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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제도(巨濟島) 고대사(古代史) 2015년 작성.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1) 변한(弁韓)과 독로국(瀆盧國)
고대국가의 등장은 철기 시대와 전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강 이북은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이 국가를 형성했고 한강 이남은 마한·진한·변진(변한) 등의 연맹체로 이루어졌다. 거제지역은 마산·김해 지역과 함께 변한에 속해 발전하고 있었다. 변진은 12국의 소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 수장)가 있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라는 부족장 혹은 왕이 있었다. 변한과 진한의 합계가 24국이나 되었다. 큰 것은 4000∼5000호, 작은 것은 600∼700호로, 모두 4만∼5만 호를 이루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웃 지역인 중국, 일본과 교역하였다. 이때 철은 화폐처럼 쓰이기도 하여 상업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철기의 보급과 농업·수공업 생산의 발전으로 삼한 사회도 변동하게 되었다. 또한 변한은 주로 낙동강 이남 지역을 주 무대로 하여 각각 소국들을 형성해 나갔고, 진한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이동(以東)지역을 중심으로 산재해 살았다. 위의 변한·진한에 대한 24국은 『삼국지』 한조(韓條) 변진(弁辰)기사에 나온다. 이 사료에는 변한과 진한을 구분하기 위하여 변진 2자를 첨가하였다.
B·C 4세기부터 A·D 4세기까지, 삼한시대(三韓時代) 변한(弁韓, 弁辰)의 12개국 중 거제도는 독로국(瀆盧國,두로국)이었다. 서기전 BC 94년의 삼한시대에 낙동강 서쪽 경상도를 '변한', 동쪽을 '진한'이라 하였는데 변한에는 12개의 전제군주가 군림하는 작은 왕국을 두었을 때 거제도는 독로국(瀆盧國, 두로국)이라 칭하고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아방강역고에 다산 정약용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거제가 독로(두로)의 이름을 얻고 최초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변한 12개의 토호국이었던 삼한시대였다. 군장이 있어 제정을 통할하였고,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또한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변진전(弁辰傳)기록에 의하면 삼한시대의 낙동강 유역 진한 12국,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 변한 12국 등 변진 24개국(소 지역을 단위로 한 국가임)가운데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이라는 국명과 “기독로국여왜경계(其瀆盧國與倭境界)”라는 기록이 있다. 즉, "변진 독로국은 일본과 경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독로국의 위치가 어딘지에 대하여 부산의 동래설과 거제설이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거제도임이 분명해 보인다. 거제가 동래보다 일본에 실제 더 가깝기도 하지만, 당시 동래에는 '거칠산국', 해운대엔 '장산국'이 있었음이 역사 기록에 뚜렷이 등장하기 때문이고, 또한 고대인의 관점에선 일본과 가장 가까운 독로국(두로국)은 단순 거리가 아닌 해류와 조류를 이용한 현실적이고 실제 사용되고 있었던 거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인 정겸(丁謙)이 말하길, '독로'는 곧 현 경상도 남쪽 거제도이며, 이 섬은 동서 거리가 멀지 않고 고로 경계와 접하고 있다[丁謙曰, 瀆盧, 當卽今慶尙道南巨濟島. 此島, 東西相距不遠, 故曰接界]. 조선의 학자 이학규(李學逵, 1770∼1835)는 ‘거제부에는 변진 때 소국이 있었는데, 독로라 일컬었다. 후에 677년 여기에 상군을 설치했다[巨濟府 弁辰時有小國 曰瀆盧 後置爲裳郡是已]’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거제도 '독로국'의 호수는 약 1000여家 이상, 4~5천명 정도의 인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한의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은 진한의 사로국과 같은 막강한 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다. 독로국과 같은 소국들은 낙동강 이남에 터를 잡고 성장하였으나 독자적인 막강한 종족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고 추정된다.
