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이사야(56)/앙망
제목 : 학대와 속임을 당할 때 성도가 할 일
성경 : 사 33:1~6
찬송 : 354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215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33:1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사 33:2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사 33:3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사 33:4 황충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
사 33:5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사 33:6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이사야 32:9~20절 지난 주간에 살펴본 말씀을 보면, 약자를 압제하는 안일한 기득권자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백성이 구원을 얻을 것을 약속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비슷한 맥락으로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신실한 자들을 위한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앗수르가 유다를 압박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세력에게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대적을 벌하심으로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극심한 괴롭힘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학대하는 자와 속이는 자를 향한 경고
사 33:1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28~31장에서 “화있을진저”(호이)로 시작하는 다섯 개의 저주시가 있었는데, 이 단원 역시 “화있을진저”(호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 33:1 화 있을찐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개역)
그런데 앞에 나온 다섯 개의 저주 시는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자들이 저주의 대상이었으나, 여기서는 학대하는 자 곧 이스라엘의 대적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학대하다’ 그리고 수동태로서 ‘학대를 당하다’에 쓰인 동사 ‘샤다드’는 ‘폭력적으로 다루다’ 혹은 ‘파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학대하는 자는 이사야 시대에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파괴한 앗수르에 걸 맞는 묘사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라고 특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의도가 역사적인 사실 관계를 설명하기보다 거기에 담긴 교훈과 원리를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다’ 그리고 수동태로서 ‘속임을 당하다’에 쓰인 ‘바가드’는 ‘배반하다’ 혹은 ‘반역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학대하는 자가 앗수르라면, 이것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징벌하자 히스기야가 그에게 조공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왕하 18:13~16) 다시 군대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치게 한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36~37장; 왕하18:17절 이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각자에게 주어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바라셨는데 그들은 인간을 상대로 해서 최고가 되려고 했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짓밟아 자신들이 더욱 큰 부자가 되고 더욱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들은 세상의 토질을 황폐하게 하는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욕심 많은 사람들을 학대하시는데 하나님이 직접 하지 않으시고 그들보다 더 악한 자들을 통해 그대로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등장한 악의 청소부가 바로 앗수르 제국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맹수처럼 나타나서 자기보다 약한 모든 동물을 다 물어뜯어 죽였습니다. 앗수르는 수리아를 망하게 하였고, 이스라엘도 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도 물어뜯어서 거의 중상을 입혔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에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앗수르가 예루살렘까지 망하게 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반대로 하나님의 손에 죽도록 두들겨 맞고 도망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적인 성공이나 돈, 명예와 비교할 수 없는 고상한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선포한 것은 구체적인 역사를 다루기보다는 그 상황에 따른 교훈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하고 속이는 자들은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을 확신시킴으로써 백성을 위로하고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학대하는 자가 학대를 당하게 되고 속이는 자가 속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동해 보복법이 적용된 것입니다(신 19:21).
사람은 무엇으로 심 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갈 6:7).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시대에도 앗수르와 같은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약탈하고 속이는 사람들이 앗수르입니다. 그들의 막강한 위세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부당한 현실로 인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함
사 33:2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은 대적을 향한 경고에서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 ‘우리’의 탄원으로 바뀝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려울 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여기에 ‘앙망하다’에 쓰인 동사는 ‘카바’라고 하는데 문자적으로 ‘기다리다’, ‘바라다’, ‘소망하다’는 뜻입니다. 기대감을 품고 간절히 고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들은 현실에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때까지 끈기 있게 인내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결단을 보였습니다.
사 8:17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또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사 25: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사 26:8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여기에서 ‘팔’은 능력을 상징하므로 ‘우리의 팔이 되시며’는 여호와의 권능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본문에는 ‘그들의 팔’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백성을 위해 대표로 비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 33: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아침마다’는 그런 일이 날마다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루의 시작은 아침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아침이 중요합니다. 아침을 잘 시작해야 하루가 귀하게 열립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기분을 잡친다면 그날 하루는 우울하게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시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120: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 121: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 138:7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사 33:3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요란한 소리’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소리를 말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진동시키는 소리로 인하여’라고 번역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힘이 세고 악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을 상대로 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강하고 많은 군대라 하더라도 개미 떼밖에 되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블레셋 같은 이방 군대가 쳐들어왔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뇌성이 울리며 우박이 떨어져 겁을 집어먹고 두려워서 도망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여기에서 ‘일어나심’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행동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용사와 같이 하나님이 나서실 때 대적하는 나라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병행구의 ‘도망하다’와 마찬가지로 ‘흩어지다’도 완료시제로 쓰였으므로 개역 개정은 과거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미래에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두고 선언하는 ‘예언적 완료’입니다.
여기에서 악한 자들이 기억할 점은 하나님은 같은 방법을 잘 쓰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치시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악해질 수 없습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권세만 믿고 악한 짓을 해 댑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화산 폭발이나 지진 또는 쓰나미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이 움직이는 소리인 줄 모르다가 나중에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임을 알아차리고는 더 겁을 먹고 도망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 중에도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앗수르의 환난의 바람에 금방 꺼질 것 같은 유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 33:4 황충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
앗수르가 도망가느라 버리고 간 엄청난 재물을 이스라엘이 거둡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환난의 순간에도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환난의 순간에도 축복이 되게 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지극히 존귀하신 여호와
사 33:5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사 33:6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하나님은 전세를 역전시키심으로 당신의 지극히 존귀함을 보이시고,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지극히 존귀하시다는 것은 그 무엇도 위대하신 하나님과 상대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불의한 세력에게서 건짐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지극히 존귀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거 하시면서도 이 땅의 정세를 관망하시거나 방치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정의와 공의를 이 땅, 시온에 실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을 앙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께 기도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역사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이 시대 모든 사람이 평안함과 보배를 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이 물질과 권력의 힘을 믿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학대하고 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에 연루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능력과 구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로 구원을 경험하게 하며, 평안을 주고 진정한 보배가 무엇인지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