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1: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
요엘1:15 여호와의 날
이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400년 동안 다섯 명의 예언자들이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후대 예언자들은 선대 예언자들의 선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떻게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고 선포할 수 있는가? 만일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면 400년 동안이나 여호와의 날이 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예언자들은 열 번이나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고 경고했다[욜 1:15; 2:1; 3:14; 옵 15절; 사 13:6; 습 1:7, 14(2회); 겔 30:3(2회)]. 그러나 이 예언자들은 주전 9세기(확실하진 않지만 요엘과 오바댜), 주전 8세기(이사야), 주전 7세기(스바냐), 주전 6세기(에스겔)에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으며 틀림없이 임할 것이라는 점을 거듭 경고했다. 예언자들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사람들과 국가들에 일어날 일들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무서운 최후의 여호와의 날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항상 지적했다.
여호와의 날은 너무 복잡한 주제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다룰 수 없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의 사역과 글에서 여호와의 날이란 주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이란 주제를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하나님이 전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동시에 구속받은 자의 구원과 구조를 완전히 성취하시는 날을 가리킨다.
여호와는 "세계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시 9:8; 96:13; 98:9). 그날에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 14:9).
여호와의 날은 신의 현현의 날, 즉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날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감람산에 나타나실 것이다(슥 14:3-4). 그곳은 그분의 아들 성자께서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신 바로 그 장소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예루살렘은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분은 친히 그분의 백성을 거느리시고 유대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기 위해 그곳에 모인 이방 나라들을 공격하실 것이다(슥 14:3-12; 욜 3장).
여호와와 그분의 대의에 대한 이러한 반역 때문에 아모스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시아가 오셔서 각 개인이 메시아에 대해 어떤 신앙을 소유하고 있든 상관없이 불가사의하게 모든 사람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통속적 개념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이 흑암과 애통의 날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암 5:18-20). 아모스는 이러한 희망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신약에서도 여호와의 날은 계속 논의된다. 여호와의 날은 "그날"(마 7:22; 살전 5:4), “하나님의 날”(벧후 3:12), "진노의 날"(롬 2:5-6), "우리 주 예수의 날”(고후 1:14; 빌 1:6, 10)로 불린다. 이날은 불신자들에게는 공포가 예견된 날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해방과 기쁨의 밝은 날이다.
그러나 이날은 항상 임박성을 지닌다. 비록 여호와의 날은 요엘의 메뚜기 재앙이나 예루살렘 멸망이나 인근 국가들의 침략 가운데서 부분적으로 성취된 것이 사실이나 최후의 궁극적 성취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가능할 것이다.
결국 '여호와의 날'이란 그 내용이 풍부한 용어였다. 여호와의 날이란 하나님이 친히 새로 시작하실 미래 시대를 표시하는 날이다. 이 미래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의 계속된 역사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 이 같은 역사와 예언의 혼합 속에서, 그날이 종말론적(마지막 때) 배경에서 이 땅에 임할 것이라는 요엘의 약속은 하나님이 장차 일어날 일들을 현재에 예시하신다는 점에 의해 더 확실해진다. 이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그날을 예비하게 된다. 그날의 복이 임하면 새 예루살렘이 나타나고 성령이 독특하게 임재하실 것이며 순결과 정화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이 순결하고 깨끗해질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왕국은 여호와의 소유가 될 것이며 모든 대적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출처: 월터 카이저 등, 『IVP 성경난제주석』, pp.337~338.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묵상, 나눔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주관적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보다는 위와 같이 상경 본문과 좋은 주석을 함께 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요엘서>
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 '여호와의 날'은 고통스러운 심판이 찾아올 날을 가리킨다(Young). 메뚜기 재앙을 언급하다가 본문에 이르러서는 종말론적인 여호와의 날을 언급한다. 한편 '여호와의 날'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28-31의 주석을 참조하라. 이 날은 유다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심판의 종말이 임하는 날로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케쇼드 미솨다이'(* )의 문자적 의미는 '전능자에게서 오는 멸망같이'이다. 그 멸망이 불가항력의 존재자에게서 오는 불가항력적 힘이라는 뜻이다.
<박윤선 주석>
욜 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 '여호와의 날'은 고통스러운 심판이 찾아올 날을 가리킨다(Young). 메뚜기 재앙을 언급하다가 본문에 이르러서는 종말론적인 여호와의 날을 언급한다. 한편 '여호와의 날'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28-31의 주석을 참조하라. 이 날은 유다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심판의 종말이 임하는 날로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케쇼드 미솨다이'(*)의 문자적 의미는 '전능자에게서 오는 멸망같이'이다. 그 멸망이 불가항력의 존재자에게서 오는 불가항력적 힘이라는 뜻이다.
<IVP 성경주석: 예언서>
요엘15~20절.