이 후에 변한은 가야로, 진한은 각각 신라로 발전하는데, 가야 연맹체라는 것은 그 국가 간에 구속력이 없었고 오직 상업적 이해관계 속에서 맺어진 동맹체에 불과하여 거제도는 가야의 실제적인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실제적 중앙정부로부터의 지배는, 관리가 파견된 677년 신라 문무왕 때 상군(裳郡)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경남지역의 변진(弁辰,弁韓)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살며 성곽(城郭)도 있었다. 의복과 주택은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방식은 달랐다. 문의 서쪽에 모두 조신(竈神)을 모신다. 그 중에서 독로국(瀆盧國, 두로국)은 왜(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2국(國)에도 왕(王)이 있으며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장대하다. 의복(衣服)은 청결하며 장발(長髮)로 다닌다. 또 폭이 넓은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 법규와 관습은 특히 엄준(嚴峻)하다. 변진은 왜국(倭國)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었다. 그리고 변진(弁辰,弁韓)의 토지(土地)는 비옥하여 오곡(五穀)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베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사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삼국지에 주석으로 실린 《위략(魏略)》편에서 전하길,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에 나무를 가로로 쌓아서 만들기 때문에 감옥과 흡사하다. 변진(弁辰)의 나라에서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 예맥 왜인(韓·濊·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鐵)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中國)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의 두 군(郡)에도 공급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가야’를 ‘가나’(駕那=머리에 쓰다)와 연결시켜 가야 사람들이 끝이 뾰족한 고깔을 쓰고 다닌 데서 나온 말이고, 중국인들의 변한(弁韓)ㆍ변진(弁辰) 표기도 고깔 모습을 형용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뾰족한 고깔을 썼다하여 가락(駕洛), 가야(伽倻), 가나(駕那), 가라(伽羅)라는 말이 고깔을 의미하는 말로 유추한다.
한편 <연려실기술 신라의 속국(屬國)>편에 의하면 "가라국(加羅國) 지금은 어느 곳인지 상세하지 않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멸망시켰다. 《여지승람》에는 거제(巨濟) 남쪽 30리에 가라산(加羅山)이 있어 대마도(對馬島)를 가장 가깝게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사료를 유추하여 정리해보면, 거제도 독로국 이후, 즉 서기 4~7세기 초까지 '가라국(加羅國)'이 거제남부에 위치했었고 일본과의 빈번한 무역이 행하여진 소국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가야시대 거제도는 경남지역 가야문화의 영향권에 있었고 또한 영향을 많이 받긴 했으나 가야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권에 있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고구려 신라 백제처럼 가야국은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도시국가 연합체인 관계로 남부 해안도서 지방은 각기 독립된 행정을 유지했으며, 거제도 토호세력이 어업과 무역을 기반으로 지역 행정경제를 꾸려나갔다.
2) 거제도의 고대 지명, 독로(瀆盧) 주노(周奴) 상군(裳郡)
예전에 한때 부산광역시 여러 학자나 사학자들이, 독로국(瀆盧國)을 동래 지역에 있었던 고대 소국가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주장한 학자들에게 확인한 결과, 부산(영도)이 대마도와 직선거리가 거제도보다 더 가깝고, 옛 고분이 거제보다 동래가 몇 배나 많이 출토되고 있어 주장했다한다. 이에 그 같은 오류에 대해,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서술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부산지역 대학 교수와 사학자들은 지역 이기주의와 지역 폐쇄성에 갇혀, ‘오분석(誤分析)’의 그릇된 판단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동래지역 고분에서 철기가 발굴되어 이를 주장했다거나, ‘독로’를 음독하면 ‘동내’ 또는 ‘동래’가 되어 그 미칭으로 ‘동래’가 쓰인 것으로 본다는 견해는 억지로 꿰맞추기일 뿐이다. 가장 간단한 역사적 사실을 불확실성 기법을 나열하여 주장하는 형태는 학자적 태도가 아니다. 