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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배움터] 삶 안에서 기도 들여다보기 (1)
지금까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공부했다면, 이번에는 일상 삶 안에서 기도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우리는 날마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 같지만, 일상 안에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늘 포함되어 있다. 특히 아침에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은 매우 중요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영성가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눈을 뜰 때 통찰이 일어난다고들 말한다. ‘통찰’이란 수도생활을 한다든지 기도생활을 오래 해온 사람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듯, 그날 하루를 살아갈 통찰 역시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첫 새벽에 하루 먹을 만나를 거두었듯이, 우리도 아침의 첫 느낌과 생각을 잃거나 빼앗기지 않는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침에 떠오른 통찰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는 얼마 전에 ‘영적 쓰기’에 관하여 알아본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첫 눈을 뜨자마자 우리 마음에서 일어난 느낌과 생각 가운데 단어 하나라도 기억나면 ‘영적 쓰기’ 공책에 적어보자. 가령 ‘불안’, ‘두려움’, 또는 ‘유쾌함’, ‘설렘’ 등등. 또는 어제 있었던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마음에 켕기는 것이 떠오른다면 서둘러 그 느낌과 생각을 공책에 적어보라. 때로는 간밤에 꾼 꿈을 적는 것도 좋다. 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영적 쓰기’ 공책을 펴서 그러한 느낌과 생각이 어디로 흐르게 되었는지를 쭉 돌아보는 것은 자신과 삶에 관해 파악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에게 온 느낌과 생각은 오늘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물은 주는 분께서 의도가 있어 주시는 것이므로 선물을 해석할 필요는 없다. 곧 자신에게 그것이 부정적 느낌을 주든 긍정적 느낌을 주든 그것에 관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기도에서 일상 삶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우리가 생활고를 겪을 때 더욱더 그러하다. 여기서 생활고란 경제적 어려움, 자녀양육의 어려움, 배우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 각각의 질병 등, 흔히 지금도 우리가 삶의 현장 안에서 겪는 어려움 모두를 포함한다. 필자는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삶의 현장에서 현재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길을 안내하고자 한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태 바로 그 안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가령 “주님,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집을 나간 자식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남편을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먹을 것을 주십시오.” “아내를 살려 주십시오.” 등등. 우리 삶의 현장 그대로를 스케치하여 하느님께 기도로 쌓아 올린다. 이를 끊임없이 반복하라. 이것이 삶 안에서 기도를 들여다보는 방법이다. 기도란 일상 삶 가운데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화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 것처럼,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이 체험은 요란하지도 복잡하지도 또 어떤 수준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직 우리의 현장 삶만이 기도의 재료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시는지 그 생생한 현장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타임머신을 타고 2천 년 전의 이스라엘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으로 가보자. 마르코 2,1-12의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중풍병자인 친구를 네 명의 친구들이 들것에 눕혀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데려 가는데, 거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어서 입구로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낸 뒤 그리로 내려 보낸다. 현장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거나 치유 중이셨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 구멍이 뚫리는 천장을 향해 시선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병자를 내려 보내는 이 장면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눈빛이다. 여기서 놓쳐선 안 되는 장면은 예수님이 친구를 들것에 달아내려 보내는 친구들을 보고 감동하는 모습이다. 이를테면 “내가 친구를 향한 당신들의 태도를 보고 어찌 그를 고치지 않을 수 있겠소!” 하는 모습이다.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군중 가운데는 소란을 피운 병자와 그 친구들을 질타하거나 거북하게 느꼈을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바라봐야 할 중점은 그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예수님의 시선이다.
또한 이 장면에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판단 없이 그들의 의로운 행동과 우정,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끝없는 친절을 바라보게 하신다. 바로 이것이 일상에서 우리가 기도를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기도의 훈련이 왜 필요한가? 기도의 훈련이 되면 우리는 일상을 관상하게 되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의 일상을 관상하면 곧 우리의 일상을 관상하게 되고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행동에 감동하며, 일상 안에서 쉽게 놓칠 수 있는 작은 것에 감동하게 된다. 이 작은 감동은 우리를 영감으로 인도하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께 귀 기울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삶의 질곡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 산다는 것, 복잡하고 매우 골치 아플 수도 있는 삶의 여정이 얼마나 기도와 밀접한지 다시 한 번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삶 안에서 기도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생경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삶을 통하여 기도를 해야 하고 또한 삶 안에서 기도를 성찰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등, 나날의 일상이나 사건(생활 사건, 사회 사건, 시대적 사건 등)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의견을 말씀하셨을지 그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다.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감동을 되돌아보면 예수님과 친구들이 통했던 그 지점을 요즘 사회에서 많이 유행하는 ‘공감’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고, 그분의 공감능력을 목격할 수 있다. 공감한다는 것, 연민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판단을 보류한 채 그 현장에 있는 것이다. 현장에 철저하게 현존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7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기도 배움터] 삶 안에서 기도 들여다보기 (2)
지상의 곡물과 과일이 익어가는 8월은 광복절과 성모승천대축일이 있는 달이다. 지난 달에는 복음을 통한 기도 안에서 중풍에 걸린 친구의 해방을 위해 어려운 길을 마다않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는 공동체와, 인간의 의지나 아름다운 우정을 지나치지 않고 감동받으시는 예수님을 만났다(마르 2,1-12 참조). 여기서 우리가 얻는 전망은 복음 이야기가 머나먼 옛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현장 삶이 되고, 우리의 현장 삶이 기도가 된다. 이번에는 예수님과 한 개인의 일대일 대면 내지 일대일 관계 맺기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요한복음 4장)를 통해 관상해보고자 한다.
