다.
가게들 앞 넓은 화덕에 갈탄 피워놓고 석쇠 구이를 한다. 사람들이 화덕에 둘러앉아 양미리·도루묵·오징어·가리비·새우를 구워먹는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골목이다. 끼어 앉아 막걸리 한 사발 곁들여야 하는데….
아직 배가 꺼지지 않았고 갈 길 멀어 눈 질끈 감고 지나가자니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주문진항 북쪽 소돌·주문진 해변 끝나고 지경리에서 양양 바다가 시작한다.
우중충한 해안 경비 철책을 헐어내고 산뜻한 하늘빛 울타리를 세워놓았다.
짤막한 1.5㎞ 해변이지만 언제 와도 한적한 '나만의 바다'다. 바다에 붙은 도로를 천천히 지나가기만 해도 좋다. 남애항에선 새빨간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를 걷는다. 포구를 에워싼 두 방파제 안에 갇힌 물조차 시리도록 새파란 미항이다.
늦은 점심은 속초항 북단 영랑동 속초생대구에서 들었다.
문 연 지 2년 된 가게 안팎이 연세 지긋한 주인 부부처럼 곱고 깔끔하다.
맑은 대구탕은 화학조미료 넣지 않았다는데도 맛 깊고 시원하다. 젓가락질에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서울 여느 냉동 대구탕과는 비길 수도 없이 부드럽다.
수컷 정소(精巢) '이리'도 섭섭잖게 담겨 크림처럼 사르르 녹는 '천상의 맛'을 누린다. 얌전한 대구전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침표는 속초 중앙시장에서 찍었다. 삶의 짭조름한 내음 밴 우리네 항구 시장이다. 그래서 새 이름 관광수산시장보다 중앙시장이 좋다. 밑간하고 꾸덕꾸덕 알맞게 말려 깨끗하게 손질한 건어물 가게가 많다. 가자미·볼락·우럭·가오리들을 손 보따리로 들 수 있는 한도까지 사도 6만원어치가 안 된다. 전국에 이름난 닭강정도 샀더니 차 트렁크가 꽉 찬다.
진미(珍味)라고 할 순 없어도 겨울 별미(別味) 맛보고, 호사스럽진 않아도 식탁을 빛낼 먹을거리 챙기고…. 겨울 바다 앞에 서는 것만으로 행복한 동해안 나들이가 이리도 풍성할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