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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조선 제19대 왕 숙종 (肅宗 1661∼1720)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4 14.02.17 17: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제19대 왕 숙종 (肅宗 1661∼1720(현종 2∼숙종 46))


 

조선 제19대 왕(1674∼1720). 이름은 순, 자는 명보(明普). 현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다.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繼妃)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현종 8)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고 1674년 즉위하였다. 당시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였으나, 1680년 허견(許堅) 등의 복선군(福善君) 추대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을 등용시켰다. 그 뒤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총애하여 1689년 장씨에게서 왕자(후일의 경종)가 태어나자 세자 책봉문제가 빌미가 되어 남인정권이 들어섰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禧嬪)이 된 장씨를 1690년 왕비로 책봉하였다. 1694년 폐출되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킴으로써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된 반면, 이미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였다(甲戌換局). 그 뒤 노론·소론의 불안한 연정(聯政)이 지속되다가 1716년 노론이 중용되었다. 재위 동안은 거의 사생활과 관련되어 붕당정치가 가장 치열하였던 시기였으나,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 온 사회체제 전반의 복구정비작업이 거의 끝나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경제적인 면에서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고,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으며, 주전(鑄錢)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중앙관청·지방관아 등에 통용하도록 하였다. 대외적인 치적으로는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변에 무창(茂昌)·자성(慈城)의 2진(鎭)을 신설하여서 옛 영토 회복운동을 시작하고, 1712년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국경선을 확장시켰다. 이 시기에는 《선원록(璿源錄)》 《대명집례(大明集禮)》 《북관지(北關誌)》 등이 편찬되고, 《대전속록(大典續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간행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서오릉(西五陵)의 명릉(明陵)이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


남인중심으로의 변화

 

숙종은 예론 정쟁이 발발하자 즉각적으로 부왕의 의견에 따라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을 유배시 켜버렸다. 그것을 기화로 서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조정은 남인에 의해 장악된다. 그러나 기호 세력의 유생들이 집결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 구명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 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선비 사회는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재야 선비 사회의 이같은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숙종의 남인견제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자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 세력을 견제해나갔다 김석주는 원래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제2차 예송 때 남인 쪽을 응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송시열을 제거하자 많은 서인들이 함께 제거되었고 그 때문에 서인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 고 말았다. 급기야는 서인 세력의 발언권이 정계에서 완전히 상실될 지경에 이르자 김석주는 송시열 세력과 다시 손을 잡고 남인을 몰아내려 했다.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짠 계략은 이른바 '삼복의 변'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남인의 영수 허적을 비롯한 대 부분의 남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남인 세력 축출 사건을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환국'이라고 한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장희빈의 득세와 남인의 정권독점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를 서둘러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 데, 서인측이 정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 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 격시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인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 은 사사되기에 이른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이렇게 노론계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 권은 민암, 이의징 등의 남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 서인 대출척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장희빈의 강등과 갑술환국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이것을 기화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 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 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또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무고의 옥과 노론의 대거진출

 

갑술환국으로 조정은 남구만 등의 소론 세력이 장악했으나 이들은 7년 뒤에 발생한 '무고의 옥'으로 노론계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갑술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오빠 장희재가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 가 있어 대신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소론의 남구만이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고 간언해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 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 사 실을 안 숙종은 진노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 또한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비롯한 궁녀 및 무속인들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 때에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용서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의 소론 세력까지 귀양보내거나 파직시켜 정치 일선에서 제거해버렸다. 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 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속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그 밖의 사건들

 

이 후 조정은 노론과 소론의 불안정한 연정이 계속 이어지다가 1711년 윤선거와 유계가 공동 집필한 '가례원류'에 대한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의 저자 논쟁으로 소론측이 위축되자 1716년부터 노론측이 노골적으 로 소론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 사건은 원래 윤씨와 유씨의 집안 싸움이었는데 각자 몸담고 있던 정파가 달랐기 때문에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가례원류'는 원래 '가례'를 본문으로 삼아 의례, 주례, 예기 등 삼례에 관계되는 사항을 뽑아 '원'이라 하고 주희 이 후 여러 학자들의 사례에 관한 예절을 나누어 모아 '류'라 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서인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집필하고 윤증이 증보한 것이었는데 유상기가 저자를 유계 단독으로 표시 하여 숙종에게 품신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윤증은 유상기를 비방하게 되었고 유상기 또한 반론을 제기하며 윤증을 비난했다. 당시는 서인 사이에서 노론, 소론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었기에 이들의 집안 싸움이 확대되어 소론과 노 론의 정쟁으로 번졌고 결국 윤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으로써 소론측이 위축되었다. 숙종 대에는 이미 열거한 당쟁 이외에도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복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오 례 문제를 둘러싼 '고묘논란', 김만기, 김석주, 민정중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에 대한 유생들의 공 격에서 비롯된 송시열의 '임술삼고변' 공방, 존명 의리와 북벌론의 허실을 둘러싼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비롯 된 왕과 신하들간의 충돌, 그리고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일컫는 '회니시비' 등 수많은 정쟁들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소론과 노론 사이에 왕세자(경종)와 왕자(영조)를 둘러싼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숙종의 업적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을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으로써 광해군 이래 계속된 세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또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 지방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 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 공조 및 훈련도감,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전라, 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를 주조 하여 통용케 했다. 숙종 치세에 이루어진 이같은 경제 정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 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 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 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 작업을 끝마쳤다. 이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 치하여 민폐의 첫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군포 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전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 분 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 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 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 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면희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 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00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 131 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신 전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숙종의 용사출척권

