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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금강경 핵심강좌 제15회 (제십사 관념을 떠난 열반-(2) )제14 이상적멸분-(2)
14.이상적멸분(2) 離相寂滅分(2)<상을 떠나 적멸하다(2)>
수보리 우념과거 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須菩提 又念過去 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수보리여! 여래는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수행자 였는데 그때 자아가 있다는 관념이 없었고, 개아가 있다는 관념이 없었고, 중생이 있다는 관념이 없었고,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없었다.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褥多羅三邈三菩提心.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모든 관념을 떠나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내어야 한다.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형색에 집착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집착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약심유주 즉위비주 시고 불설 보살 심불응주색 보시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 菩薩 心不應住色 布施.
마음에 집착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삶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형색에 집착 없는 마음으로 보시해야
한다고 여래는 설하였다.
수보리 보살 위이익 일체중생 응여시보시
須菩提 菩薩 爲利益 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수보리여! 보살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와 같이 보시해야한다.
여래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여래는 모든 중생이란 관념은 중생이란 관념이 아니라고 설하고 또 모든 중생도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狂語者 不異語者.
수보리여! 여래는 바른말을 하는 이고, 참된 말을 하는 이며,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이고 속임 없이 말하는 이며 사실대로 말하는 이다.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무실 무허.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無實 無虛.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즉무소견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 卽無所見.
수보리여! 보살이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어둠 속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보살이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은 눈 있는 사람에게 햇빛이 밝게 비치면 갖가지 모양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 선남자 선여인 능어차경 수지독송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 善男子 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수보리여! 미래에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전을 받고 지니고 읽고 외운다면
즉위여래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
무량무변공덕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 이 사람들이 모두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임을 다 알고 다 본다.”
須菩提야 忍辱波羅蜜을 如來가 說非忍辱波羅蜜일새 是名忍辱波羅蜜이니라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 설비인욕바라밀 시명인욕바라밀
지난 시간에 ‘인욕바라밀’끄트머리에 순서상으로 보면은 이제 제일 바라밀하면 이제 보시, 지계, 인욕, 이렇게 해야 할텐데, 이게 제일 바라밀이라고 하는 게 이게 난 좀 석연치는 않아요. 흔히 뭐 해석에, 첫째 바라밀이니까 보시 바라밀이다, 그렇게 표현을 전통적으로 해오는데, 아까는 이제 뭐 개인의 수행에 있어서 제일바라밀이 있어야 되고, 제이 제삼바라밀이 각각 다 있어야 된다.
主波羅蜜(주바라밀), 助波羅蜜(조바라밀) 이런 것들도 우리가 사실은 제대로 실천하든 안 하든 간에, 그렇게 정리를 해 드려야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어쩌면 여기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보시를 제일 바라밀로 하면은, 뭐 예를 들어서, 인욕은 제이 바라밀로 할 수도 있고 또 인욕을 제이 바라밀로 하는 사람이 또 보시를 제이 바라밀로 할 수도 있고, 주바라밀, 조바라밀 이렇게 서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이건 이제 원래 화엄경의 이론인데 화엄경은 ‘十波羅蜜(십바라밀)’주1)을 이야기하잖아요. 일반 불교에서는 ‘六波羅蜜(육바라밀)’주2)을 이야기하고, 그래 화엄경은 ‘十波羅蜜(십바라밀)’을 이야기하는데 예를 들어서, ‘十住(십주)’하면은 십주 중에 맨 처음에 이제 ‘發心住(발심주)’ , ‘初住(초주)’라고 해요. ‘초주’는 이제 보시바라밀을 주바라밀을 주로 해요. 보시를. 보시를 ‘主(주)’로 하고, 그 나머지 구바라밀을 ‘助(조)’로 해.
보시만 한다고 지계, 인욕, 안 하는 게 아니지. 안 하면 큰일 나죠.
그러면 주[(主);主波羅蜜(주바라밀)]가 뭐냐? 주는 이제 십주에 초주에서는 말하자면 보시가 ‘主(주)’가 되고 그 나머지 구바라밀은 예를 들어서 전부 ‘助(조)’가 돼. 조바라밀이 되고, 그 다음에 제2주에서는 지계가 주바라밀이 되고 나머지 보시 내지 다른 것은 전부 이제 조가 되고, 조바라밀이 되고 이렇습니다.