이들은 중국어 발음이나 고대 우리말은 물론, 남부지방의 여러 정황에 따른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발생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에는 동래보다 거제도가 더 발달한 문화와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조선중기 이후부터 일본과의 무역과 해상교통을 독점한 부산지역이 고대에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이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 3세기 중엽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기독로국여왜경계(其瀆盧國與倭境界)’ 즉, “변진에 독로라는 나라가 있는데 왜(일본)와 경계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기 2세기 전후 독로(瀆盧)라는 말은 현재 우리말로 읽은 것이지, 당시는 음을 빌려 ’음차(音借)‘로 표기한 것이다. ’瀆盧‘ 한자어는 예나 지금이나 ’두루‘라는 중국말로 읽고 있다. ’섬‘이라는 단어는 조선초기에 처음 등장한 단어이고 고대에는 섬을 ’두루(빙 둘러 있다)‘라고 썼다. 그래서 중국말을 아는 분이나 중국 역사학자는 모두 거제도라고 비정하고 있는 이유이다. 동래가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왜와 접하고 있다‘라는 뜻은 단순 거리가 아닌 해류와 조류, 바람(편서풍)을 이용한 현실적이고 실제 사용되고 있었던 거리를 말한다. 왜와 경계하고 있다는 말은 왜국으로 가는 경유지(기착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고대에는 부산에서 대마도로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쓰시마 난류와 해풍의 영향으로 인해, 거제도에서 대마도로 향했다. 이는 항해술이 발달되기 전인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었다(몽고원정, 대마도 정벌, 15C조선통신사). 덧붙여 ’독로국‘의 또 다른 거제도 지명인 ‘주노국(周奴國)’은 ‘두루’ 周에 종 奴를 써서, ‘섬놈 나라’라고 비하하는 말이다. 이후 신라 문무왕대 설치된 상군(裳郡 섬 고을)은 치마 裳을 써, 빙 두른 섬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지명(周奴國, 裳郡)은 모두 한자어 뜻을 가져다 사용하는, 이른 바 ‘훈독(訓讀, 訓借)‘으로 표기한 것이고 ‘독로(瀆盧)’는 음을 빌려다 사용한, ‘음차(音借)‘로 표기한 것이다. 아무리 이런저런 여러 경우를 생각을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독로(瀆盧)를 동래라고 주장한 학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 다음은 각종 문헌에서 등장하는 거제도 비정설(比定說)을 살펴보자. 왜? 거제도인지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거제도가 독로(두루)의 이름을 얻고 최초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변한 12개의 토호국이었던 삼한시대였다. 군장이 있어 제정을 통할하였고,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변진전(弁辰傳) 서기 2세기 기록에 의하면 삼한시대의 낙동강 유역 진한 12국,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 변한 12국 등 변진 24개국 가운데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이라는 국명과 “기독로국여왜경계(其瀆盧國與倭境界)”라는 기록이 있다. 즉 "변진 독로국은 일본과 경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독로국의 위치가 어딘지에 대하여 부산의 동래설과 거제설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거제도가 분명해 보인다.
① 거제도가 동래(부산 영도 제외)보다 일본에 실제 더 가깝기도 하지만, 당시 ㄱ) 진한의 땅인 동래에는 '거칠산국(居漆山國)', ‘내산국(萊山國) 또는 '장산국(萇山國)'이 있었음이 역사 기록에 뚜렷이 등장하기 때문이고, 또한 ㄴ) 고대인의 관점에선 일본과 가장 가까운 독로국(두루국)은 단순 거리가 아닌 해류와 조류, 바람을 이용한 현실적이고 실제 사용되고 있었던 거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ㄷ) 왜와 경계하고 있다는 말은 왜국으로 가는 경유지(기착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고대에는 부산에서 대마도로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쓰시마 난류와 해풍의 영향으로 인해, 거제도에서 대마도로 향했다. 이는 항해술이 발달되기 전인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었다(몽고원정, 대마도 정벌, 15C조선통신사).
②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낙하생집에서 '거제부는 변진 때 소국이 있었는데 ‘독로(瀆盧)’라 일컬었다가 후에 여기에 상군(裳郡)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며[巨濟府 弁辰時有小國 曰瀆盧 後置爲裳郡是已],
③ 청나라 학자 정겸(丁謙)이 말하기를 '독로는 경상도 남쪽 거제도이며 이 섬은 동서 거리가 멀지 않았고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瀆盧, 當卽今慶尙道南巨濟島. 此島, 東西相距不遠, 故曰接界]고 했다.
