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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奇蹟)을 부르는 교회
시편 23, 1- 6 ; 마가 6, 30- 44
한 문 덕 목사
[서울 변두리 가난한 우리들의 일상과 그리스도교의 구원]
2005년 국립극장에서 단 2주 만의 공연으로 한국뮤지컬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빨래>라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이 뮤지컬은 고단하고 얼룩진 서울 소시민의 삶을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강원도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비정규직의 삶을 살고 있는 아가씨 나영, 한국말도 잘하지만 사람 대우 못 받으면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 몽고 청년 솔롱고,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서울 변두리 달동네 사람들의 삶, 그들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희망의 이야기가 포크, 펑키, 랩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아름다운 노랫말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 뮤지컬에 나오는 음악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서울살이 몇 핸가요?>와 <비오는 날이면>입니다.
서울살이 몇 핸가요? 언제 어디서 왜 여기 왔는지 기억하나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 있었는지 마음에 담고 살아가나요?
서울살이 십 년, 세 번째 적금통장 해지. 어디어디 살아보셨나요? 봉천동, 석관동, 미아리, 옥수동. 다니고 다니다 깨진 건 적금통장 그리고 부부금실.
서울살이 육 년, 네 번째 직장. 최저임금액 칠십팔만원이면 말 다했죠. 생리휴가, 육아휴직 그런 것들은 없어요. 짤리고 짤리다 늘어난 건 술 담배 그리고 변비.
서울살이 오 년, 여섯 번째 이사. 낡은 책상 삐걱이는 의자, 보지 않는 소설책, 지나간 잡지 고물라디오 기억이 가물가물한 편지, 이런 것들은 버리고 와요. 버리고 버려도 늘어난 건 세간살이 집세 그리고 내 나이. 얻어갈 것이 많아 찾아왔던 여기. 잃어만 간다는 생각에 잠 못 드는 우리. 당신과 내가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서울살이 늘어갑니다.
서울살이 삽십년. 버스안내양으로 시작한 서울살이 구박 설움 멸시도 받았지만 내가 오라이 하면 출발하는 버스가 좋았지. 남편이 죽고 시작한 마을버스, 매일 아침 순대 속처럼 미어터져. 비오는 날이면 좁은 비탈길 오르내리는 일 두렵지만 열두시간씩 운전대를 붙잡고 술취한 손님이 삿대질해도 운전대를 꼭 붙들어, 운전대는 내 밥줄, 내 삶.
서울살이 이년. 바쁜 게 좋아 서울에서 시작한 직장생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사는 기분은 홀가분했지만 아파도 약 한 봉지 사주는 이 없고 무슨 일 생겨도 연락할 사람 하나 없고 비 오는 날이면 죽었다 깨어나도 회사가기 싫어. 어금니 꽉 깨물고 버티자 속으로 외치지 다음 달 카드 값 장난 아냐 장난이 아니야.
서울살이 오년. 다섯 번째 공장. 받은 월급보다 더 쌓인 밀린 월급. 비오는 날이면 가족 생각에 온 맘이 저리고, 비오는 날이면 온 몸이 쑤셔와요. 친구는 아파서 누워있고 병원 갈 돈 없어. 빗물대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면 좋겠습니다. 나를 무시하고 속이는 사람들, 나를 피하는 사람들 많지만 나는 떠나지 못해요. 돈을 벌어 꿈을 이루겠다는 턱없는 희망 때문입니다. ~ 이하 생략 ~
여러분들은 서울살이 몇 년이십니까? 여러분의 서울살이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고단한 하루를 살고 있는 노래의 주인공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목자 없는 양 같은 이들]
오늘 본문인 마르코 복음서 6장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계속되는 하나님 나라 선교 사역에 심신이 피곤하였고, 이제 지친 몸을 잠시 쉬고자 한적한 곳으로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여러 마을에서 한걸음에 달려와 예수님의 일행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습니다.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이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매우 불쌍히 여기십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팠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왜 민중들을 보시고 창자가 끊어질 듯 가슴 아파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몰려 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제가 들려 드린 <빨래>라는 뮤지컬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서울살이는 매우 힘들고 고달파 보입니다. 전쟁을 딛고 놀라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지만 서울의 주변부,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힘들고 하루하루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저런 자리에서 우리 권사님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웃으면서 얘기하시지만 그 고단한 삶의 이야기가 제 마음을 저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던 그 시절 갈릴리 동네 사람들의 삶도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갈릴리는 비옥한 토지를 지니고 있었고, 따뜻한 지중해 기후에다, 드넓은 호수를 끼고 있어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누군가가 뺏어 가지만 않는다면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1986년 1월 말에, 막달라 맞은편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의 한 개펄에서 길이 8.2미터, 폭이 2.3미터 되는 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배는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67년까지 사용하던 배였고, 바로 예수와 열두 제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갈릴리 호숫가의 그 짐배와 같은 배였습니다. 그런데 이 배는 매우 낡은 배들을 재활용해 조립하였는데, 나무의 절반은 배를 만드는 목재로서는 부적절한 대추나무였습니다. 이 배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목재는 최소 일곱 가지가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배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농사에 적절한 지중해성 기후와 호수의 풍부한 수자원과 물고기들, 그리고 비옥한 토지로 풍성한 결실을 낼 수 있던 갈릴리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 나무 저 나무 쪼가리를 가져다가 이렇게 조잡한 배를 만들 수밖에 없었을까요?