그걸 근거로 해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거예요. 우리 생활에서도 ‘아, 나는 주지니까 행정을 주바라밀로 삼겠다’주지 하는 동안은 그래 해야 돼요, 그게.
그 다음에 또 주지한다고, 수행 안 하고 공부 안 하면 되나요? 내가 경전 공부한다든지, 틈틈이 참선을 한다든지 틈틈이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거, 뭐 참선, 경전, 기도 , 세 가지 다 해도 좋습니다. 이건 이제 조바라밀이 되는 거야. 보조적으로. 제일 바라밀, 제이 바라밀, 제삼 바라밀, 제사 바라밀, 이렇게 주욱 이렇게 정리해 놓고 살아갈 필요가 있는 거예요. 뭐 도반들 만나서 좀 노는 것은 저기 한 제 육바라밀 정도로 넣어 놓든지, 아 그것도 가능한 일이고 실제적으로 있는 일 아닙니까? 한 번씩 여행 가야 되니까. 여행도 가고, 바람도 쐬고, 마음도 풀어야 하니까, 그거는 이제 저기 끄트머리에 제 육바라밀 정도로 해놓는 거지. 그래 이제 포교 같은 것은 뭐 제이, 제삼바라밀 정도로 해놓고, 그런 것을 짜야 돼요.
마음속으로 짜가지고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화엄경 논리예요. 그게. 무슨 엉뚱하게 내 혼자 하는 말이 아니라, 화엄경에는 전부 그렇게 돼 있습니다.
뭐 아무튼 여기서는 이제 인욕 바라밀 이야기인데, 두 가지 이야기 있어요.
이걸 전통적으로 두루뭉실이로 한 가지 이야기로 알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배웠고, 지금도 거의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뭔고 하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我於爾時에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아어이시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嗔恨일러니라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須菩提(수보리)야 如我昔爲歌利王(여아석위가리왕)에 割截身體(할절신체)하야
그랬어요.
歌利王[(가리왕;瑠璃王(유리왕)]주3)이 떡 등장합니다. 그 다음에 이제 다음 페이지에 제일 끄트머리에 보면은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요건 ‘또 내가 기억해 보니 과거 오백세에’, 오백이란 낱말 이제 이해하셨겠지요.
무조건 오백입니다. 대개. 오백 이란 숫자가 편해요.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오백년
지금은 세월이 아주 빨리 지나가지만 그때는 세월이 천~천히 가는 시절이라.
오백년이란 상당히 긴 세월이에요. 그래서 그 오백 년이란 게 ‘아, 부처님 가신 지 오백 년이 되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에요, 사실은.
그 때 정말 대승불교가 요원의 불처럼 일어났는데 그래서 그 오백년 기점으로 해서 그렇게 이야기가 많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도 오백 세가 나오고 그래요. 요 두 가지 이야기가 다른 것입니다. 딴 이야기예요.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그런데 이걸 忍辱仙人(인욕선인)주4) 이라고 하니까 인욕선인하고 여기 가리왕하고 같이 보는 거야.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백 세, 인욕선인으로 있을 때, 가리왕이라고 하는 왕이 산책을 왔다가, 궁녀들을 데리고 산책 나왔다가 점심 먹고 졸다가 잠이 들었는데 궁녀들은 인욕선인에게 가서 법문을 듣고 있었다. 나중에 깨어 보니까 말하자면 어떤 인욕선인에게 가서 법문을 듣고 왕은 다 팽겨쳐 놓고, 그래 가니까 왕이 화가 나가지고 그 인욕선인을, 말하자면, 시험하고 ‘니가 뭐하는 사람이냐’, ‘아, 인욕선인 입니다.’
‘그래? 잘 참느냐? ’‘잘 참는다’‘그럼, 팔을 하나 잘라볼까?’, 팔을 잘랐다, 뭐 다리를 잘랐다, 뭘 잘랐다, 이렇게 딱 이야기하고 같이 섞어가지고 이게 보아 왔어요, 그동안. 그래 이게 딴 이야기란 것입니다.