④ 또한 양주동의 고가연구, 선석열의 경남대 문헌에서 본 가야와 고대 일본에 대하여 거제도에 독로국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 거제 섬은 상당한 세력을 갖춘 해양문화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변진(弁辰)은 가야, 마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계승했는데 당시 변진국에 동래 지역이 포함되지 않았다.
⑤ 중국학자들은 예로부터 모두 ‘瀆盧’를 거제도로 비정하였다. 瀆盧를 중국어로 읽으면 ‘두루’라고 발음하며 고대어 ‘섬’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학자가 모두 거제도로 주장하는 이유이다. 고대에는 오늘날 사용하는 ‘섬’이란 단어가 없었고 대신 ‘두루(두로)’라고 불렀다.
⑥ 독로국의 또 다른 거제도 지명인 ‘주노국(周奴國)’은 ‘두루’ 周에 종 奴를 써서, ‘섬놈 나라’라고 비하하는 말이다. 이후 설치된 상군(裳郡 섬 고을)은 치마 裳을 써, 빙 두른 섬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지명은 모두 한자어 뜻을 가져다 사용한, ‘훈독(訓讀, 訓借)‘으로 표기한 것이고 ‘독로(瀆盧)’는 음을 빌려다 사용한, ‘음차(音借)‘로 표현한 것이다. 근현대의 학자들은 중국어나 고대어를 잘 모르면서, 앞서 발표된 논문을 참고하여 인용하다 보니 ’동래‘라고 주장한 글들이 더 많이 양산되었는데, 지금에야 ‘瀆盧’를 모두 거제도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거제도에는 ‘裳’자 명문 기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상군’(裳郡)과 ‘독로’(瀆盧)의 의미에 대하여 허재영 건국대 교수 기고문을 살펴보자. / 거제도(巨濟島)는 남해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이 섬 이름이 한 때는 ‘상군’(裳郡)이라 불렸다. 뜻으로 본다면 ‘치마’인 셈인데, 이 섬을 ‘치마’와 연관지어 부를 만한 연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최남선의 <동경통지>에서는 거제를 상군으로 부른 연유를 두고 한 구절 설명을 덧붙인 바 있다. ‘치마’를 뜻하는 속어로 ‘두룽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두룽이’라는 말을 문헌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비가 올 때 입는 ‘도롱이’는 짚이나 띠로 만들어 허리에 매어 입었으므로 ‘치마’를 뜻하는 ‘두룽이’가 속어로 쓰였다는 이야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두룽이’의 한자 표기는 ‘독로’(瀆盧)인데 우리말의 ‘도랑’에 해당하는 말이다.(실제 중국어로 '두루'라 읽는다) ‘도랑’이나 ‘두룽이’, 그리고 ‘도롱이’는 모두 ‘두르다’ 또는 ‘돌다’에서 파생된 명사다. 우리말에서 ‘두르다’에서 나온 명사는 흔치 않지만 ‘돌다’에서 파생된 말은 비교적 자주 쓰인다. 예를 들어 ‘도리’는 ‘둘레’를 뜻할 때와 ‘주기’를 뜻할 때 쓰인다. ‘도리 기둥’이나 ‘두리 기둥’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돌려 얹히는 나무를 뜻한다. 거제도의 땅이름이 치마나 비옷을 뜻하는 ‘두룽이’ 또는 ‘도롱이’였던 까닭은 섬 주위로 물길이 돌아들기 때문이었다. 외형상으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독로’, ‘상군’, ‘거제’가 모두 섬의 지형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러한 말이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도 고유어와 한자어의 대응 관계가 성립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⑦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의 『아방강역고(我邦强域考)』「鋪安瀆盧國者 今之巨濟府也 本裳郡 方言裳日斗婁技 與瀆盧聲近(『與猶堂全書』, 景仁文化社, 1969.)」라 하여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설치한 상군(裳郡)은 두루기(斗婁技)와 그 소리가 같다고 하고 독로를 「독로」로 읽지 않고 「두로」 또는 「두루」로 읽어 그 소리가 두루기와 가깝다고 하였다. 그리고 장지연(張志淵(1864-1921))선생은 『我邦疆域考』를 증보하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를 편집하면서 역시 거제도를 독(두)로국(瀆盧國)으로 보고 있다.