여행길에 목을 축이고자 우물가에 다다른 예수님과 인간관계에 메마른 한 여인에게는 ‘목마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둘 사이에 목마름의 층은 현격히 다르다. 여기서 층이 다르다는 의미는 예수님과 여인의 첫 만남에서 드러난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라고 요청하는 예수님께 여인은 단순하게 물을 건네지 않고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하며 말을 비껴간다. 목마른 듯 보이는 어떤 사람이 마침 물을 길으러 온 사람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면 그냥 말없이 물을 주면 될 것을, 왜 여인은 예수님께 말을 걸기 시작했을까? 이렇게 여인이 말을 걸기 시작했기에 단순히 물 한잔 주는 걸로 끝났을 만남이 관계로 연계됨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이어서 여인은 예수님께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서 생수를 마련할 것이며, 그분이 자신들에게 우물물을 마련해준 야곱보다 더 훌륭하겠는지 등등을 들어 자기 생각을 나열한다(요한 4,11-12 참조).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르신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물 한 잔을 주제로 여인과 예수님은 평범한 우물로부터 영생을 주는 샘까지 걸어간다. 우리는 이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은 만나는 대상이 누구이든 그의 조건이나 그의 배경을 보지 않고, 상대방의 현재의 필요만 보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호기심에 가득차 상대방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려 연거푸 질문을 하는 여인과는 사뭇 다르다. 도리어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예수님의 관계 맺기를 오랫동안 주시하고 또 이를 반복하여 관상하다보면, 이 복음말씀 말고 다른 많은 복음서 대목들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이처럼 대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 우리가 ‘삶 안에서 기도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살아야 하는지를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과 태도와 행동을 통해 관찰학습을 한다는 의미이다. 곧 기도 안에서 사람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수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보면 현장 삶에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태도가 예수님과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인과 예수님의 이 만남을 정리해보면, 관계의 첫 단계에서 예수님은 형식적 대화를 하신 것이 아니다. 도리어 사마리아 여인 스스로는 자신이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함으로써, 관계의 둘째 단계를 서서히 준비시키신다. 곧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될 것임을 언급하신다. 처음에 여인은 자신이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한 번 마심으로써 다시 물을 찾게 되지 않는다면 더욱 더 이 우물가에 오지 않아도 되니, 사람들과 맞닥뜨릴 일도 없다는 얕은 생각에 예수님께 물을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가르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를 들여다볼 거울이 되어주신다. 곧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너라!” 하고 명함으로써 실제로는 곁에 아무도 없는 그녀가 얼마나 영적으로 목이 마른 상태인지를 비추어 주신다. 그렇게 해주심으로써 여인은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드디어 여인은 “이 분은 예언자이시다. 이 분은 구세주이시다”(요한 4,19.25)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보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점진적으로 새로운 세계 곧 영적 세계로 들어간다. 여인은 변화됐다. 더 이상 땡볕이 내리쬐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오는 여인이 아니고, 오랜 시간 궁리는 많이 했으나 늘 해결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방황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대중 속으로 달려가 거기서 이를테면 “주님을 만났습니다”(요한 4,29)라고 선포하는 여인이 된다.
이렇듯 우리가 성경 이야기에서 발견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어찌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인가?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전망은 기도 안에서 성경을 통하여 삶의 현장을 무수히 바라보다보면, 삶의 현장에서 기도를 들여다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봐야 한다. 인간에 대한 접근방법으로 끝까지 기다리고 존중하고 판단하지 않는 태도, 현재 그에게 놓인 상황 외에 다른 것은 보지 않는 그분의 태도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의 일화를 통하여 한 사람을 해방시킨 분을 알고서 기도에 들어간다. 특히 여인의 열등감과 함께 기도에 들어간다. 그러면 주님이 이를 비춰주실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우리 역시 칩거에서 벗어나 사람들 사는 곳으로 가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우리 안에서도 실제로 변화가 일어난다. 기도의 질이란 우리 스스로가 해석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기도는 능동적이며 활동적이면서 예수님의 태도를 예의주시하는 것이다.
