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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좌우 앞에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두 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 충만한 곳에 무엇이 충만할 수 있다 바로 사단이 충만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선줄로 생각할 때에 항상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듣는 마음, 듣는 귀가 있어야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하게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단이 범접할 수 없는 말씀 성령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 앞에서 거짓말을 했지만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대하든지 하나님께 대하듯 해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사실 제가 간사님하고 대화를 하는데 간사님 모습에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면 제가 거짓을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거짓된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간인 것이죠. 감히 누가 내 앞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이 있는데 거짓을 행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람에게 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진심을 다해 하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누구를 대하든지 주께 대하듯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몇 가지 적용을 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사탄이 가득하게 되면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없게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전장에서 우리가 아시는 바와 같이 바나바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 이름에 대해서 위로의 아들이라 그렇게 소개해 준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실제로 성령 충만하여서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오늘 본문에 소개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나니아라는 이 이름을 보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여호와께서 보호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이름대로 이가 살지 못했던 것이죠. 그의 이름대로라면 사실은 아나니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했던 것이죠. 사도 앞에 홀연히 죽어야 하는 안타까운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그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삶으로 증명해내야 했던 것이라는 거예요.
또한 그의 아내 삽비라의 이름도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아름답다는 청옥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여성분들이 매우 좋아하고 매우 잘 아는 사파이어 모르시나요? 사파이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의 죽음은 정말 아름답지 못한 최악의 죽음이었다라는 것이지요, 즉 이 부분은 사단이 가득하여서 사탄의 지배를 받음으로 인해 이름에 걸맞는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는 말씀해 주지 않습니까?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니다.
그렇게 소개를 해 주었던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셨다는 거예요.
이제 자기의 이름을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나는 내 부모가 지어준 이름,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다 이름의 의미가 있잖아요. 저도 의미가 있는데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저와 여러분들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여받은 이름이 있죠. 그것은 바로 성도라는 이름이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을 의미합니다. 즉 구별된 삶을 요구하는 단어이죠.
그런데 문제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성도이지만 행동은 전혀 거룩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알렉산더 대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휘하에는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어요. 왕과 병사가 이름이 같은데 그 병사는 매우 게을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모습은 매우 형편없는 삶을 살았던 거예요.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먹칠하고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어느 날 알렉산더 대제가 알렉산더 병사가 있는 막사를 찾아가 그에게 명령을 합니다. 자네 이름이 알렉산더라지 그렇다면 자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자네의 생활 태도를 바꾸도록 하게 그래서 그 이름의 오욕을 씻도록 하여라 그렇게 명령을 했어요.
그렇습니다. 이름을 바꾸든지 이게 왕의 입장에서는 이 이름을 바꿔서 이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든지 아니면 생활 태도를 바꿔서 야 알렉산더는 이렇더라는 칭송을 받든지 두 가지 하나 선택해라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에게 부여해 주신 성도라는 이름 여러분 이 이름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이 성도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것은요. 그냥 되어지지 않습니다. 성도 그렇구나 하고 있으면 되어지는 게 아니에요.
성도의 삶을 살고자 하는 생각과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죠.
북유럽 숲속에 가면 흰담비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옛부터 귀족들이요. 이 담배의 하얀 모피를 매우 좋아했대요. 그래서 이 목표를 잡아서 지금 담비를 잡아서 하얀 모피를 사용하는 것을 즐겨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흰담비의 특징 중에 하나가 본능적으로 자기의 흰털을 더럽히지 않는 거예요. 강한 의지가 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흰담비를 잡으려는 사냥꾼들은 이 흰담비의 털을 얻기 위해서 구의 굴을 먼저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굴 안팎으로 더러운 검은색을 막 칠해 놓는 거예요. 마침 수풀 속에서 사냥개가 흰담비를 발견해서 쫓기 시작하면 이 흰담비는요. 어김없이 자기 굴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거예요.
여러분 이 흰담비가 개의 충격을 받으면서 얼마나 열심히 달렸겠어요? 죽기 살기로 달렸을 거예요. 왜 살아야 하니까 내가 분명히 살아야 된다. 내 굴로 들어가야 된다. 그러한 마음으로 열심히 달려가 굴 앞에 딱 도착했을 때 그 더러운 것을 보고요.
야 내가 이 더러운 것을 묻히고 뿌려서 사느니 내가 차라리 저 개와 맞서 싸워 죽노라 하면서 등을 돌이킨다는 그러면 사냥꾼들이 그것을 보고 와서 인간들을 잡아서 가죽을 베끼고 그 코를 쓴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미물인 짐승도 자기 하얀 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목숨을 건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데, 우리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짐승보다 더 이상은 제가 얘기하지 않아 앞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바벨론으로 포벌로 잡혀갔던 다니엘을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그는 왕이 준 산해진미를 거절합니다. 그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정한 거예요.