요엘은 백성들의 영적 리더로서 기도의 모델을 제시한다. 요엘의 일관된 관심은 백성들이 뒤따를 본보기를 제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너머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요엘은 6-7절에서 자신의 상실감에 대해 언급하고 9절에서 제사장의 탄식을 언급했던 반면에, 12절에서는 식물의 탄식을 암시했던 적이 있다. 이 기도가 시편에 나오는 국가적 탄식시와 비슷하지만, 시편에서는 대개 군사적 침략에 대한 응답이다(예를 들어, 시 44, 74, 80편).
15절은 '여호와의 날'에 부각되는 고통의 외침인 이사야 13:6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이로써 요엘서 전체를 이끄는 어구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이 어구는 인간사에 대한 여호와의 역동적인 간섭을 뜻한다. '여호와의 날'은 아모스 5:18-20에 처음 등장했는데, 그 곳에서는 국가적인 구원과 축복을 연상시키는 대중적인 의미였던 표현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대치되었다. 예언자들은 이 표현을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했으며, 이사야 13:6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놀랍게도 요엘은 이것을 재적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의 희생자로 그린다. '쇼드'('멸망')와 '샷다이'('전능자)의 언어유희로 인해, 성경 인용 자체가 강력한 선언이 된다. 언어유희는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감정 유발 수단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는 언어유희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요엘은 이미 멸망에 대해 말했다(10절, '황무하고', '말랐고). 이제 요엘은 놀랍게도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거슬러 올라가서, 메뚜기 재앙이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었다고 해석한다['그 날'; '가까웠나니'는, 2:1에서처럼 NIV(will come)보다 NRSV(is coming)의 번역이 문맥과 더 잘 어울린다]. 이 재앙은 언약적 저주의 결과였음이 암시된다(참고. 신 28:38). 재앙이 언약 백성들에게는 종말의 시작이었다.
@장코뱅 더 상세한 설명을 올려 주셔서 도움이 됩니다.
<GODpia 성경주석: 아가페출판사>
여호와의 날=주의 날
예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의 날을 의미한다.
I. 구약
히브리인들은 여호와는 자비의 하나님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믿었다. 즉, 그분은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을, 그리고 불의한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시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그들은 역사 안에서 재현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았다. 여호와는 가나안정복 시대와 다윗의 통치 기간에는 이스라엘의 적들을 벌하셨을 뿐 아니라, 북쪽의 열 지파와 후에 남쪽의 두 지파를 추방함으로써 자기 백성의 배신도 벌하셨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율법을 무시하고, 가나안 땅에서 불의를 행하던 후기 선지자 시대에 이들 선지자들은 구원과 동시에 파멸을 가져오게 될 미래의주의 날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빈번하게 선지자들은 심판과 징계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B.C.9세기의 선지자 요엘은 이날을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는 '크고 심히 두려운'날(욜2: 11), 곧 우주적 변화(3: 15)와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에 대한 심판의 날로 불렀다. 이와 유사하게 8세기의 선지자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부유한 시민들에 대한 심판을 배경으로
이 날을 빛이 없는 어두움의 날과 예기치 않은 재앙의 날로 묘사하였다(암 5:18-20).
북 왕국의 추방 후 B.C. 8세기 선지자 이사야는 남왕국의 우상 숭배를 책망하고, 교만한 자와 힘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은 의의 보응을 지적하였다(사 2:11, 17;참조. 13:6,9).
끝으로, 여호와 날의 선지자로 종종 불리웠던 스바냐(B.C.615년경)는 그 이전 선지자들의 엄한 메시지를 되풀이 하였을 뿐 아니라, 그 범위를 확대하여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그 대상에 포함시켰다(습1:14-18;2:4-15).
선지자들의 중요한 강조점은 주로 심판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위로에 대한 언급도 있다. 요엘은 위협적이었지만 또한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의 안전을 선포하고 있다 (욜 3: 16-17).
스가랴 역시 매우 분명하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을 언급하고 있다(슥 1: 12-14).
따라서 신실한 자 특히, 억압받는 자들은 여호와의 날과 자신들의 정당함을 입증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Ⅱ. 신약
희망과 멸망의 이중적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신약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과 말라기 선지자에 의해 예기된
메시야의 오심(말 3: 1 이하)을 연결시키고 있다. 신약은 약속된 메시야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신약은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인 초림과 재림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날'(빌 1: 6, 10;2: 16)이나 '주 예수의 날'(고후 1: 14;참조. 고전 1:8;5:5), 또는 단순히 '그날'(고전3:13)에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오실 것이다(행 1: 11).
그리하여 그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진실한 자들에게 그는 영생(롬 2: 7)과 구원 (행 2: 21)을 허락하실 것이다. 만약, 신약이 신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완악한 자들에게는 멸망에 대한 분명한 경고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롬 2: 5 이하에서 바울은 파당을 조장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자,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이 예수 초림 때 부분 성취되었고, 재림 때 완전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게 되네요.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은 여호와의 날에 모든 사람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을 거라고 예언했는데 믿는 자도 예외가 없겠군요.
주석의 설명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설명과 함께 성경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한번 잘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정확한 글에 대해서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