그래 이제 제가 말씀드릴 게요.
옛날 고전에도 같은 이야기로 그렇게 막 과거 몇 백 년 전 스님들도 같은 이야기로 그렇게 두루뭉실로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 인욕선인때 가리왕이 있었다. 그렇게 해.
이거 우리가 뭐 경전의 그 뭐 즉비 정신을 얼마나 우리의 일상에 실천하느냐 못하느냐 그건 딴 문제입니다. 사실은.
각자 개인의 수양의 문제고 어떤 그 자기 인생관의 문제고 그러나 경은 경대로 또 이해를 해야된다고요. 경은 경대로.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我於爾時에
하이고 수보리 여아 석위 가리왕 할절신체 아어이시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신체를 할절당했을 새,
我於爾時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내가 그때 무중생상 무수자상이니라
이 四相(사상)이 없었다 그랬어요. 그러면서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嗔恨일러니라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왜그런고 하면 내가 그때 지난 날,
節節支解時(절절지해시)에,
마디마디 낱낱이 해부하듯이, 말하자면 할절신체를 다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체를 할절했다, 낱낱이 갈라 놓았다 말이야. 손가락 낱낱이 가르고, 발가락 낱낱이 가르고, 팔 다리 낱낱이 가르고, 그랬을 때,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嗔恨일러니라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만약 내가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應生嗔恨(응생진한)일러니라, 그랬어요.
응당히 ‘嗔恨(진한)’을 화를 냈을 것이다. 화를 냈을 것이다.
그랬는데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긴고 하면은, 여기까지 인데,
첫째 이야기,
부처님 일생에, 석가모니 부처님 일생에 있어서 참, 그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서 우리가 보면은 우리보다도 아주 참 기구한 인생을 살았고, 아주 불우하고,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고, 연관과 오욕이 너무 많았던 분이라.
어려서 고아가 됐죠. 어머니가 이레, 칠일 만에 돌아가셨지.
그런데 迦毘羅(가비라) 성이라고 아주 도시국가, 작은 국가야. 그런데 그 이웃에, 인도역사, 그 당시 역사책을 보면은 16국을, 아주 이름을 나열했던 16개의 나라가 있고, 그 다음에 4대 강국이 있어요. 4대 강국. 4대 강국이 있었는데 거기에 코살라국[拘隆羅國;Savatth]이라고 하는 이웃에 코살라국이라고 하는 큰 나라가 있어요.
그래 코살라국에 瑠璃王(유리왕), 여기, 가리[歌利王(가리왕)]라고 했어요, 여기는.(책을 짚으심.)
가리왕이라고 했는데 유리왕이라, 거기는. 그 왕이름은 유리왕이라.
유리왕이 뭐 거기 아주 이야기가 복잡하게 많습니다마는 그 유리왕이 이 석가족, 가비라국, 가비라 성이지, 國(국)도 못된 그런 작은 도시국가인데 가비라국을 삼킬려고 쳐들어가요.
그런데 부처님이 그 사실을 알고 그 정치적 상황을 환~히 알고 있어 가지고 그 이제 군대를 몰고 이제 쳐들어가는 그 길목에 딱 서있었어, 부처님이.
길목에 서 있으면서 그 나뭇잎이 무성한 그런 숲이 있는데 거기 가 있지 않고, 바싹 마른 나무 밑에, 아무 그늘도 없는 거기에 떡 서있었어요. 제자들 몇이 데리고.
그러니까 이게 워낙 부처님이 명성이 높아서 그 코살라국의 유리왕은 그 부처님의 제자를 데리고, 그 쳐들어가는데 딱 있는데, 저 석가족 집안을 내가 몰살하려고 그리고 그 나라를 뺏으려고 들어가는데 참, 재수없게 부처님이 턱 있단 말이야, 중간에, 길에.
그~ 워낙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할까 그 명성, 거기에 굴복하는 거지.
그래서 말에서 내려가지고
‘부처님이시여! 왜 저 무성한 나뭇잎도 많은데 그 두터운 그늘에 가서 쉬지 않고,
왜 여기 이렇게 계시냐?, 그늘도 없는데 여기 바싹 마른 나무 밑에 계시냐?’