⑧ 일본인 스에마쯔(末松保和)는 그의 저서 『임나흥망사(任那興亡吏, 末松保和, 吉川弘文館, 1949)』에서 "다산(茶山)이 수창(首唱)하고 鮎貝房之進이 찬동한(鮎貝房之進,〈俗字巧, 俗文致, 借字巧〉, 太學社, 1952) 거제설에 가담한다고 하였으며, 양주동(梁柱東)선생은 그의 저서 『증정 고가연구(增訂 古歌硏究, 梁往東, 一潮閣, 1965)』에서 瀆盧는 두루, 도로로 읽어 거제임을 밝히고 있다.
⑨ 거제군(巨濟郡)의 사료
○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 거제현조(巨濟郡條)에 「巨濟郡 文武王初置裳郡 海中島也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鵝洲縣 本巨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溟珍縣 本買珍伊縣 景德王 改名 今因之, 南垂縣 本松邊縣 景德王改名 今復故」라 하여 문무왕 때 처음으로 상군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거제군으로 개명하였으며 영현으로 아주, 명진, 송변(多大)등이 있었다고 한다.
○ 『고려사(高麗史),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사료에서도 같은 내용을 싣고 있다. 한편, 건물 보수 도중에 발견된 거제군 동헌건물인 기성관(岐城館)의 객사(客舍) 상량문(上梁文)에서 「우제굉명개권여어북궐(宇制宏明盖權輿於北闕), 두로고도(瀆盧故都‥)」라고 하는 글귀가 발견되어 거제가 독(두)로 고도임을 말해 주고 있는 있는데 이 상량문은 光緖十八年 壬辰九月(1892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함께 나온 또 다른 기성관 상량문에는 「상고지두로건국(‥上古之豆盧建國‥)」이라 기록하여 독(두)로국을 후대에 까지 두로국(豆盧國)으로 발음하고 있었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 동래(東萊)나 부산지방이 고금을 막론하고 해상교통의 요지라는 점과 동래지방에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된다. 그러나 3세기 이전의 유적이 적고 독(두)로국(瀆盧國)은 3세기 이전의 국명(國名)인 현실에서 복천동고분(福泉洞古墳), 연산동고분(連山洞古墳) 등 동래지방의 고분들은 대략 4세기 이후의 것으로 편년하고 있어서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따라서 가령 해당시기의 유적이 있다고 한다면 거칠산국(居柒山國)이나 내산국(萊山國)의 유적이라고 해야지 두로국의 유적이라 함에는 다소 어폐가 있으며 동래라는 지역명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모색되어야 한다. (부산근대역사관장 나동욱 작성문)
이상의 자료에서 주목되는 점은 문무왕 때 처음으로 거제에 상군을 설치하였다는 상(裳 치마, 섬)이라는 군명(郡名)의 유래이고, 다른 하나는 늦은 시기에 해당하지만 기성관(岐城館) 상량문에 독(두)로고도(瀆盧故都) 또는 두로건국(豆盧建國)이라는 문구가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독로국’을 동래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부산 학자들의 자료가 얼마나 터무니없고, 또한 지역이기주의에 매몰되어 한국의 역사까지 왜곡하는지 알 수 있다.
3) 천혜의 해상 경유지 거제도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700년)
1400여년 전 거제도는 일본, 백제, 가야지역의 해상교통의 중간 경유지로써 특히 아주, 지세포, 구조라, 다대포, 율포 등을 거쳐 남해 섬진강 서해안으로 선박들이 이동했다(고인돌 거제도 남쪽 분포지역과 일치). 그 당시에는 거제도를 ‘사도도(沙都嶋)’라 일컬었으며, 그 뜻은 "바닷가 모래가 많은 고을 섬"이라는 뜻으로 제법 많은 주민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거제도는 동아시아의 활발한 해상무역의 중심에 있었으며, 뚜렷한 국가의식이나 영토 경계가 없었던 시기라, 언어 또한 거제도과 일본 대마도 큐우슈우(九州) 북부지방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제도 천혜의 포구들은 문화교류의 접점이자 관문의 역할을 했다. 고대부터 뱃길을 통한 문화의 교류는 매우 활발했다. 물류만이 아니라 외부의 새로운 문화와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포구였다. 흔히 포구주변에는 장시가 열렸으며, 파시와 같은 한시적 장시가 형성되기도 했다. 즉 문물 교류의 장이자 문화 통로의 장, 문화의 거점이기도 한 것이다.