[기도 배움터]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 (1)
지난 두 차례에 걸쳐 우리는 중풍병자와 사마리아 여인의 예화를 통해 우리도 그들과 유사하게 겪는 일, 곧 삶의 현장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기도하는 길을 배우고자 했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훈련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와 삶의 조화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에게 오는 문제는 기도를 하면 할수록 삶에 더욱더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기피하고 자꾸 은둔하려는 현상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활동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기도가 생활화된 삶으로 이어지는 면모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안에서 스스로 각성이 일어나 실천하러 나가는지 아니면 좀 더 기도에만 머물고 싶은지 식별해 볼 필요가 있다. 자꾸 침묵하려 하고 고요함만을 추구하는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와 활동을 조화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를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마냥 신선처럼 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이 보내신 하루와 우리가 지낸 하루가 얼마나 유사한지, 이번 달과 다음 달에는 기도 안에서 그분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또한 기도 안에서 삶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 목표이다. 기도하면서 신약성경의 모든 대목을 가지고 예수님의 삶을 들여다볼 수가 있는데, 우리는 이를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라고 이름 부를 것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치유를 하신 뒤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신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활동하신 뒤 물러가 기도하시는 등(마태 14,23; 마르 6,34) 이를 반복하시는데,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으로부터 기도와 삶이 교차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르 6,45-52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일화를 통해 기도가 삶의 열매로 맺어져야 하는 그 의의를 함께 성찰해보기로 한다.
이 일화에서 예수님은 오후 무렵 제자들을 배에 태워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신 뒤 군중들과 작별을 하고 산에서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미뤄 짐작하건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 그날 있었던 하루의 삶을 말씀드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중에, 큰 바람이 부는 호수에서 제자들이 배가 뒤집힐까봐 밤새 노를 젓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성큼 그들 곁으로 걸어가신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가령 자신이 레지오 마리에 회합을 하는 중이거나 환자방문 내지 신앙을 권면하느라 집 바깥에 있다고 하자. 이때 딸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 냉장고에 밑반찬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 오늘 뭐 먹을 거예요?”라는 식의 말들이 나온다. 마치 큰 바람 속에서 난리치는 제자들처럼 딸이 자신에게 성화를 해대는 상황에서 어떡해야 하는가? 우리는 모험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일단 집으로 가야 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이 있는 배로 가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간다. 집에 갔을 때 “엄마, 밖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동하시느라 애쓰셨어요”라는 말은 기대하지도 않겠지만 자신을 위로해주기보다는 “엄마, 집에 반찬이 떨어지도록 뭐 하셨어요?”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 지금 현실적 삶에 맞닥뜨리고 있다.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의 현장에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오늘 매우 수고했지만, 저는 보상을 얻으려 하기보다 또 다시 새로운 사명을 위하여 집으로 돌아온 저를 의식하게 됩니다. 이런 순간에 당신은 어떤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으셨겠지요. 이것이 사명을 수행하는 자의 모습임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됩니다”하고 기도하며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이러면서 우리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큰 바람을 잠재우는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제자들 곁으로 가셨을 때, 그분은 늘 기도로 무장하기 때문에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모든 것이 잔잔해진다. 엄마가 집에 돌아와서 멸치를 볶을 때 아이들이 안정감을 얻는 것처럼 기도하는 엄마, 기도하는 아빠는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 숨 쉬는 공간에 깊은 안정감을 준다. 이것이 기도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이 곧 기적이 아니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를 극복하기도 힘든데, 기도하는 엄마, 기도하는 아빠이기 때문에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즉시 방향을 돌려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부모가 성당활동을 함으로써 자녀들이 엇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모가 기도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살아감으로써 자녀들에게는 삶의 좋은 모범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엄마, 아빠의 자녀들이 깊은 정서적 안정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열두 명의 제자를 이런 안정감 속에서 양성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좋은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활동 전의 기도, 기도 후의 활동이라는 형태를 예수 그리스도가 지내신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하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조차도 날마다 자주 들여다봐야만 우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한번으로 끝나는 일회성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관상한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가지고도 하지만, 삶 안에서도 관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기도를 계속하다보면 아주 당황스런 상황이 됐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질문을 하게 된다. “예수님, 당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셨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하고 질문하며 기다린다. 그러면 놀랍게도 주님은 현장에서 답을 주신다. 기도와 삶은 손바닥과 손등 같은 관계이다. 이와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음 달에도 계속된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9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기도 배움터]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 (2)
지난달에 이어 우리는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를 계속한다. 기도와 삶은 따로 분리돼선 안 되기에, 우리의 이야기는 좀 더 현실적이며 생생하다. 이번에는 열매를 맺기 위한 여정에 필수조건인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마침 10월은 봄에 뿌린 씨앗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듯 열매를 내어놓는 축제의 계절이다. 유난히 가물었던 봄과 여름을 지나면서 과연 가을에 열매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때가 되니 우리에게 오곡백과가 선물로 주어졌다. 물론 이는 농부의 땀 흘림을 통해 온 것이다. 그래서 10월은 고통을 생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자연은 찬란한 빛을 발한다. 그 찬란함은 고통을 딛고서 광채를 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야 55,10-11).