하니까, 부처님이 그 때 이제 하는 말이,
“친족의 그늘, 친척의 그늘은 나뭇잎보다, 저 무성한 나무 그늘보다 훨씬 낫단다.”
이런 말을 했어요. 친족의 그늘, 여기 경에 있는 말 고대로 일러 드릴까
“친족의 그늘이 다른 곳보다 시원한 법이지요!”
고렇게, 경에 고렇게 돼 있습니다.
‘저 다른 나무 그늘보다 훨씬 시원하다’
‘친족의 그늘’!
그 아는 사람이 무서워요. 도반을 우리 잘 아껴야 돼. 스승, 상좌 서로 잘 보호하고 아껴야 돼. 그 안다는 사람이, 한 다리라도 가까운 사람이 무서운 거예요.
여기 친족이라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사돈의 팔촌이라든지 전부 석가족을 죽이러 가는 마당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부처님이.
그렇다고 막 데모해가지고 제자들을 전부 몽둥이, 칼 이런 거 들려가지고, 천이백오십인 금강경 때려치워 버리고, 천이백오십인들 전부 칼 들고 해가지고 저놈들하고 싸우자!
요즘 우리 조계종은 그렇게 할거야. (일동 웃음) 그렇게 해왔으니까.
데모 다하고 막 동원해가지고 그래 했으니까.
그런데 부처님, 이게 이제 우리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게.
그러니까 어떤 그런 문제가 있었을 때 우리 정말 불교정신으로서, 나는 아직 불교정신으로서 무장이 못됐지만, 그러나 단체가 움직였을 때는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정신으로 무장해야 돼요.
개인 감정으로 하면 안 돼요. 이건.
불교 정신으로 우리가 대처를 한다면 어떤 태도가 불교 다울까?
어떤 태도가 불교다울까?
늘 부처님이 남도 아닌, 석가족을 도륙하려고 모두 죽이고 그 가비라 성을 통째로 뺏으려고 했던 유리왕, 유리왕을 대처했던 부처님의 자세를 우리가 배워야 돼요.
아무튼 부처님은 그렇게 딱 한마디 했어요.
친족의 그늘이 저 다른 무성한 나무 그늘보다 훨씬 좋단다.
이 말 한 마디에 그 유리왕도 감동을 해. 참~ 미안찮아요. 그러면서 돌아가면서
‘에이, 재수 없이 부처님이 그 길목에 있다니!’ 아마 이런 소리 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돌아갔어요. 그 날은 쳐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꾸 욕심이, 욕심이 불타오르는 거야.
‘저 석가족 저 아주 말랑~한 저 가비라성 조거 내가 석가족 죽여버리고, 저 성을 내, 우리나라에 병합해야 속이 시원할 텐데...’하고 그 욕심이 무역~ 무역~ 그냥 연기 피어오르듯이 피어오르는 거야. 그러니까 못 참고 또 하는 거야.
두 번째 또 부처님이 그 길목에 가 서 있었습니다.
두 번째 또 이 사람이 돌아갔어요.
세 번째 또 이제 그런 일이 또 있었는데 그때는 부처님이 나가지 않았어요.
나가봐야 그때는 이 사람은 될 사람이 아니야. 부처님에게 감동해서 그 가비라 성을 안 쳐들어갈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쳐들어간 거야. 그런 사실을 부처님이 육안으로, 정말 살아있는 눈으로 환~히 본거야.
부처님이 살아생전에 그러한 사건을 겪었는데 이것을 불교정신으로, 불교사상으로 어떻게 해석을 해야 옳으냐, 어떻게 해석을 해야 좋으냐, 어떻게 해석 해가지고 뒷 사람들에게 남겨야 좋으냐!
또 한 가지 중요한 거 있어요.
提婆達多(제바달다) 문제!
제바달다와 같은 그런 문제는 부처님이 또 어떻게 그것을 해석을 했는가?
그래서 뒷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줄 수 있었겠는가?
이 문제는 법화경에서 그걸 해결해 놨어요. 법화경에서!
