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주령 어긴 자는 처형하고자신은 술을 마셨다.
등극한 지 만 2년째 되던 서기 1726년 10월 13일, 조선 21대 왕 영조가 종묘에 행차했다.
선왕 경종 삼년상을 마치고 신위를 종묘에 모신 영조는 이날 오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3대 국정지표를 발표했다. (1726년 10월 13일 『영조실록』)
좌의정 홍치중洪이 대신 읽은 국정지표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계붕당(戒朋黨)이다.
편가르기 때려치우고 정치 똑바로 하라는 주문이다.
둘째는 계(사치(戒奢侈)다.
"금과옥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으니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아끼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계숭음(戒崇飮)이다.
“술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狂藥)이니 엄금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날부터 1776년 영조가 죽을 때까지 50년 동안 조선은 화합의 정치와 검소한
도덕적 삶과 주정뱅이 없는 세상이 됐다? 그럴 리가 없었다.
문제는 입으로 내뱉은 도덕률 뒤에 숨은 위선이었다.
- 18세기 조선의 가난과 사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가난하게 살았다. 아시아 요업 산업을 선도했던 조선은 전쟁 때
일본군에 도공들을 집단으로 빼앗겼다. 농사지을 땅은 급감했고, 나라 재정도 엉망이었다.
한번 파괴된 기반시설은 회복이 느렸다.
세월이 흘러 숙종(재위 1674~1720) 대가 되니 태평성대가 왔다. 민간 생산이 서서히
늘고 이에 따라 상류층이 부의 상징으로 사치를 부릴 그 무렵, 영조가 등극한 것이다.
엄한 국정지표에 따라 부녀자들은 화려한 가체가 금지되고 족두리를 써야 했다. (1756년
1월 16일 『영조실록』) 금실로 수놓은 비단 또한 금지됐다. 민간에 화려한 그릇이 유행하자
영조는 값비싼 청화안료를 쓰는 청화백자 제작을 금지하고 질 떨어지는 철화백자만
생산하도록 명했다. (1754년 7월 17일 『영조실록』) 사치금지법은 재위 내내 사회 전반에
시행됐다.
- 금주령의 위선
1755년 9월 영조는 "식혜를 '예주(醴酒)라 하니 이 또한 술이다. 제사상에 술 대신 올리라"며
제수용 술을 금지했다. 대신 영조는 술 대신 송절차(松節茶)를 즐겼다.
"고금古今에 어찌 송절차의 잔치가 있겠는가?"라며 금주를 실천하는 모습을 스스로
대견해 할 정도였다. (1766년 8월 16일 『영조실록)
그런데 이 송절차가 정체불명이었다. 차를 마시면 왕이 이상해지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홍건이라는 종9품 무관이 강론에 참석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정흉모(丁胸矛)라는 창을 아느냐."
홍건이 머뭇대자 영조는 병조판서에게 곤장을 치게 했다. 곤장을 거의 반쯤 쳤을 때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영조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요상한 놈이다. 내가 직접 심문해 혼내주겠다."
옆에 모시던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홍건이 천천히 아뢰었다.
"성상 말씀이 평소 알고 있던 것과 달라 즉시 대답하지 못했나이다.
"의외로 홍건은 정흉모라는 무기에 대해 해박하게 답했다.
영조는 급히 그를 서천현감에 임용했다.
(성대중, 『청성잡기』 4, 「성언(醒言)」, '초관 홍건의 기개와 영조’)
말단 무관에게 화를 내고 평소와 달리 행동하더니 종9품 말직을 종6품 현감으로 즉석에서
인사 조치하는 기행. 그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해 '청성잡기'에는 '영조가 마침 송절차를
마신 터라 약간 취한 채 말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취한 채 마시고 취하는 차 봤나? 술이다.
신하들에게 송절차를 권하며 “취해서 쓰러지더라도 허물 삼지 않겠다”고 한 사람도
영조였고(1769년 2월 26일 『영조실록』),
“전에는 탁했으나 지금은 맑고, 물을 많이 섞으니 담백하다"고 한 사람도 영조였다.
(1769년 6월 12일 『승정원일기』)
법은 만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서릿발처럼 선언한 사람도, 개혁군주 영조였다.
만인 속에 본인은 없었다.
이 많은 에피소드를 정리하면 이렇다.
'집은 고관대작에게 빼앗기고 장식은 사치라 금지됐으며 술은 목숨 걸고 마셔야 하고
고급 그릇을 쓰면 비난받던 시대'.
"우리는 즐긴다"
1776년 개혁군주가 죽었다. 이듬해 열네 번째 딸 화유옹주가 죽었다.
1992년 경기도 부천 옹주와 남편 황인점 합장묘에서 옥비녀, 그릇 따위 화려한 부장품
30여 점이 쏟아졌다. 모두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이었다. 그릇도10여 점이 나왔다.
이 가운데 황채장미문병(黃菜薔薇紋甁)과 녹유리장경각병(綠琉璃長頸角甁)은 청나라
수입품이었다. 꽃병들이 이리 말한다. '저들은 처벌하고,우리는 즐긴다’.
- 박종인 저, ‘땅의 역사’ 5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