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노트

[조희자]

   설날을 맞아 작은 노트 한 권을 준비하였다. ‘감동 노트’ 라고 정성껏 새긴 고딕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다. 젊은 날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작은 메모를 남기던 습관은 사라지고 묶은 머리에 저장하려고만 애쓰니 나이를 거스르는 일이다. ‘글감 노트’가 있기는 하지만 ‘감동 노트’는 오로지 마음의 울림이 있을, 경우에만 사용한다. 그리고 ‘감동 노트’는 글감이 되겠다 싶은 소재 거리를 적어두는 게 아니라 마음의 공명이 있는 감사한 이야깃거리라는 명제를 속으로 붙여본다.

   공인중개사사무실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정한 것이 있다. 계약이 종료되고 나면 감사의 의미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일이다. 연세가 있는 분 에게는 두루마리 휴지나 과일을, 젊은 부부에게는 와인을 선물한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생각지 않았던 선물을 받고 무척 기뻐한다. 대가를 바란 건 아니지만 오다가다 차도 한잔하고 가끔은 고구마나 옥수수빵이나 떡을 챙겨주기도 한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얼마나 따뜻한 말인지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어떤 이는 현관문을 삐죽 열고 당연하다는 듯이 물건만 낚아채듯 하고 문을 꽝 닫는다. 또 다른 사람은 ‘저한테 왜 주시는 건데요’라는 당돌한 말투로 따지듯 묻기도 한다. 그때는 특별히 나빴던 기억이 없고 일 처리에 문제가 없었는데 무엇을, 잘못했나 하는 되감기의 시간이 된다.

   일을 하다가 보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성실히 임했으나 무언가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이 있고 가끔은 오해로 인해 불편해지는 고객도 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한 사람이라도 불만을 갖는 것을 참지 못했다. 몇 날을 뒤척이며 스스로 힘들게 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르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완벽한 사람이라도 세상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살 수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신 누군가로 인해 감사하거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을 기억하기로 했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작은 일에 감사할 줄 모르고 멋대로 행동하며 하룻강아지 꼴을 하며 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듣기보다 말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할 말보다 안 해도 될 말을, 더 했으며 삭여야 할 목소리도 감추어야 할 낯빛도 있는 대로 드러내었다. 속으로 붉어진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감동 노트’를 적기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몇 가지 일들이 노트를 채워간다. 노트에는 오탁번 시인의「밥 냄새」란 시를 읽으며,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사릉을 둘러보며 쓴 어느 작가의 글을 읽으며 라는 메모가 오프닝을 한다. 다음 글은 설 특집 다쿠멘터리「소문난 형제들」을 보며 지극한 형제애에 마음이 뭉클거렸던 이야기가 적혀있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인 2월 14일 메모에는 안 의사의 어머니가 옥중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을 읽고 눈물이 흘렀다고 메모 되어있다. 안 의사가 사형선고 후 항소를 하지 않은 이유는 목숨을 구걸하려 하지 말라는 어머니가 보내온 서신 때문이라 한다. 2월16일에는 폴 빌라드의「이해의 선물」을 다시 읽으며 두세 번을 읽어도 마음의 울림을 멈출 수 없었다는 흘림체 글이 널려있다.

   몇몇 적힌 글 모두 선후 순위를 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올림픽 기간과 겹쳐 있었기에 이에 대한 내용이 많다. 소치올림픽의 감동 중의 하나는 20년 넘게 태극마크를 지켜 온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산증인인 이규혁의 스포츠 인생사이다.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에서는 4차례나 우승을 한 이규혁이지만 올림픽에서는 6회 출전했지만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한 불운의 선수다. 그러나 이규혁 선수가 1.000미터 스피드스케이팅을 마친 후 했던 인터뷰는 성숙한 인간은 저런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느꼈다. 소치올림픽에서도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선수로서 마지막 고별무대에서 최선을 다했다. 자신을 응원해 준 사람들에게 링크를 돌며 감사의 인사와 손짓을 보냈다. 취재진의 인터뷰에 목이 메어 눈가가 촉촉하게 젖는 표정은 아쉬움이 진하게 배인 모습이었다.

   “올림픽 메달 때문에 저는 항상 부족한 선수라 생각했고 결국 약간 부족한 선수로 이제 마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올림픽대회 때문에 좀 더 많이 배웠고 좀 더 성숙할 수 있었다. 앞으로 약간은 부족한 선수로서 끝나고 살아가겠지만,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좀 더 노력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의 인터뷰를 들으며 ‘스포츠를 통한 인간의 완성’이란 올림픽 정신에 가장 적합한 선수였으며 올림픽의 의의는 승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라는 올림픽의 강령 속에 가장 적합한 선수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어머니의 말씀처럼 부족한 아들이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당신은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입니다 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도 흥분된 마음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김연아는 쇼트와 프리를 모두 마친 뒤 결과에 상관없이 홀가분하다고 말했지만, 판정의 석연찮음 때문에 국민들은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실수 없이 모든 게 만족스럽게 끝났기에 아무 생각도 미련도 없다며 활짝 웃었다. 경기의 룰이나 용어도 모르는 국민들에게 피겨를 알리고 피겨 여왕의 자리에 오른 김연아 선수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아사다 마오가 쇼트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최악의 경기를 펼쳤다가 프리에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고 나서 울음을 삼킬 때 비록 일본 선수지만 성공을 축하하는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김연아 선수도 프리스케이팅을 마치고 울먹이는 마오를 보고 나도 울컥했다고 하니 동갑나기 라이벌이지만 선수로서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축하와 응원을 한 것이리라.

  ‘감동 노트’를 시작한 첫 달은 명절과 올림픽이 있었던 달이었다. 그래서인지 ‘감동 노트’를 채운 일들은 가족이나 선수들에 관련된 일이 많다. 앞으로 크고 작은 일들이 한 공간을 메워갈 것이다. 한 달을 보낸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누군가에게 감동을 준 일보다 누군가에게 감동받거나 감사할 일이 더 많았다고 생각된다. 항상 자신은 옳은데 남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해쑥으로 한 인절미인데 좀 드셔보세요. 저번에는 고마웠어요.” 진심이 오가는 따스한 목소리에 마음이 녹아든다. 감사하다는 말을 이렇게 감사하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늘 하루 ‘감동 노트’를 장식할 일이 또 생겼다. 참 감사한 일이다.

[조희자]

이 글에서 남 작가 님의 세심함을 알게 되네요. 기운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건강 잘 챙기셔서, 좋은 수필 기대합니다.

[데이빗구]

[조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