이거 저기 저 유리왕이 자기 석가 족을 도륙한, 그리고 가비라 성을 다 빼앗아 버린 그런 사건은 금강경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놨습니다. 이게 이제 저기 저 아함경 같은데는 실지로 다 나오는 이야기예요. 저기 저 增一阿含經(증일아함경)이라든지 뭐 비나야 잡사, 율문에 관계되는 그런 그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비나야 잡사라든지, 또 증일아함경이라든지 이런데는 다 나와있는 이야기라.
그런 것들이 이 대승경전에 와서 한번 짚고 넘어가는 거야.
그래 요거는 순전히 그 얘깁니다.
琉璃王(유리왕)인데 가리왕(迦利王;歌利王)이라고 글자를 바꿔놨고, 그러면서 부처님이 자기 친족, 자기 형제자매들을 죽일, 죽이는, 그런 처참한 꼴을 당하면서 부처님은 가슴속에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던가?
여기 보십시오!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하야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신체를 할절당했을 새,
‘割截身體(할절신체)’라고 했어요. 신체를 낱낱이 오리는 듯한, 칼로 오리는 듯한 심정이었다. 또,
何以故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嗔恨일러니라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응생진한
‘節節支解(절절지해)’라고 했어요.
마디마디 잘라내는 듯한, 칼로 마디마디 잘라내는 듯한 그러한 느낌이었다.
그랬을 때 나는 뭐라고?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약유아 상인상중생상수자상
부처님이‘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었다!’
만약에[若有我(약유아)], 그 아상이 있고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應生嗔恨일러니라
응생진한
응생진한, 나는 화를 내가지고 제자들을 거느리고 몽둥이, 칼, 뭐 괭이, 낫 들고 그 놈들하고 싸웠을 것이다. 이걸 부연하면 그런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금강경이니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어요.
요게, 이제 부처님 살아생전에 겪었던 당신의 불우한 삶을 금강경에서 이렇게 해소를 했습니다.
이건 정말 불교사상에 맞게 해결했어요. 이걸 가지고 우리가 요즘 일어나고 있는 불교와 뭐 정치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정말 들고 일어나야 되는가?
막~ 사람들 동원하고 그냥 무슨 다른 어떤 그 민중운동처럼 그렇게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그렇게 할 때, 참 요즘 시대에는 안 할 수도 없고, 이런 걸 보면 할 수도 없고 그래요.
그 다음 두 번째 이야기,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於爾所世에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又念過去(우념과거)에,
우렴 과거에, 그랬어요. 또 기억해 보니 과거에, 이건 이제 그야말로 전설이야. 과거 전생사라고요 이거는.
五百世(오백세)에,
여기는 ‘오백 세’라고 했어요.
作忍辱仙人(작인욕선인)하야,
‘오백세 전에, 인욕선인이 돼 가지고’ 그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욕선인이야기입니다.
於爾所世(어이소세)에,
그때 그 세상에서도 역시,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호라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었다!’
무수자상이었다! 그 때도. 여러분들이 잘 알고 그 전설, 그 때도 역시 그랬었다.
이렇게 두 가지 이야기로 이렇게 분명하게 나눠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렇게 두루뭉수리? 로 한 가지 이야기로 보았어요. 이건 분명히 그랬잖아요.
‘須菩提(수보리)야 又念過去於五百世(우념과거어오백세)에’
又念(우렴), 또 기억해 보니,
또 기억해 볼게 뭐있겠습니까?
한 이야기라면, 한 가지 이야기라면 기억할 게 없거든요. 이거 분명하게 해주시고, 여러분들 다 뭐 각자 사찰에서 금강경 뭐 몇 십번씩 강의했을 것 아닙니까?
是故로 須菩提야 菩薩이 應離一切相하고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是故(시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이,
應離一切相(응리일체상)하고, 응당히 일체상을 떠나고,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니 ,
발심함에 있어서도 상을 떠나야 제대로 발심한다, 그 말이에요. 이건.
발심, 그거 상 안떠나고는 발심이 제대로 발심이 아니다. 발심은 뭐라고? ‘보리심을 발하는 것’인데, ‘그 보리심은 자비와 지혜다’라고 전번에 말씀 드렸죠.
그래서,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그게 (기침하심)발심, 발보리심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자세,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색성향미촉법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발심을 하라!