다들 아시듯이 당시 유대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고, 로마가 세운 괴뢰정부인 헤롯가문은 로마제국의 주구로서 이스라엘의 로마화에 앞장 섰습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대왕은 가이사리아 항구를 건설해 항구, 도로, 교량 등 전방위 사회 기반 시설을 세우고,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하여 상업화와 도시화를 통한 로마화를 헌신적으로 수행했습니다.
헤롯대왕이 죽고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와 베뢰아를 맡았을 때 갈릴리에도 로마화의 바람이 세차게 밀어닥칩니다. 헤롯대왕의 후계자로 유대 전체를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헤롯 안티파스는 유대 땅의 4분의 1도 못 미치는 땅의 통치자로 임명되자 유대 전체의 왕이 되기 위한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로마에게 잘 보이기 위한 첫 사업으로 세포리스를 수도로 정하고 로마식 도시를 건설합니다. 세포리스는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걸어서 한 시간 삼십분 정도면 갈 수 있는(약 6.5km) 곳인데, 헤롯 안티파스는 그 도시를 “아우토 크라토리스”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세계정복자’입니다.
기원후 1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자 이번에는 새로운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호숫가에 티베리아스라는 새로운 도시를 또 건설합니다. 안티파스는 이렇게 로마식 도시인 세포리스에서 세금을 뜯고 또 이제는 티베리아스에서 갈릴리 호숫가의 어부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물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열심히 일궈 놓은 농작물을 하루아침에 쑥대밭으로 만드는 잔인한 짐승이 있었는데 바로 여우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켜 여우라고 불렀으며(루가 13:31-33), 헤롯 안티파스 치하에서 갈릴래아 호숫가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피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고 배 한 척 제대로 만들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야욕을 위해 아내도 버리고 자식도 나 몰라라 하는 헤롯에게 직격탄을 날렸던 이가 세례요한이었고, 지금 민중들은 이 새로운 지도자를 잃어버리고 갈 곳 몰라 방황하던 중이었던 것입니다. 기본적인 생존도 보장되지 않고 미래도 보이지 않는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몸을 숨긴 예수 일행을 쫓아 올 수밖에 없었던 당시 군중들의 상태였으며 예수는 이들에 대해 무한한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헤쳐 나가는 방법]
예수 일행을 따라 군중들에게 예수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십니다. 내용이 무엇인지 나오지 않지만 저는 삶의 희망을 놓지 말라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온 지 꽤 시간이 흘렀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모여든 무리는 많은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욕구의 근원이 되는 생존의 욕구가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한 교회공동체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36절 이하에서 마가는 두 가지의 해결방안을 서로 대비시켜 제시합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자”라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여러분은 이 두 해결책 중에서 어느 편에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오늘 이 기적 사건의 의미는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하면 예수께서 생존할 당시에 퍼진 이야기일 정도로 아주 유명하고 오래된 이야기에 속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바로 예수 운동에서 느꼈던 민중들의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헤롯 안티파스의 로마에 대한 과잉충성은 갈릴리 호숫가 마을의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제적 피폐함과 사회적 불평등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까지 망쳐놓았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화는 갈수록 심해져 갔습니다.
예수의 기적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부나 지위, 지식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누구나 평등하게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출신과 신분에 따라, 주-종 관계(패트론-클라이언트)로 연결된 사회적 인맥 속에 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불의한 사회가 저지른 구조적 죄악에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스스로 해결하라는 제자들의 대안은, 더군다나 그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을 유혹하는 그럴 듯한 사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여야 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힘을 합칠 때에만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의 한 마디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는 우리들의 생각을 바꿔서 내가 할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가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까 그 제자들은 이미 예수께로부터 많은 권능을 받았고 바로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나아가서 그 권능을 베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문명의 흔적이 드문 오지의 인디안 마을에 선교사가 들어갔습니다. 우물도 파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도 세워 글과 셈도 가르쳤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이 선교사는 자신이 가르친 것을 아이들이 얼마나 잘 알고 있나 보기 위해 시험을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문제를 풀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잠시 뒤에 몇몇 아이들이 일어나더니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학생에게로 시험 문제지를 들고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그 학생 주변에 둘러 앉아 서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더니 시험지를 베껴 쓰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한 선교사는 “그건 나쁜 짓이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이번 시험은 무효”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시험지를 베끼던 한 학생이 조용히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추장님이 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어요. 너희들이 살다보면 분명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혼자 끙끙 거리지 말고 여럿이 모여서 함께 의논해서 풀어가거라.”