사실 그것은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이 거절되어지는 순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죠. 뜻을 정한 다니엘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용기를 내어서 당시에 환관장이었던 자에게 간청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다니엘이 했던 선택과 요청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뜻을 정했고 한 관장에게 요청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이후에 다니엘서 1장 9절에 보니까 이런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다니엘서 1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니엘과 같이 거룩한 삶을 위해 뜻을 정하여 그 뜻을 실행하는 용기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상황 가운데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심을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두 번째 교훈은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죄 없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죠.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기록되어져 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반면 성경은 그런 자를 향해서 이런 말씀을 주세요.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부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
따라서 우리는 죄인이라서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 되지 못했기 때문에 즉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셔서 그 중앙에 딱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여러분 예수님만 계셨나요? 아니죠? 그 좌우편에는 행악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예수를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니 그리스도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해 봐라.
그러자 한편에 있던 행악자가 글을 꾸짖으며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아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마땅히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분은 아무 잘못이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 행악자는요. 예수님께 향하여서 간절히 간청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의인인 것을 고백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요. 모든 사람이 아무도 멸망받지 않고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재림의 주님이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오래 참고 계시는 것이죠.
하지만 분명한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죠. 주님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는다는 것, 마지막 때가 분명히 있다는 것 그때가 오면 그 심판 앞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예외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도요.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비라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나니아 같은 경우는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 삽비라 같은 경우는 분명히 기록해 주셨어요.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우리 8절 말씀 한번 읽어보실까요? 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얘 이것뿐이니라 하더라.
베드로가 땅 판 값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 물을 때가 어떤 때예요? 회개의 기회가 있을 때이죠. 만약 삽비라가 베드로의 질문을 듣고 잠시만요 마음에 갑자기 감동이 사실 땅을 판 금액이 이만큼인데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이런 마음이 들어서 이만큼을 좀 숨겨두고 왔습니다고 말했다면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면 죽음이라는 최악의 결과는 면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죠. 삽비라는 회개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의대에 맞을 만한 때에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렇습니다. 지금 해야 하는 거예요. 은혜도 지금 받아야 되는 것, 구원도 지금 받아야 하는 것이죠. 왜요? 내일 일을 모르잖아요. 여러분 내일 삶이 보장돼 있는 사람 있으십니까? 우리 단 1분 앞도 알 수가 없어서 살아가는 연약한 인생인데 어떻게 우리가 내일 일을 보장할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회는 지금이에요. 이 지금을 놓치지 않고 기회가 있을 그때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 이 사건으로 온 교회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거예요. 5절에 보시면 아나니아가 엎드러져 혼이 떠나가자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고요. 11절에 보면 삽비라가 남편 옆에 장사됨을 듣게 된 온 교회와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다.
이 11 구절 가운데 두려워했다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번 따라해보실까요?
신앙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요.
신앙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세상보다 힘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문이 열려야 영안이 열려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주전 9세기 중엽의 아람 왕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전쟁 중에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전술 가운데 이곳저곳 지명을 치고 군사들을 매복시키게 되었죠. 그런데 그 당시 이 이스라엘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근데 이 엘리사가 그 매복하는 것을 다 알고 누구에게 알려주냐면 이스라엘 왕 여모라에게 알려주는 거 여러분 외복을 했는데 매복의 위치를 다 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작전은 실패 아니겠어요? 무조건 실패죠. 어떻게 이길 수가 있습니까? 매복 군사들이 계속 낭패를 당하게 되자 이 아람 왕 베나다은 심기가 불편한 거예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야 이 내 통자가 이 안에 있겠구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막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내통자를 빨리 찾아오도록 해라고 이야기하죠.
그러자 아람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 아주 조심스럽게 왕에게 이야기합니다. 해야 우리 중에는 반역자가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유명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데 선지자는 죽음께서 침실에서 속삭임에 이야기까지 이스라엘 왕에게 전부 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베나가 왕 그렇다면 우선 그 자부터 처리해야 당장 그 선지자의 행적을 알아보도록 해라. 이는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도단 성읍에 있다라는 보고가 올라오게 됩니다. 그러자 왕은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들을 그곳에 파견하게 됐습니다. 그들은 밤을 틈타서 도단 성읍을 장악하게 됩니다. 사방을 포위하게 된 것이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가 눈이 휘둥글해진 거예요.
왜냐하면 아람의 수많은 병거부대와 군사들이 도단 성읍을 에워싸고 있는 아주 무시무시한 광경을 실제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사관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우리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어찌할 줄을 몰라 하니까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 편에는 훨씬 강력하고 많은 군대가 있느니라.
아니 무슨 말씀하십니까? 지금 우리 편에 무슨 군사가 많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엘리사는 사관에게 더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이 사안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주님의 큰 군대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순간 사관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열린 눈으로 보니 도단성읍 주변에 온산에 가득 채운 수많은 불말과 불평거가 엘리사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안을 열어보면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진치고 있는 천군 천사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시편 기자가 고백합니다. 27편 1절 말씀 우리의 고백으로 함께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작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할렐루야 독일의 루터교 목사 벤게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두려워합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일을 두려워하라.
여러분 하나님의 크심을 보는 사람, 작은 세상으로 인해서 절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보는 사람, 죽음의 고통으로 인해서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를 보는 사람, 이 땅에 없어질 것으로 인해서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그것을 듣고 본 모든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의 눈을 열어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동시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범으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한 삶으로 살아갈 때에 히브리서 12장에 기록된 믿음장에 기록된 사람들처럼 자신의 생명을 걸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오늘 세 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교훈을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을 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질문 이었습니다. 나는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자신 있게 대답하는 존귀하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