若心有住면 卽爲非住니 是故로 佛說菩薩이 心不應住色布施라하노라
약심유주 즉위비주 시고 불설보살 심불응주색보시
若心有住(약심유주)면,
만약 마음이 머묾이 있으면
卽爲非住니
즉위비주
머물수가 없어요.
머묾이 있으면 곧 非住(비주), 머묾이 아니함이 된다, 非住(비주)가 된다, 그랬어요.
是故로 佛說菩薩이 心不應住色布施라하노라
시고 불설보살 심불응주색보시
佛說(불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菩薩(보살), 보살은,
心不應住色布施(심불응주색보시)라하노라.
‘마음이 어떤 사물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 라고 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보살의 삶은 베푸는 것이 보살의 삶이다!
그래, 보시가 주바라밀이다, 보살은.
보살은 무조건 그 삶이 주바라밀이 곧 보시다.
물론 지계도 하죠. 그러나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이런 것들은 다 조바라밀, 제이, 제삼 바라밀로 한다, 이 뜻 입니다.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라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
(수보리야! 보살이) 일체중생들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응당히 이와 같이 보시를 하나니,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이 則非衆生이니라
여래 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九, 斷能證無體非因疑)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여래 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참, 좋은 말 나왔네요.
뭐, 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일체, 여래가 말하는 일체제상은 곧 상이 아니다.’
다 아는 이야기고,
그 다음에 우리가 스스로 중생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그거, 오늘부터 이제 중생이라고 하면 안돼요.
又說一切衆生이 則非衆生이니라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又說一切衆生(우설일체중생)이 則非衆生(즉비중생)이야!
나는 중생은 중생이로되 ‘則非衆生(즉비중생)’이라고 하면은 말이 돼.
그런데 그냥, 則非(즉비) 빼버리고 그냥 중생하면 말이 안 된다 이거야.
일체 중생, 중생, 중생, 참! 얼마나 많이 쓰는 말입니까?
그리고 제가 四相(사상)을 이야기할 때 말씀드렸듯이,
‘중생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열등의식’이다. ‘부처와 상대된 열등의식을 가지고 중생상’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열등의식이 다 있어요.
아무리 뭐 돈 많고 지식 많은 사람도 다~ 제 나름의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一切衆生(일체중생)이 則非衆生(즉비중생)이다 ’,
이거 꼭 유념해야할 내용입니다.
나는 그래서 뭐 이왕 우리가 이름을 붙이려면 ‘부처’라고 하자!
‘부처’라고 하자!
그래서 이제 ‘사람이 부처님이다!’하는 그런 그 주장을 하죠.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九, 斷能證無體非因疑)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그래, 이제 이런 이야기 주욱 해놓고, 여기다 이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뭐 방편으로 하는 소리 같이 들리냐?’
그동안 방편 이야기가 너무 많았어요.
금강경 설하기 까지, 방편의 이야기가 너무 많았어요.
그렇다고 이 금강경 이야기까지도 ‘일체 중생이 즉비 중생이다’라고 하는 이 말,
특히 이 말에 대해서 얼마나 참 정말 폭탄선언입니까?
모~두 ‘중생, 하이고 ~ ’, 지금까지도 ‘아이구 ~ 중생이 뭐, 중생이 그러면 그렇지’, ‘중생이 하는 게 그렇지’, ‘중생이니까 봐 주라’고, ‘우리가 중생이니까 봐 주자’고, 이렇게 스스로 중생으로 자처합니다. 그거 좋은 태도 아니에요, 사실은. 절~대 좋은 태도 아닙니다.
뭐 겸손한 데 나오는 것 같으면서도 자기를 비하하고, 어떤 열등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고, 틀림없어요, 그 말은.
틀림없이 열등의식이고, 자기를 비하하는데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그건 인생의 실상, 사람의 실상을 이제 제대로 우리가 이해 못해서 나온 소리 입니
다.
그러니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잘~ 아는 분으로서
‘일체 중생이 일체 중생이 아니다’, 이렇게 하고,
‘내가 방편으로 하는 소리 같으냐?