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푸른 풀밭에 떼 지어 앉힌 다음 어떻게 그들을 먹게 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둘러 앉아 누구나 먹고 마실 수 있었던 평등의 식사와 초대교회에서 공동으로 나누는 밥상은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저녁이 됩니다. 집이나 동굴, 다락방에 첫 그리스도인들이 모입니다. 남자나 여자, 종이나 주인, 자유인이나 노예, 부자나 가난한 자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모입니다. 자유인이면서 부자는 시간이 많으니 조금 일찍 옵니다. 저녁에 모이기 때문에 각각 먹을 것을 싸옵니다. 종들은 일을 마치고 오기에 조금 늦게 오고 가난하기에 빈손입니다. 그러나 모두 한자리에 모이면 이제 음식을 나눕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어 주셨던(요한 13장 1-20절) 주님을 기억하면서, 서로 섬기는 것이 여러분들이 할 일이라는 말씀(마르 10장 43-45절)을 기억하면서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어떤 거리낌도 없이 이렇게 둘러앉았을 때 벌어진 인간다움의 회복은 이후 인간은 누구나 그 자체로 존엄성을 가지며 하느님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놀라운 생각을 인류에게 알려 주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는 이것을 기적이라 부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헤아려 5천명이 정말 배불리 먹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자리에 둘러 앉아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서로 나눔의 축제를 열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배고픔을 잊기에 충분하였으리라 전 생각합니다. 그 순간! 아마 이들은 시편 23편 1절을 노래하였겠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그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워 쉬게 하시네.”
여러분! 여러분에게 기적은 무엇입니까? 제가 아는 후배 목사님이 청소년부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어느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하는 말이 “제 동생이랑 싸우지 않는 것이 제겐 기적입니다.”라고 했답니다.
네 글자로 된 낱말을 알아맞히는 초등학교 1학년 문제가 있었습니다. “길가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행동을 네 글자로 무엇이라 하는가?” 정답은 “가”로 끝납니다. 여러분들은 다 아시겠지요? 고성방가(高聲放歌)가 정답입니다. 그런데 어떤 어린이가 쓴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빠인가?” 아마도 이 어린이의 아빠는 평범한 한국 사회의 가장일 것입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한잔 했을 것이고, 술기운이 오르자 안에 있던 것들이 튀어 나왔겠지요. 전쟁의 폐허에서 이 정도의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내고 곧 은퇴를 앞둔 베이비 붐 세대들의 피땀 어린 노력들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면 이제 이 사회는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고성방가가 아닌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하는 또 다른 기적을 필요로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일은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입니다. 선교사들의 잘못된 문화인식으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고유의 문화를 배척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각 가정의 설 명절이 동네잔치로 이어지는 대보름의 축제가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인 아베 피에르 신부가 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 누군가가 찾아오면 세 가지를 물어 본다고 합니다. “주무시겠습니까? 드시겠습니까? 씻으시겠습니까?” 예전 우리네 시골 마을은 찾아오는 나그네가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마을을 찾기 쉽지 않은 이 때에 생명사랑공동체가 위의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해낼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모든 종교인들의 제대로 된 소망이 있다면 거룩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거짓 자아를 넘어서 진정한 자기에 도달하는 길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요. 힌두교는 그 경지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을 알려 줍니다. 지혜의 길(즈냐냐 혹은 갸나 요가), 헌신의 길(박티 요가). 행위의 길(카르마 요가)입니다. 번득이는 지혜를 닦을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신에게 바칠 수도 있고, 아무 조건 없이 선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는 대신 이 세 가지 길 중 하나라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면 그것이 저는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음력 명절로 새해를 맞이하시는 여러분, 오늘 당신의 삶에선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아니 어떤 기적을 만들고 계십니까? 우리 교회는 어떤 기적들을 일궈내고 있나요? 저는 생명사랑교회가 기적을 부르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적하나 만들기를 바라며 유명한 김종길 시인의 시 한편 읽어 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설날 아침에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따뜻한 설 되시고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사랑의 하나님!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분께서 이 세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오셨던 그 사건이 기적임을 기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런 기적위에 세워진 종교임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불러 모아 한자리에서 나눴던 평등의 식사를 기억합니다. 이 나라 최대 명절인 설에 우리 또한 누구나 한자리에 둘러 앉아 서로를 돌보고 먹고 마시는 잔치를 열게 하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사랑이 넘쳐서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기적을 만들어내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의 그 명령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이미 가진 것으로 매일의 삶에서 기적을 만들어내고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소서. 이 땅의 백성들을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축도
야훼 하나님께서 민족의 명절인 이 설에 여러분에 삶에 함께 하셔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수고가 말끔히 씻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이웃과 함께 덕담을 나누려는 여러분의 입에 함께 하셔서 고통 받는 이 땅의 어려운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의 소식이 들리기를 기도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다시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함께 하셔서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굳건히 일어나는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은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사랑과 친교가 주님과 동행하며 기적을 일구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삶 터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