이 말씀에서처럼 삼라만상은 존재의 목적과 사명이 있으며,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엄연히 그러하다. 각자의 삶의 배경과 경제적 능력 그리고 외모를 넘어서는 개별 삶의 목적과 사명은 무엇일까? 가을의 심오함을 불교용어로 표현하면 ‘방하착’(放下着)이다. 곧 “내려놓아라”, “내버려라” 하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을 묵상하기엔 조금 이른 듯 하나 날씨가 스산해지고 가을이 깊어 가면 모든 것을 버리고 땅으로 사뿐히 내려앉는 가을 잎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떨어짐조차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흙)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반대로 그 떨어짐을 거부할 지라도 때가 되면 반드시 떨어지는 것이 사명을 다한 가을 잎의 현실이기도 하다. 자연의 일부로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방하’(放下)는 나날의 수련을 통해 가능하다. 나날의 수련이란 무슨 뜻일까? 각자의 소중한 일상이 바로 수련이다. 두 사람이 사랑하여 날마다 만났다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혼배성사를 통해 한 지붕아래 살게 된다. 두 사람은 자녀를 낳고 고생스러워도 알콩달콩 양육하고 교육을 시켜 자녀를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수련을 받는가? 특히 중년기를 살아갈 때 우리 자녀들은 우리의 수련장이 되어 우리의 사명을 일깨워 준다.
“낡은 옷에다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기어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6-17).
새로운 세대요 인류인 자녀는 부모의 세대와 매우 다른 삶의 목적과 사명을 부여받았다. 만약 부모가 새 세대 자녀에게 새 가죽부대를 줄 수 없다면, 도리어 자녀에게 새 가죽부대가 무엇인지 묻고 배워야 한다. 지난 세월 어른인 우리가 새 세대에게 크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도 살지 않은 그 많은 덕목을 가르친 것이다. 특히 자녀 가운데 부모의 뜻을 거스르거나 부모에 반하여 거친 행동을 한 젊은 자녀에게 그랬다면, 또 이도 저도 아니고 무기력한 채 부모와 대화조차 하지 않는 젊은 자녀에게 그랬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 낡은 가죽 부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여주기식 일상 또는 보여주기식 신앙생활 등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낡은 부대를 들고서 새 포도주에게 거기에 담기라고 강요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대신 우리가 새 부대를 마련하면 자연스럽게 새 포도주가 거기에 찾아오도록 우리 자신을 수련하라고 초대하신다. 구체적으로 수련이란 자녀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권위에 찬 가르침보다 안아줌으로써 자녀의 좋은 점을 열심히 찾아내 알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새 부대를 마려하는 일이다. 새 부대가 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날마다 거룩한 어머니께 묵주기도를 하면서 청원을 해야 가능한 일이다. 비록 고통스러운 여정이지만 가끔 섬광처럼 짧게 지나가는 자녀들의 뜻밖의 매력이 그 모든 고통의 순간을 건너가게 하는 엔돌핀이 된 체험을 하지 않는가?
필자는 지난 7월 국내에서 개봉된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행복한 추억으로 간직돼온 기쁨이란 것이 사실은 슬픔에서 비롯되었다는 메시지에 오래 머물렀다. 주인공 ‘라일리’가 하키 경기에서 지고 난 뒤 슬퍼하고 있을 때, 부모가 그 아이를 감싸 주고 위로해 주자 슬펐던 순간이 바로 행복으로 뒤바뀐다. 이 영화에는 ‘라일리’의 상상 속 친구 ‘빙봉’이 등장하는데, 라일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 가는 ‘빙봉’을 위로해 준 것 또한 기쁨이 아닌 슬픔이었다. 슬픔이 ‘빙봉’의 우울한 감정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자, ‘빙봉’은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영화의 표현에 따르면, 슬픔은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슬픔이 차지한 내용이 매우 크다. 슬픔 가운데 빛처럼 짧고 강하게 다가오는 삶의 기쁨, 보람, 의미들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한다. “아! 하느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다시 용기를 얻어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리에게 자녀의 성장통보다 더욱 강한 수련은 이제 막 고생이 끝났다 할 무렵 배우자와 황혼 길을 걷고 있는데,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불치병을 얻게 되는 일이다. 이때 우리 인생은 희망이 없는 듯 보이고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것도 힘들어지지만, 우리는 다시 기억으로 초대된다. 영어로 기억을 remember라고 한다. 이는 ‘다시’라는 뜻의 re와 ‘공동체’라는 뜻의 member의 합성어이다. “그렇다! 하느님과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특별한 관계였지!” 하느님과 자신이 한 member임을 다시금 깨우치는 기억으로 초대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시는 듯 느껴지거나 안 계시는 듯 느껴지거나 상관치 않고 우리 삶의 목적과 사명에 함께 하신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10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기도 배움터]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 (3 · 끝)
필자는 지난 1년간 기도의 배움을 나누는 이 지면을 통해 기도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필자는 신학을 전공한 뒤 현재까지 대학생의 인성과 영성교육을 담당하는 사도직에 임하면서 단 하루도 신학공부를 게을리 한 적이 없는 신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며 이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신학공부를 하고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영성적으로 가장 좋은 길을 안내한다하여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란 이러하다. 우선 죽어 사라지거나 죽어가는 모든 것은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살아서 생동하는 믿음이 키워지는 현장은 바로 삶의 수고로움과 고통이 일어나는 매일의 현장이다. 이 현장에서 날마다 기도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비록 기도가 단 한 번 하늘에 쏘아 올리는 주님의 기도라 할지라도 주님의 기도를 날마다 드릴 수 있고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은총이다.
