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헌 조갑환 선생
고 조갑환 선생은 전남 화순읍 덕촌 157번지
에서 1890년 4월 19일 생으로 300년 세월을
한 시골 전통 선비 가족으로 살아온 조진사
승지 (성균관학관)손자로 태어나 ㅣ2세에 조선말
전국신동으로 소문이나 고종황제시 군부대신
윤응열의 부름으로 춘추강목을 암기하는데
한글자도 틀리지않자 참다운 신동은 시골 터
좋은 곳에서 태어난다며 즉석에서 출생지
덕촌 마을의 큰덕(德)자에 머리 헌(軒)을 넣어 12세 소년에게
군부대신 윤응열 께서 이제는 개화시대가 되니
미국 유학을 권유하였으며 호를 지어 주시었다
우남 이승만 전대통령과 백범 김구 주석등과
깊은 인연으로 왕래가 있었으면서도 선비는
학문으로 자신을 지키며 가정의 맥을 이어간다면서
해방 후에도 화순 대한독립 추성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단한번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평생에 무인을 각별히 좋아하시며 말씀 하시기를
우리 나라의 남북 분단은 동독.서독과 다르다며
반드시 서로 부국강병하지 않는 자는 어느 쪽이든
후일 큰 화를 면치 못한다는 생각을 본 가를 방문하신
무인들에게 말씀 하시면서 1984년
6월에 93세로 타계하셨습니다.
덕헌 조갑환 선생을 회상함
평소에 친동생처럼 여기면서 45여년을 살아온
조기윤 군이 그의 선친 기념관을 제주에 건립하면서
저와 선친과의 인연을 되새겨 추모의 글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듣고 이 글을 씁니다만
덕헌 선생의 큰 이름에 누가 되지않을까 하는
염려가 앞섭니다
제가 덕헌 선생을 처음뵙게 된것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67년 경으로 생각됩니다
그때 저는 월남전에 참전한 후 귀국해서
전남광주에 있었던 육군 보병학교
전투병교 교육 사령관이셨던 송호림 장군 님의
전속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송 장군님을 모신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일요일에
송 장군님을 수행해서 찾아간 곳이 화순의 선생
댁이였습니다
그날을 포함해서 여러 차례 송 장군님께서는
화순을 방문하셨고 그때마다 덕헌 선생께
큰 절을 올리고 가르침을 받으셨고
저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는 하였습니다
그 후 알게된 사실 입니다만
덕헌 선생은 송 장군님 뿐만 아니라
강주 전남 지역에 보직되는 지사 시장은 물론
각 기관의 장과 지역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들이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가르침을 받는
지역의 큰 어르신이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생의 큰 아드님인
조기윤군이 우리 사무실에서 신병으로 보직 되었고 그러다보니 송 장군님께서 출장 중이실때
저 단독으로 기윤군의 안내를 받아
선생께 인사드리고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생께서는 80고령 이셨으나 건강 하셨고
제가 평생을 살면서 잊지않고 실천해온 저의 좌우명이요 생활 지표가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해도 선생과 저 기윤군과 나 사이는
특별할것도 없고 일상 있을 수 있는 평범한 관계였습니다
먼 훗날 들은 말 입니다만
제 인사를 받으시고 난 이후에 선생께서는
기윤군을 불러 저 오대위는 장차 군의 최고
계급까지 올라갈 사람이고 오씨 집안의 중 시조 정도는 될것이며 특히 네가 일생에 한번은 그의
은혜를 받을 것이니 (형제의 인연으로살아라)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그후 제가 육군대장까지 진급했고 지난 1999년부터 6년동안 해주오씨 통합대종회
총재로 한국의 전체 오씨 대동종친회
총재로 2년여동안 한국의 전체오씨 대동종친회 총재로
8년여 동안 종친회 일을 보고있으니
제가 오씨 중시조라고는 할 수 없어도 내 타고난 운명을
어느정도 맞게 예언 하셨다는 생각이듭니다
제가 광주에서 근무를 마치고 전방 생활을 할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큰 수술을받고 군 병원에 입원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기윤군이 이 소식을듣고 아버지 오소령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해 있는데
전역해야할지도 모른답니다
오소령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잘못 보신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문병이나 다녀오너라
하시면서 글을 써 주셨다고 하며 기윤군이
전방군 병원까지 다녀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 글은 8폭 병풍용 좌서 글씨로서 지금도 가보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제가 육군 소장이돼서 12사단장을하고 있을때입니다
기윤군의 아우되는 기전군이 전방으로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당시 서울시 지하철본부에
근무하던 기윤군이 모함을 받아 어려움을 격고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였습니다
마침 내가 아는 후배가 사건을 해결할 수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글을 통해서 기윤군의 누명을 벗게해준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로 기훈 . 기전군과는 친형제 못지 않게 지내고
있습니다만 저와 관련된 선생의 예측은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정확하게 맞았다고 하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제가 육군 중위 계급이였을때 저를
단 한번 보시고서 어떻게 제 앞날을 그토록 정확히
예측 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합니다
이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지 30 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선각자로서 예언가로서 유학의 대가로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생활화 하셨으며 숭조 목종을
강조 하셨던 유지를 받들어서 그 후손들이 제주에
기념 서원을 건축하게 된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면서 선생의 명성과 업적이 자손 만대에
전해지기를 기원합니다
덕헌 선생님 !