너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고 하는 것 같으냐? 아니다! ’ 말이야.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須菩提(수보리)야! 如來(여래)는
수보리야! 나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眞語者(진어자)야, 實語者(실어자)야, 如語者(여어자)야, 不誑語者(불광어자)야, 不異語者(불이어자) 야!
이렇게 까지 우리 가슴에 못을 박듯이 같은 뜻인데 다섯 가지 다른 표현으로써 이
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 참 알아 줘야 돼요, 부처님의 이 말씀 알아줘야 돼.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고 하는 이 말에다가 답을 붙여놨으니
중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돼요, 이게.
우리 소의경전을 금강경이라고 하면서도 우리 전통 불자들이 이런 의식에 사로
잡혀 있으면 안 되죠. 참, 여기 중요한 대목입니다.(위로 다시 되풀이)
又說一切衆生이 則非衆生이니라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又說一切衆生(우설일체중생)이 則非衆生(즉비중생)이다’
수보리야 내가 그 말을 방편으로 하느냐?
희망을 주려고 하느냐? 용기를 주려고 하느냐? 아니다 말이야.
‘나는 곧이곧대로, 사실대로만 이야기 했다. 진실하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런 말입니다.
참! 부처님 마음이 아주 잘 녹아있습니다.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法(여래소득법)은 此法(차법)이 無實無虛(무실무허 )하니라
아! 이것도 참 금강경에서 아주 중요한 말이죠.
부처님께서 얻은 바 법, 이치, 부처님이 깨달은 이치는, 그 이치는 無實無虛(무실
무허)다!
실다움도 없고, 그렇다고 허망한 것도 아니다 말이야. 헛됨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十, 斷如徧有得無得疑)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入暗에 則無所見이요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 입암 즉무소견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 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則爲如來가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여인 능어차경 수지독송 즉위여래
以佛智慧로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入暗에 則無所見이요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 입암 즉무소견
여기서부터 줄 그어야 돼. ‘수보리야!~’부터 (웃으심)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入暗에 則無所見이요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 입암 즉무소견
여기까지 한 가지, 그 다음에,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 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若菩薩(약보살)이 心不住法(심부주법)하야,
아닐 不(불)자[心不住法(심부주법)]가 하나 더 들어있어요.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有目(유목)하야 日光明照(일광명조)에 見種種色(견종종색)이니라,
여기까지입니다.
두 가지 상반되는 이야기죠.
내가 금강경에서 또 아주 눈 여겨 보고, 잘, 자주 생각하는 이야기 대목인데,
若菩薩(약보살)이, 만약 보살이,
心不住法(심부주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마음이 어떤 법에, 이 법하면 일체 현상, 일체의 것, 물론 가르침도 다 이 속에 포
함됩니다. 가장 광범위한 해석으로서의 법입니다.
마음이 그런 그 모든 존재에 마음이 머물러서 ‘보시’를 한다고 하면은(기침을 제어하심)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여인 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어떤 사람이 캄캄한데 들어가서 곧 못 보는 거와 같다.
그렇죠. (기침하심- 감기가 심하심에도 괘념치 않으시고 열강하심.)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 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그런데 반대로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若菩薩(약보살)이, 만약 보살이,
心不住法(심부주법)하야,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머물지 아니하고, 주에
집착할 착 까지 붙여서 ‘주착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하면 더 표현이 강하죠.
而行布施하면(이행보시)할 것 같으면 ,
如人(여인)이 有目(유목)하야 日光明照(일광명조)에 見種種色(견종종색 )이니라,
어떤 사람이 눈, 밝은 눈도 가졌어. 그리고 햇빛도 환~하게 잘 비치고 있어.
그래서 온갖 사물을 낱낱이 살펴보는 거와 같다, 그랬어요.
법화경에서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광명으로 표현을 했는데, 광명이 척~ 비쳐.
부처님이 광명을 놓아서 광명이 척~ 비쳐.
그러니까 중생들이 그 광명 비친 자리에 모두 있다가, ‘이 빛이 웬 빛인가?’
그리고 옆을 돌아보니까 사람이 있어. 사물도 있어.
그때부터, 그 빛을 통해서부터, 깨달음을 통해서, 아니, 불교를 통해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부터 내 옆에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는 내용입니다. 알 수 있었다!