우리가 언제 기도를 소홀히 하는지 성찰해보자. 어떤 이유에서든 삶이 바빠지면서 평탄했던 일상이 와르르 무너질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주님께 봉헌하던 시간부터 줄이거나 포기한다. 사실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바쁜 시기가 지나고 나면 가장 먼저 줄여서는 안 되는 것이 기도시간이었음을 깨우치게 된다. 이에 관해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분의 남편이 명예퇴직을 하여 퇴직금으로 목돈을 벌기 위해 사업에 투자를 하였다. 월급쟁이였던 남편이 사업을 시작했으니, 아내되는 이도 사모님이 되어 보고 전보다는 좀 더 깨끗하고 평수 넓은 아파트에 가서 살 수 있겠다는 꿈을 꾸어본다. 그런데 남편이 사기를 당하여 사모님의 꿈은 사라지고 갑자기 빚더미에 앉은 가족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부부는 나름 꾸준히 해오던 매일미사도 접고 레지오도 접고 겨우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일상의 수고와 고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데 그러다보면 하느님께 드리던 감사의 기도가 원망의 기도로 바뀐다. 그리고 몸과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 기도생활과 성사생활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이들에게 영적시련의 시기가 온 것이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떤 부부는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하여 개미처럼 맞벌이를 하면서 주일에는 주님을 찬양하고 시간을 쪼개어 봉사활동을 하면서 성실하게 살다보니, 차츰 경제적 형편이 좋아지고 여유가 생기게 되자 여가활동과 취미활동, 헬스 및 교양교육 그리고 잦은 여행을 하면서, 주일미사 참례도 소원해지고 봉사활동의 틈새도 잃어버리고 날마다 즐거운 가운데 살아간다.
전자의 경우든 후자의 경우든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 모두는 다시 하느님을 찾게 된다. 그것도 간절하게 특히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병들거나 시간을 다투는 응급한 상황 또는 생사를 가르는 대수술 중일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생생하게 현존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된다. 만약 이런 갑작스런 불행을 과거에 우리가 범한 어떤 행위로 인한 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미신(迷信)이다. 이는 불행이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되지 아니하고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성전에 있거나 놀이터에 있거나 항상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 중에 있거나 불행 중에 있거나 그 소재를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계심을 믿기에 그분께 우리의 심정과 상태를 말씀드리고 마칠 때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는 것을 “아멘!”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사실 이는 주님을 믿는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불행은 우리로 하여금 가서는 안 되는 길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될 때가 많다. 특히나 우리가 신앙생활로부터 좀 떨어져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 수술을 마친 한 자매는 수술 후 가스를 배출하는 방귀가 나와야 하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 방귀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집도한 의사에게 간절히 청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방귀가 나옵니까?” 그랬더니 의사가 답하길 “그냥 걸으십시오.” 그래서 그 자매는 사흘을 열심히 걸었다. 이 병실 저 병실에서는 똑같은 수술을 한 환자들이 방귀를 뀌고 물을 마시고 미음을 먹고 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 자매는 여전히 방귀가 나오지 않아 다시 집도한 의사에게 혹시 약이나 주사로 방귀를 나오게 할 수 없냐고 물었더니, 의사의 답변은 그대로였다. “그냥 걸으십시오. 방귀는 반드시 나옵니다”하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매는 엿새 만에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방귀를 대 방출 시켜주십시오!” 자매는 묵주기도를 하며 걸으면서 방귀를 보내달라고 성모님께도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열흘 쯤 되니까 방귀는 반드시 나온다는 의사의 말이 믿어지기 시작하고, 무엇보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란다. 그렇게 마음이 편해진 저녁에 가족과 함께 저녁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방귀가 “뿡뿡” 오토바이 엔진소리를 내며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매의 귓가에 이러한 말씀이 울렸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르 5,34). 예수님의 옷자락에 달린 술이라도 닿으면 병이 나을 것 같아 손을 살짝 대었던 ‘하혈하는 여인’에게 하신 그 말씀이 바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병은 불행하다. 사기를 당하고 돈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매우 불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병 그리고 불행한 사건에 자신의 영혼을 실어버리지 말라. 오히려 인간적 실수나 기나긴 삶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병이 들었다하여도 그 주제를 기도의 주제로 삼아 우리는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리고 평상시에 날마다 드리는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고 영성적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기도 배움터] 나의 가장 소중한 기도 주님의 기도
얼마 전에 뉴스에서 영화배우 오마샤리프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 배우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유일한 것은 오마샤리프가 ‘베드로’라는 영화에서 베드로 배역을 아주 감동적으로 잘 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 있듯이, 이 영화는 가지고 다니면서 개인적으로도 시간을 내서 다시 보고, 여러 신자분들과도 함께 보자고 이야기하는 그런 저의 소장용 영화 중의 하나입니다. 이 ‘베드로’라는 영화에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박해와 어려움 중에 항상 모여서 바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다른 청원기도를 멋지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베드로와 사도들이 바친 기도는 영화 내내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사도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직접 바치셨던 그 모습을 떠올리고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지금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한 번 해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너무 빠르지 않게 천천히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을 담아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신학생들과 기도에 대해 나눔을 하면서 복음 말씀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이것은 무슨 뜻이고 저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파헤치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복음말씀을 아주 단순하게 읽어보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으로 가르쳐주신 기도인데 그 의미를 알아들으려면 머리를 싸매고 골똘히 생각한 후에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렵게 만들어 주셨겠습니까? 아니지요. 아주 단순하고 쉽게 만들어주셨을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한 구절씩 한 구절씩 충분히 음미하면서 기도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입으로 말했는데, 그 말씀이 너무도 고맙고 기쁘다면,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냥 다급하게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말고 충분히 음미하면서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다보면 우리도 제자들이 했던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으로 당신이 직접 남겨주신 유일한 기도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는 그렇게 소중한 것으로 남아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른 빨리하는 기도, 다른 기도들과 함께 하는 기도, 기도에 대해서 가르칠 때나 공식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기도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기도, 개인적으로 자주 바치는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미사 때 사제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자고 권고하는 이끔말을 기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바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일치시키고,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겸손되이 청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삶을 보다 더 충실히 살아갈 것을 결심했으면 합니다.