선생을 기리는 후손들과 후학들의 지극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후손들은 물론이고
이 나라 이 민족의 번영과
영광을 지켜 주시옵소서!
2007년 .5.15.
대한민국 육군 야전군 사령관
육군대장
남강 오영우
외 할아버님을 기리면서
할아버님! 제나이 벌써 머리 희끗한 70중반이되었어요
당신 슬하에서 철 없이 굴던 50 . 60년전
그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제 연배 분들이라면. 엄격한 가부장적 전통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기억은 별로 없으나
조부님들이 끔찍이도 자신을 예뻐해 주셨던
기억은 있을것입니다
돌아가신 할아버님 께서도 제게 바로 그런 존재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귀여워해줄 사람이 저 뿐인것 처럼
저는 할아버님의 가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을때
하루는 어머님께서 ("애야 할아버님께말씀하시기를 네가 30세가되면 밥걱정은 안하고
50세가 넘으면 신문에 네 이름이 크게난다고
말씀 하시더라")면서 무척 흐뭇해 하신 것이
기억에납니다
저는 예정론을 믿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30세에 제가 천주교 신부가 되었고
또 51세에 평화신문.평화방송 사장이 되었어요
지금은 천국에 계실 할아버님 !
그것을 어떻게 아셨지요?
그 비법을 배워야했는데
방학을 기해 외가에가면 넓은 집이 인사차 들른
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로 항상 붐볐으며
매일 밤 마다 문향에 취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할아버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느라 열중 하던 모습들이 지금도 제 눈에 선 합니다.
그 중에 어떤분은 저에게 넌지시
자네 외조부님께서는 팔재(八材) 여덟가지 재주를 가지셨다는 분이 시라면서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별칭은 물론이고 구필(口筆) 족필(足筆)좌서(左書) 뿐만 아니라
그중 몇 가지는 제 눈으로 직접 본것도있고
또 할아버님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신것도
있습니다만 이 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마을에서
모내기를 할때나 가을 걷이를 할때에는 꼭 외가와
때를 맞추어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할아버님께서 언제 가믐이들고
홍수가 날지를 미리 아셨음을 말해주는 것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게비친 저의 외 할아버님은
선각자로서 항상 책을 옆에두고 유가의 가르침을
생활화 하셨으며 지성으로 조상을 모실것을
강조하시고 이를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평소 할아버님의 삶을 통해 주신 이러한 가르침이
특히 저에게는 사제생활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
이밖에도 할아버님은 풍수지리설 관상학등을
활용한 예지력으로 후학 들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해주신 분 이기도 하셨습니다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신지 어언 30여년이
이렇게 추억에 잠기며 그때를 되돌아보니
그지없이 행복했던 그 시절이 새삼 한없이 그립습니다
할아버지!
비록 제가 할아버님께서 바라시던 (신부되는것을반대하심)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당신의 가르침 만은
제 삶 속에 면면히 살아있습니다
부디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고
못난 이 손자를 위해서도 늘 기도해주십시요
뵙고싶습니다.
2015년 7월 1일
카톨릭학교법인
라파엘 몬시뇰
박신언.
- 출생
- 1942년, 전남 화순
- 소속
- 전 가톨릭학원 교구장대리
- 학력
- 서울대학교 국가정책과정 수료
左)남강;오영우 명예총재님 오남열 제24대 오씨대동종친회 총재님
남강 오영우 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