바닷가 특히 해류가 심한 곳에서 자랐거나, 배를 한번 타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고대에는 엔진 동력 없이 편서풍과 해류를 이용해 장거리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의 대한해협에는 연중 쓰시마해류가 북상하고 있다.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700년까지 엄청난 수의 도래인, 반도 이주민이 열도에 정착했다. 이들 또한 대부분 거제도를 거쳐서 건너갔다.
① 만일 김해나 동래 울산에서 일본으로 항해한다고 하면 북동진하는 해류 외에 연중 불어대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쓰시마까지 항해할 경우 동해로 빠져 나가게 됨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해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쓰시마에 도달할 확률이 아주 적다는 것이다.
② 그렇다면 일본으로 건너갈 고대 항로로써 최적지는 바로 거제도라는 사실이다. 거제에서 쓰시마까지 거리는 약 80Km이며, 해류와 조류 및 편서풍을 이용해 바다를 건너 쓰시마 북단에 자연스럽게 도달 할 수가 있는 곳이 바로 거제도 다대포, 구조라, 지세포였다. 고대 항해인들은 처음부터 선수를 쓰시마 남단보다 더 남쪽을 두어 항해 했을 것이다. 물론 바람과 해류의 세기에 따라 항해 중에 선수의 방향을 조정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을 갖춘 거제도는 '김해세력의 외항(外港) 역할'을 했거나 아니면 '독자적인 해상세력의 집단거점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대인의 관점에선 일본과 가장 가까운 독로국(두로국)은 단순 거리가 아닌 현실적이고 실제 사용되고 있었던 거리를 말한다.
③ 또한 고려말과 조선초기, 몽고군의 일본 침략이나 대마도 정벌 時, 모두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로 항해 한 역사적 사실도 이를 뒷받침 한다.
④ 사천시 늑도 섬에서 발굴된 일본 야요이 토기 가마터는 기원전 2세기경 한반도에서 대량으로 토기를 만들어 일본에 공급했을 가능성이 크다. 가마터가 확인된 곳은 후기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의 패총 유적. 이곳에서는 수백 점에 달하는 야요이 토기 조각도 함께 출토됐다. 야요이 토기는 일본 큐슈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중국 일본의 토기 화폐와 같은 생활 유물과 인골 등이 다량 발굴되었고,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 남서쪽 비탈에도 사천 늑도와 똑같은 토기조각과 20cm 두께의 재(炭) 층이 나왔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서해안지역과 남해안 섬진강 유역 등의 물적 인적 자원이 모두 거제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동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4) 포상팔국(浦上八國, 창원~사천까지)의 난. 1차 서기 209년 7월, 2차 215년.