다른 모든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 특히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에 관한 책을 쓰신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당신이 마음을 담지도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드린 기도를 왜 하느님께서 마음을 담아서 들어야 하는가?” 그렇지요. 맞는 말씀이지요.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꼭 우리의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담지 못하면 그것은 정말 요란만 떨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기도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기도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기도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음미하면서 바쳐 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 주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기도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한 달 동안 주님의 기도를 마음을 모아 정성껏 바치는 노력을 하면서 지냅시다.
† 어느 수녀원 제의방에 “주님, 이 미사가 저의 첫 미사인 것처럼, 저의 마지막 미사인 것처럼 봉헌하게 하소서”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도인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모아 기도 하나하나를 정성껏 바치려고 노력하면서 이 한 달을 지냅시다.
[기도 배움터] 기도 시간 내기가 왜 이리 어려울까?
제가 아는 어떤 수녀님의 솔직한 고백이 떠오릅니다. “공동체와 함께 정해진 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좋은데, 개인적으로 기도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저는 사제생활을 하면서 기도의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아무리 잘 알아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기도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자리에 앉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문제는 정확히 기도의 필요성이라는 문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기도가 나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기도를 성실하게 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루의 삶을 하느님께 비추임을 받지 못해도, 기도 없이 내가 살아가는데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기도를 계속적으로 하게 될까요? ‘나에게 정말 기도가 필요한가? 기도가 없으면 나의 삶은 의미가 없는가?’ 하는 점을 잘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면, 이제 우리는 기도 생활에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는 기도가 전반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비신자분들과 교리를 하면 시작기도로는 ‘아침기도’를, 마침기도로는 ‘저녁기도’를 바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기도를 어떤 음색과 빠르기와 마음으로 바치는가 하는 것을 전수하기 위해서였고, 세례 후에도 신자로 살아가면서 아침저녁 기도를 꼭 바쳤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몇 번 기도를 함께 바치다가 그 의미를 대략적으로 설명해드립니다.
아침기도는 처음에 성호경을 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 나를 봉헌하는 봉헌기도를 바치지요. 그리고 나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바치면서 그날 하루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가 바로 아침기도입니다.
저녁기도 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작한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가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호경을 하고는 첫 번째로 반성기도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잘못한 부분에 대해 뉘우치며 통회기도를 하지요. 이어서 우리가 믿는 바의 것에 관한 신덕송, 우리가 바라는 바, 희망에 관한 것인 망덕송, 그리고 그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애덕송을 바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사랑에 감사드리고, 주님의 강복을 청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이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는 하루를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주님과 함께 마치는 아주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고해소에서 기도를 소홀히 했다는 말씀을 적지 않게 듣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아침기도를 왜 못하느냐고 일부러 묻기도 합니다. 아침에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못하셨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아침기도를 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지요. 5분도 안 걸릴 겁니다. 5분 내기도 힘들 정도로 바쁘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10분정도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의지의 문제인 것이지요. 하느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와 나 혼자 정신없이 시작하는 하루는 너무도 다르지 않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그분의 기도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시면서도 교황님은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찾으셨습니다. 잠을 줄이고 이른 아침시간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도 함께 해주시길 누군가가 청하자, 이 시간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시간이라고 하시며 그 청을 정중하게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노력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거지요. 아침기도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아침을 조금만 더 일찍 시작하고, 하느님께 잠깐의 시간을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정하면 가능합니다.
저녁기도가 의외로 건너뛰기가 쉽습니다. 가정주부들의 경우에는 식구들을 위해 식사 준비를 하고, 식사 후에는 빈 그릇을 치우고 나면 또 텔레비전의 유혹도 있지요. 정신없이 이것저것 하다보면 저녁기도 하는 것을 잊어버려서 못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전에 저녁기도를 바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너무 빠르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러면 저는 신학교 저녁기도 시간도 5시 30분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직장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저녁에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면서 기도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임에 출발하기 전에, 일을 다 마치고 잠깐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요?