 

숙종은 이른바 용사출척권(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이다. 그는 정 국 전환을 뜻하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 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나갔다. 그가 이같은 환국 정치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붕당의 한계성을 정확하게 꿰 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꿰뚫고 있던 붕당의 한계성은 바로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점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하면서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 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그는 환국 정치를 이끌어가면서 허적, 윤휴, 이원정, 송시열, 김수항, 박태보 등 수많은 뛰어난 신하들을 희생시켰 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거나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죽이기까지 했다. 숙종의 이같은 환국 정치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열거해보면,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1680년의 경신환국,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당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통 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701년의 '무고 의 옥'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노론과 소론의 성립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신 세력과 이를 관망하던 세력으로 분리되었 다. 공신 세력을 공서 또는 훈서라고 했고 관망파를 청서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훈서파의 영수는 정사공신 김류였 으며 청서파의 거두는 김상헌이었다. 훈서와 청서로 갈린 두 파는 다시 훈서는 노서, 청서는 소서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둘로 갈라진 서인 세력은 인조 말에 이르러 훈서파는 원두표를 당수로 하는 원당과 김자점을 당수로 하는 낙당으로 분파되고 청서파도 사림의 청의 를 주장하는 사류(사림)들이 중심이 된 산당과 권력 지향적인 한당으로 분리되어 서인은 사분되었다. 그러나 효종, 현종 대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서인이 다시 규합되어 서인 일당이 되었다. 하지만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다시 둘로 갈라서고 말았는데 이것이 노론과 소론이다.
분당의 계기

 

1680년에 발생한 경신환국 때 남인 탄압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남인의 영수 허적의 유악(기름 천막 )남용 사건과 서인 김석주, 김익훈 등에 의하여 고변된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 사건(삼복의 변)으로 남인이 대거 숙청된 이른바 경신환국(경신대출척) 이후 서인은 남인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놓고 일대 지도권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1683년 서인 노장파인 김익훈 등은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추진했는데, 한태동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는 오히려 김익훈을 탄핵했다. 그래서 송시열 등의 노장파는 이 탄핵 상소에 반박하며 소장파와 대립하였고 특히 송시열은 제 자 윤증과 사적인 감정까지 좋지 않아 분파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서인은 노장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소장파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분파되었다. 이리하 여 조정은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붕당이 성립되었다. 노, 소론에 속하는 사람들은 원래 예악의 태두 김장생의 문인들로 구성되었고 한편으로는 청의를 생명으로 하는 산 림 사림들의 정치 집단이었던 산당에 속하였던 서인들이다. 노론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김석주 김수항, 김수홍, 김익훈 등이었고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구만, 박세채, 박태보, 오도일, 윤증, 한태동 등이었다. 서인은 분파 이후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며 정국을 운영해가다가 1689년 노, 소론이 함께 희빈 장씨 소생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대거 숙청되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으로써 실각하게 된다(기사환국). 이 때 노론 의 송시열, 김수항 등이 유배당해 죽고 소론 인사들도 대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5년 후 갑술옥사로 남인이 대거 쫓겨나자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앙악하게 된다. 하지만 희빈 장씨와 관련하 여 1701년 무고의 옥이 일어나면서 소론이 밀려나고 노론이 대거 등용되면서 노, 소론이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며 정국을 운영해나갔다. 그래서 경종, 영조 대에는 노, 소론의 당세가 정국을 양분하는 형국이 되었다. 경종 대에는 주로 소론이 우세한 양 상을 띠게 되는데 대표적인 4대신이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이었다. 그리고 노론이 우세했던 영조 대의 4대신은 민진원, 이관명, 정호, 홍치중 등이었다. 하지만 영조 대 중반에 집권당이던 노론은 장헌세자의 폐위와 사사 사건으로 벽파와 시파로 나누어진다. 벽파는 영 조편에 서서 장헌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 무리였고 시파는 그의 불행한 죽음을 동정하는 무리로 이루 어졌다. 이 때 세력이 약했던 소론은 시파에 가담했다. 이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는데, 영조 대에는 벽파가 우세하였으나 정조 대에는 시파가 우세 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뒤 벽파인 김한구의 딸 영조 계비 김씨가 섭정을 함에 따라 다시 벽파가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순조1년(1801년)에 일어나는 신유사옥을 계기로 시파와 이에 동조했던 남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어 노론 독주시대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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