불교가 아니면은 진정으로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죠.
빛이란 그와 같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불교는 지혜의 종교고, 그 지혜는 바로 빛으로 비유됩니다.
빛은 항~상 지혜로 비유되고, 그러면 어리석음, 지혜의 반대인 어리석음은 어둠, 어둠으로 비유됩니다.
여기 이제 지혜와 어리석음을(기침 누르심) 나눠놓고 이야기했는데,
말하자면 어디에 主着(주착)하면은 그건 곧 어리석음이 돼죠.
여기는 ‘보시’라고 했지만 ‘일체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보시는 보살의 제 일 바라밀이니까, 일체 행위의 主(주)가 돼
그래서 모든 행위를 보시라고 이렇게 봤을 때, 그 행위는 전부 마음이 어디에 집착하고 그러면 캄캄하다. 아무 것도 못 보는 거와 같다.
어떤 이치도 모르고 ,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반대로, 마음이 어디에 주착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행위를 한다.
而行布施(이행보시),
그러면 환~한 밝은 눈과 밝은 태양 밑에서 모든 사물을 다~ 살필 수 있는 거와 같다.
우리가 여기 오는데 눈도 환하고, 빛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여기 오는데 아무 탈 없이 와. 만약에 캄캄하다면, 올 생각도 못 내고 오지도 못하고 올라고 나섰다간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고 상처투성이 피투성이가 될 겁니다.
그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상처받은, 온갖 상처받는 그런 삶을 산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상처받은 어떤 인생, 상처받은 경험은 뭐라고?
어리석어 그렇다. 어두워서 그렇다. 빛이 없어서 상처를 받았다.
여기 오는데 빛이 없으면 상처받게 돼 있어요. 다치게 돼 있어. 넘어지게 돼 있어.
다리 부러지고, 팔 부처지게 돼 있어.
어리석음으로 인생을 살면은 틀림없이 상처받게 되어 있어.
그런 본인이 어리석어서 그런 거예요. 그 어떤 누구도 잘못은 없습니다. 오로지
본인이 어리석어서 그렇지.
이 사실을 알아야 돼요. 이게 이제 그런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는데 일일이 그거 설명을 못하죠. 그건 이제 각자가 주해를 달아야할 부분입니다, 이건.
아주 대단한 그 내용이 이 대목입니다. 사실.
참, 이거 무서운 말이에요. 어두움과 밝음, 어리석음과 지혜!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여인 능어차경 수지독송
當來之世(당래지세), 앞으로 올 세상,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能於此經(능어차경)에 受持讀誦(수지독송)하면, (능히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일고, 외우면),
則爲如來가 以佛智慧로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즉위여래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
則爲如來(즉위여래)가, (곧 여래는),
以佛智慧(이불지혜)로, 부처님의 지혜로,
그랬습니다.
여기 이제 왜 이제 또,
‘以佛智慧(이불지혜)로 悉知是人(실지시인) 悉見是人(실견시인)한다’, 이렇게 했겠어요?
바로 앞에서 어둠과 밝음, 어리석음과 지혜를 명확하게 이렇게 나눠놓고, 보시를 한다고 했지만 일상생활, 인생을 살아갈 때 그와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마찬가지로 이 경전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수지 독송한다 할 때, 나도 금강경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아니, 금강경의 이치뿐만 아니라 세상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여래도 불지혜로써[以佛智慧(이불지혜)], 깨달음의 지혜로써,
모든 것을 다~ 알아본다[ 悉知是人(실지시인) 悉見是人(실견시인)].
그 사람은 틀림없이 무량무변공덕을 성취할 거야[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하리라].
이건 이제 그 사람은 무량무변공덕을 성취한다고 하는 사실을 다 보고 다 안다, 이렇게도 해석합니다.
토를 ‘~하야’라고 달면은, 다 보고,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보아서, 부처님 뭐 알든 모르든 이 사람은 복을 얻게 돼 있어요. 부처님이 뭐 알아서 꼭 얻는 게 아니라, 그래서 이제 이걸 무량무변 공덕 성취함을 다 보고, 다 안다.
그렇게 이제 뜻으로는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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