신학교에서는 기도시간 10분 전에 종을 쳐줍니다. 그러면 5분 전에 도착해서 기도 준비를 하게 되지요. 하루는 어떤 형제가 자신이 기도시간 5분 전에 딱 맞춰서 도착하려는 안 좋은 습관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사실 기도 전에 종을 치는 것은 이제 하느님께로 향할 시간이 되었고, 하던 일을 바로 내려놓고 하느님의 집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마냥 의무적인 것으로만 다가온다면, 종소리가 나기 전에 기도하러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조그만 노력이 우리의 삶을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바꾸어주는 거지요.
묵상
+ 한 달을 지내면서 내 삶에 기도가 꼭 필요한가 생각해 보고, 자신의 기도 시간을 찾고 유지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합시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그 만큼 그 가치가 있다. 기도를 적게 하는 사람은 그만큼 가치가 적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가치가 없다.”
[기도 배움터] 반복하는 것이 왜 지루하지요?
어렸을 때 저녁마다 식구들이 모여서 함께 했던 기도가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꾸벅꾸벅 졸면서 엄마 아빠를 따라 묵주기도를 바치고, 벽에 붙어 있던 가정을 위한 기도, 부모를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이젠 다 끝났나 보다 하면 아버지께서 어젯밤에 꿈을 꾸었다고 하시면서 연도책을 집어들기도 하셨습니다. 졸다 따라하다를 반복하면서 힘겹게 했던 그 가족기도가 정말 그립습니다.
초등학생 때 복사를 하면서 친구집에 놀러가면 열심인 친구 엄마가 놀고 있는 우리를 붙잡아 놓고 우리와 함께 묵주기도를 했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놀아야 되는데 친구 엄마는 글쎄 우리를 데리고 묵주기도를 5단씩이나 바치셨고, 친구와 저는 다리도 저리고 지루해서 몸을 비비꼬며 어쩔 줄 몰라 했는데 그 시간도 참 그립습니다. 이런 시간이 그 친구와 제가 사제가 되어 생활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겠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것은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묵주기도입니다. 사실 기도에 대한 글을 써 달라고 하면서 신자분들이 기도하자고 하면 묵주기도만 하시는데 여기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속으로 ‘그거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묵주기도에 대해서도 꼭 나누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부터 연세가 많으신 노인분들까지 어디서나 함께 모여서 할 수 있는 아주 대중적인 이 기도는 그야말로 축복이지요. 모두가 할 수 있는 기도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그런 기도는 아닙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기도로 묵주기도를 꼽기도 하셨고, 묵주기도에 대한 교서인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를 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함께 묵주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소중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임스 마틴 신부님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라는 책에서 자신의 영적지도 신부님이신 도노반 신부님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떤 눈으로 묵주기도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도노반 신부님이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오랜시간 영적지도 경험을 쌓은 뒤라서 어머니가 즐겨 바치는 기도의 방식이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진짜 기도를 가르쳐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왜 묵주기도를 바치세요?”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난 항상 묵주기도를 바치곤 한단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뭔데요?” “글쎄다. 그냥 바치는 게 좋구나.” 도노반 신부님은 더 나은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드리기 위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니가 묵주기도를 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지요?”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나는 하느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느님도 날 보신단다.”』 이 말씀을 듣고 도노반 신부님은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인데, 묵주기도를 통해 이미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신다면 굳이 다른 것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묵주기도가 자신에게 가장 좋다고 느끼면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기도인 것입니다.
이 묵주기도를 어떤 마음으로 바치면 좋을까 하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지요. 요즘같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시대에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묵주기도는 그 구성상 성모송을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이 부분을 힘들어 하는 분들이 계신가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묵주기도는 왜 계속해서 성모송을 반복하는가? 이것이 과연 올바른 기도 방법인가?’라고 묻기도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성모송의 반복을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행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쏟아 붓는 것으로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한 번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하는가? 성모송의 이러한 반복으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성모송의 반복은 … 그리스도와 완전히 동화되려는 의지를 키웁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님께 우리의 사랑을 끊임없이 고백하고, 그럼으로써 예수님을 더욱더 닮으려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다른 한 가지는 묵주기도가 관상기도라고 하는데, 우리는 기도하면서 어디에 집중하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입으로 소리를 내서 말하고 있는 기도문에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묵상하자고 하는 그 신비의 내용에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인가? 로버트 페리시 신부님이 쓰신 관상과 식별이란 책에서 고맙게도 이것에 대한 짧고 명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이 드리는 기도문의 말마디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드리는 기도문을 생각하지 않고, 그 기도문의 의미를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으로 반복해서 그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내 손은 묵주알을 굴리고 내 입은 기도문을 외고 있지만, 내 마음은 어느 특정한 신비에 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희의 신비 제4단을 바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나는 성전에서 봉헌되는 예수님의 신비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문을 외우고 있지만, 나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함께 신앙과 사랑의 눈으로 성전에서 그분이 봉헌되는 신비 속에서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닮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묵상
+ 이번 한 달을 지내면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라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쓰신 교서를 읽어봅시다.