서기 3세기 초에는 경상남도가 북쪽의 가야와 남쪽 ‘포상 8국’(물가에 접한 여덟 나라라는 뜻으로, 이 말은 이름이 아닌 위치를 일컫는다.)’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가야남부의 8개 나라, 소위 포상팔국(浦上八國, 남해, 거제도 제외)은 남해안에 접해 있음에도 해상무역에서 구야국(김해)에 주도권을 넘긴 채 주도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당시 경남 서부해안과 거제도는, 해상세력인 백제계(마한) 문화권에 가까웠으며, 낙동강변 내륙지역은 신라 진한의 문화권에 가까웠다). 구야국이 있는 김해지역은 당대에 고 김해만이라는 천연항구(당시 해수면은 지금보다 약1.5m 높았다)를 기반으로 남해무역의 허브로 기능하고 있었고 포상8국은 가야외의 지역인데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역은 대부분 구야국(김해)에 의존해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포상8국은 골포국(마산)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구야국(김해)에 대항해 느슨한 가야연맹에서 이탈했고 곧이어 209년에 구야국(김해)과 안라국(함안)을 공격하여 가야연맹과 전쟁을 벌였지만 신라의 지원을 받은 가야의 반격으로 1차 전쟁은 패퇴했다. 그렇게 되자 포상8국 중에 고사포국(고성)은 칠포국(칠원) 및 골포국(마산)과 함께 215년 신라의 주요항구인 갈벌(竭火 울산)을 침공했지만 신라군의 방어에 패퇴하고 물러나야 했고 결국 포상8국은 굴복하여 전기'가야연맹'에 부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400년에 '구야국(금관가야)'이 고구려에 패망하여 전기가야연맹이 소멸하자, 포상8국과 같은 연맹국이었던 독로국(전쟁에는 불참)은 뚜렷한 세력권을 형성하지 못한 채, 남가야(김해)가 신라에 투항함과 동시에 독로국도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포상(浦上)’이란? 당시 한자어를 빌려 지명을 표기 할 때, 뜻을 빌려 사용하는 '훈독'과, 음만 빌려 쓰는 '음차'가 있었다. 이 당시에 '浦上'은 포구(강이나 바다 포함)를 낀 육지 고을(부족)이라는 뜻이다. ‘아방강역고’에 따르면 당시 바닷가 용어인 '海上' 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서(섬)지역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환록(東寰錄, 1859년 윤정기)에도 ‘땅의 경계에 있는 포상이란, 바다 섬은 아니라고 전한다. 즉 거제 남해는 포함되지 않는다.[案旣云浦上 不云海中 則今巨濟南海不在計也]’라고 적고 있다.
○ 참고 : 변진 포상8국(弁辰浦上八國) 동환록(東寰錄), 윤정기(尹廷琦, 1814~1879)
포상8국은 모두 변진에 속해 있었다. 가야와 같은 무리이다. 후한서에 전한다. 변진은 변한 남쪽에 있고, 남쪽으로는 왜와 접해 있다. ○ 신라사 물계자전에서 전한다. 포상8국은 함께 가라국 정벌을 모의 했다. [주 가라국] 가라는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왕은 왕의 손자 나음으로 하여금 가까운 고을 6부군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떠났다. 마침내 8국의 군사가 패하였다. 3년 후, 골포 칠포 고사포 3국인이, 갈화성(울산)을 공격하여 왔다. 왕은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고자 출발했다. 3국의 군대가 대패했다. 물계자는 수십여 급을 참획했다. ○ 땅의 경계에 있는 '포상'이란, 바다 섬은 아니라 전한다. 즉 '거제' '남해'는 포함되지 않는다. 현재 포상의 지역은 동으로는 창원으로부터 서로는 사천(곤양)까지이다. 흡사 8읍, 함안, 고성은 본디부터 가야의 명칭이었다. 골포, 칠포, 신라의 역사서에 이미 나온다. 8읍이 포상8국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두다 황수 청수(진주 남강)에 있다. ① 골포[주: 즉 합포 창원에 이제 합쳐진 곳], ②칠포[주: 칠원], ③고사포[주:즉 소가야 현재 고성], ④아나가야[주: 현재 함안], ⑤곤미[주: 변진군미국,현 곤양(사천)], ⑥웅천, 진해, ⑦사천을 아울러 포상8국이라 한다.
[浦上八國者 同是弁辰之屬 而伽倻之同類也 後漢書所云 弁辰在辰韓之南 南與倭接者是也 ○ 新羅史勿稽子傳云 浦上八國 同謀伐柯羅國 [주:卽加羅] 柯羅遣使請救 王使王孫㮏音 率近部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後三年 骨浦漆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案旣云浦上 不云海中 則今巨濟南海不在計也 今浦上之地 東自昌原 西至昆陽 恰爲八邑而咸安固城 本有伽倻之名 骨浦漆浦 已著新羅之史 八邑之爲浦上八國無疑 皆在潢水淸水之南 骨浦[주:卽合浦今合于昌原] 漆浦[주:今漆原] 古史浦[주:卽小伽倻今固城] 阿那伽倻 [주:今咸安] 昆彌[주:卽弁辰軍彌國今昆陽] 竝熊川鎭海泗川爲八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