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
기독교는 한국에 근대의학과 병원의 기초를 놓고 이후 현대의학으로 발전시켰다.그 주인공들은 알렌,스크랜튼,하워드,헤론 등 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1882년 5월 미국과 한미통상수호조약을 맺은 우리나라는 다음해 7월16일 민영익을 특명전권공사로 한 대규모 견미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한다.제물포항을 출발,요코하마를 거쳐 9월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민영익일행은 한국역사에 이정표를 세울 한 사람을 만난다.바로 감리교목사이자 훗날 볼티모어여자대학을 창설한 가우처박사였다.
가우처는 사절단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상황을 듣고 `은둔의 나라'에 대한 관심과 흥분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는 와일리감독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촉구하고 2천달러를 보냈다.그리고 일본에 있던 맥클레이선교사에게 한국선교를 위해 예비탐사토록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1884년 6월 중순 한국에 들어온 맥클레이는 일본에서 알게된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한국선교와 사업설명을 적은 편지를 건넸다.고종은 1884년 7월3일 병원과 학교사업을 시작하도록 재가한다.
고종의 재가가 난 뒤 중국 상해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미북장로교회의 알렌이 9월20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그는 상해에서 선교사로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한국행을 결심했고 미국공사관 소속의 `공의'라는 신분으로 공사관직원들과 외국거류민들의 주치의로 일하기 시작했다.
알렌이 입국한 2개월 후 한국근대의학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발생한다.갑신정변이었다.1884년 12월4일 김옥균이 중심이 된 갑신정변으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은 가슴과 팔 다리 등에 중상을 입는다.그는 피를 많이 흘린데다 상처가 심해 생명이 위독했으나 알렌이 그를 구해준다.
알렌은 민영익의 환부를 외과적 시술로 처치한 뒤 3개월동안 정성껏 치료해 고종과 민비,한국정부측 인사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된다.
고마움을 느낀 고종은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기 원했다.이에 알렌은 1885년 1월 `서양식병원을 개설하면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건의서를 고종에게 제출한다.이 건의서를 받은 고종황제는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홍영식(재동소재)의 집을 하사했다.알렌은 그해 4월10일 이곳에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개설했다.
`은혜를 널리 펼친다'는 뜻의 광혜원은 보름 뒤 `대중을 널리구한다'는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제중원에는 인천항을 통해 막 입국한 언더우드가 머물며 우리말을 익히기 시작했고 감리교의 스크랜튼이 6월까지 의사로 활약했다.1885년 여름에 입국한 미북장로교 의사인 헤론이나 1886년 여자의사로 처음 들어온 엘러즈도 이곳에서 활동근거를 얻었다.
이처럼 제중원은 초기 한국선교사들의 합법적인 활동무대를 제공하면서 정부관료를 비롯,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한국풍토병에 대한 체계적인 역학조사도 실시했다.
제중원이 문을 연지 2개월이 지나 정동에 시병원이 설립됐다.제중원에서 잠시 일하던 감리교 스크랜튼이 그해 6월15일 정동선교처에 세운 것이다.제중원이 정부지원의 관치병원이었다면 시병원은 순수민간의료소였다.시병원에는 천민환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스크랜튼은 보고서에서 기록했다.
알렌은 1886년 제중원내에 의학교를 설립,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교육을 시작했다.당시 정부는 전국적으로 의학에 소질이 있는 똑똑한 사람들을 올려보내라고 전국 각도에 공문을 보내 16명을 선발했다.3개월 교육 후 4명이 탈락하고 최종악씨 등 12명이 선발된다.최종악씨는 고종의 시의로 활동했으며 그의 손자 최용묵씨가 현재 경희의료원교수로 재직중이다.
1887년 알렌이 외교관으로 직업을 바꿔 미국으로 가고 헤론이 혼자 남아 제중원에서 활동했다.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질병양상,치료법,통계 등을 서양식으로 분류하는 등 의학발달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1890년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고종은 양화진에 외국인묘를 쓰라며 땅을 하사했고 그는 양화진에 뭍힌 최초의 선교사가 됐다.
헤론이 죽은 뒤 제중원은 빈튼에 의해 운영됐는데 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운영이 부실했다.한국정부도 불필요한 관리들을 철수 했으며 병원은 1894년 빈튼의 뒤를 이어 에비슨이 운영을 맡으면서 크게 활성화 됐다.
에비슨은 1895년 미국 록펠러의 고향사람으로 석유사업을 통해 돈을 번 세브란스의 후원을 받아 1904년 서울역 앞에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지었는데 이 병원이 현재 연대의대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했다.
스크랜튼에 의해 설립된 시병원은 1894년 남대문지역의 빈민촌인 상동으로 옮겨 상동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빈민들의 병원으로 의료사업을 했으며 1887년 내한한 하워드는 정동에 보구녀관이란 이름으로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을 설립했다.
이처럼 제중원으로 시작된 기독교의 의료사업은 지방에도 퍼져 나가 1899년 전주에 예수병원이 설립됐고 대구에는 1900년 동산병원의 설립을 가져왔다.그리고 곳곳에 기독교병원이란 이름으로 기독교가 운영하는 병원들이 세워졌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여인석박사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시작한 의료선교가 한국 근대의학의 기초를 놓고 현대의학으로까지 발전시켰다”며 “기독교가 우리사회에 끼친 영향을 재조명하고 21세기 한국사회를 이끌어 갈 주체로서 역량을 다시 키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의학은 이후 일제시대 독일의학을 도입한 일본으로부터 연구중심의 의학이 들어왔고 기독교병원을 중심으로는 미국의 임상중심 의학이 들어와 균형발전을 이룬다.
한국에 처음 근대서양의학을 소개한 기독교는 한국의학사에 큰 인물인 김필순 이용섭 오긍선 이태준 이영춘씨 등을 배출했다.
김필순은 세브란스 1회 졸업생으로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만주로 피신해 이상촌운동을 벌이다 일본군에 의해 독살됐으며 그의 가문은 김마리아 등으로 이어지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를 이룬다.
이용섭은 1919년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3·1운동에 관여한 뒤 중국으로 도피,협화의과대학에서 활동했다.그는 광복 후 초대 보건장관이 됐으며 우리나라에 최초로 정형외과학을 도입했다.
오긍선은 배제학당을 나온 뒤 미국 루이빌 의과대를 졸업하고 미국 남장로교선교사가 되어 귀국했는데 에비슨의 뒤를 이어 한국인 최초의 세브란스학장이 된다.피부과 비뇨기과를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세브란스 2회 졸업생인 이태준은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몽골왕의 주치의로 등용되어 한국인의 명성을 떨쳤다.이영춘은 전북 개정에서 농촌병원을 설립,농촌진료소 학교보건교육을 처음으로 편 인물이다.
처음 기독교 선교사들이 시작한 의료사업은 우리나라 의학발달에 기초를 놓았으며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는 97년 현재 56만4천6백75명의 의료진과 3만1천6백55개의 병의원을 가진 의료중진국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