+ 주님께 끊임없이 사랑을 드리는 마음으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려고 노력합시다.
[기도 배움터] 아이들은 겉으로 떠들고 어른들은 마음속으로 떠든다?
초등부 주일학교 아이들과 미사를 봉헌하다 보면 얄미울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미사를 봉헌하는데 자기 친구들과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꿀밤이라도 주려고 신부님이 무슨 얘기했느냐고 물으면 신기하게도 제가 한 이야기를 잘도 이야기합니다. 반면에 어른들과 미사를 봉헌하면 어른들은 집중은 잘 하시지요.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잘 못하시더라구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력이 떨어져 가는 문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속이 시끄러워서 잘 못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인 것 같습니다. 성체조배를 한다든가 묵상을 해 보신 분들은 마음이 시끄럽다는 이야기를 금방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침묵이 훈련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요. 소리기도에만 너무 익숙해 있고 젖어 있는데 반해,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요.
안토니 블룸 총대주교님은 「기도의 체험」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아주 놀라운 체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성탄절 무렵에 양로원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는데, 102세 된 할머니께서 미사 후에 자신에게 와서 물었다고 합니다.
“신부님, 기도에 대해서 좀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이제까지 기도에 대해 안다고 이름난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했습니다만,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102세나 된 할머니가 젊은 새 신부에게, 그것도 이름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니, 이 신부님은 용기가 필요했겠지요. 용기를 내서 할머니께 물었습니다. “할머니,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난 14년 동안 예수기도를 해왔습니다만 하느님의 현존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새 사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만 계속 말씀하고 계시니까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새 사제는 다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침 식사 후에 바로 방에 들어가셔서 안락의자를 어두운 곳에 놓으십시오. 그리고 성화 옆에 조그만 등불을 켜고 가만히 앉아서 살고 계신 방을 둘러보십시오. 그 다음에 뜨개질할 것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서 15분 동안만 뜨개질을 해보세요. 절대로 기도를 하시면 안 됩니다. 그저 뜨개질만 하시면서 방 안에서 평화롭게 앉아 계십시오.”
얼마 후에 그 할머니를 다시 보았을 때 새 사제가 물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해보셨습니까?”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했지요. 일어나서 세수하고 방을 정돈한 다음에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15분 동안 안락의자에 앉아서 아무 일도 안 해도 좋으니 참 좋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무척 조용하고 평화로운 그 방에서는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그 소리가 분심이 되기는커녕 그 소리 때문에 모든 게 더 평온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하느님 앞에서 뜨개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는 점점 더 침묵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침묵이 단순히 소음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침묵 안에 어떤 깊이와 풍요로움이 있었고, 그것이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습니다. 주위의 침묵이 내 안에 있는 침묵과 만나기라도 한 것 같았습니다… 이 할머니는 명상적 침묵 속에 어느 정도 있다가 생각이 흩어지기 시작하면 소리기도를 하고, 또 다시 마음이 평온해지면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곤 했다고 합니다.
침묵은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주변 환경과 마음속이 지나치게 시끄러우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밖에서 누군가와 큰 소리로 다투고 나서 침묵 가운데 머무는 것은 쉽지 않지요. 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의 마음을 가득 담고 침묵 가운데 머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침묵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침묵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외적인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자리를 정돈하고 앉는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지는 않습니다. 또 차분히 가라앉았다가도 다시 분심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이러저러한 생각과 상상들이 우리의 마음속을 시끄럽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좋은 해결방안이 갑자기 떠오를 수도 있겠고, 또 하루를 지내면서 생겼던 일들이 나를 둘러싸기도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기도 중에 분심에 휩싸일 때 어떻게 해야 이 분심을 떨쳐내고 다시 침묵 가운데 하느님과 함께 온전히 머물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분심, 잡념에 휩싸일 때 그것에 무관심한 것이 좋습니다. 그 분심, 잡념을 잠재우려고 애를 쓰며 어떤 노력을 하거나 그것을 치워버리려고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속에 관여하게 된다면 그 문제는 점점 더 커지고 깊어져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떠오른 분심, 잡념을 바라보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마음을 주지 않고 그냥 바라본다면 그것은 점점 힘을 잃고 결국에는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침묵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자리에 앉아 있는다고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이 시기를 지내야 고요한 침묵 가운데서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달 동안 이런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묵상
+ 먼저 내가 기도하는 공간을 좀 차분하게 정리합니다.
+ 하루의 삶을 고요하게 만듭니다. 큰 소리를 내거나 다른 이들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 십자성호를 긋고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머무는 시간을 갖습니다. 가능하다면 15분 정도 머물러 보세요. 분심 잡념에 휩싸일지라도 그것을 흘려보내면서 그 시간을 유지하세요. 그것이 침묵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게 되는 우리의 감각을 키워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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