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에 관하여]]
1. 기준과 전제
정치 풍향계, 열 여덟 번째 이야기..!! (2021.5.30)
사람들은 기준을 갖고 생각하고, 전제를 갖고 말한다.
기준이 흔들리게 됐을 땐 부끄러워하고, 전제가 틀렸거나 전제와 어긋났을 땐 주장을 철회한다.
이런 걸 상식이라고도 하고 원칙이라고도 한다.
원칙이 무너지고 상식이 무시되면 사람들은 생각에 혼란이 오고 말에 조리가 없게 된다. 그래서 동문서답도 하게 되고 마이동풍으로 확신편향에 빠져든다. 그래서 이를 기화로 선동과 막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엄마가 딸이 외출하는데, "우산 가져가!"라고 말한다면, "비가 올거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그의 딸인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구속되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던 기준에 못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잠깐씩 고민을 하곤 하겠지만 거기서 기준을 찾지는 않는다. 어떤 판단을 하던 그때 그때 기분이 다를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친한 친구가 큰돈을 빌려달라거나 보증을 서 달라고 요청했을 때는 즉흥적으로 기분에 따라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가족 전체의 생사가 달린 문제가 되니까.
그래서 기준을 찾게 된다. "친구가 먼저냐 돈이 먼저냐?"에서부터 시작해서, "받을 수 있을까 못 받게 될까?", 그리고 "이 돈 없으면 우리 가족이 죽게 될까"라고 하는, 인생의 기준, 친구에 대한 기준, 돈에 관한 기준 등을 찾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게 정론으로 되어왔다. 그러면 정치적 기준도 각자는 가지고 있다. 분명히 있다.
그런데 작금에 와서 진중권, 서민, 이준석 등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들은 "기준이 뭐야?"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조국을 비난하고 윤석열을 옹호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저 막연히 "공정"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공정에 대한 정의(definition) 없이 공정을 말한다. 즉, 전제 없이 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비가 온다는 낌새조차 없는데, 우산을 가져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최소한 "오늘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다"라는 전제를 내놓아야, "저 남쪽만 비가 오고 서울엔 안 온대."라고 반박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반박을 아예 불가능하게 하는 주장을 한다. 전제와 결론(주장) 사이의 모순을 반박해야 하는데, 전제 없는 '뇌피셜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나?
며칠 전 서민은 국회 증인으로 나와서도 "조국이 잘못됐다고 확신한다."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전제)는 말을 못 했다. 그냥 자기 기분이 그렇다는 말로 들린다. 질문하던 의원조차도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권력형 비리가 아니라고 법적 해석이 내려졌지 않나"라는 한 의원의 반박에 서민의 재반박도 없다.
부끄러움도 못 느끼고 주장 철회도 없다. 자칭 똑똑하다는 진중권, 서민, 이준석 모두 그렇다. 대학교수이거나 연구학자이거나 하버드대학출신이거나인데 그렇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기준이 뭐냐?"
"그렇게 말하는 전제가 뭐냐?"
"그 기준을 당신에게 고대로 적용해도 되냐?"
"당신이 생각하는 '공정'은 어떤 것이냐?"
요즘은 안타깝게도 한겨레나 경향 신문에서조차도 기준이 애매하거나 모호할 때가 많아졌다. 말해야 하는데 침묵하거나 작게 말하고, 말해야 할 때가 한참 지나서야 뜬금없이 말하고, 마치 앉았는지 섰는지 구분이 안 되게 엉거주춤한 태도로, 일장훈계나 늘어놓고, 자기만 고고한 척하고, 변죽만 울리다 말고, 마치 숙제만 다 하면 공부는 끝이다라는 식이고, "윤석열과 조국 둘 다 다루지 않으니 우리는 중립이다"라고 하는, 면피하려는 듯한 우스꽝스런 모습 등등을 계속 보여준다.
역사의식의 부재, 기계적 중립과 현실과의 괴리, 정의와 공정에 대한 자기들만의 은밀한 정의(self-definition),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 하는 무능, 그 무능을 다시 저항으로 변환시켜 살아남으려는 졸렬한 만용 등, 보여지고 읽혀지는 추한 작태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아마도 대한민국의 정치 주소를 여의도에서 찾지 않고 서초동에서 찾게 될 것이다.
2. 기준을 어떻게 정하나?
질문에 대한 답 : 최미라님께..!! (2021.5.30)
아까 기준에 관해서 올린 저의 포스팅에 댓글로서 "기준을 정하는건요?"라는 질문을 해 오셨는데, "헌법과 도덕률"이라는 간단한 대답으로 끊었는데, 생각해보니 "성의 없는 답변이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우선 사과드리며, 좀 더 제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기준은 진실에 기반합니다. 그럼 "무엇이 진실이냐?"고 물었을 때, "가장 확실한 것", 그래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우선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다음이 "분석"이고, 마지막은 "해석"입니다.
김학의 동영상을 보셨고 그가 김학의였다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했고 수많은 사람이 동의했다면, 그리고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원본 동영상이라면, 사실(팩트)가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분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물론 해석이 끼어들 여지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이 명확치 않을 땐 분석이 가해집니다. 이 때의 분석이란, 인과적 분석과 논리적 분석을 말합니다.
가령 A가 아파트 주변에서 칼을 들고 마구 화를 내며 두 시간 동안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16동 3호 아파트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이 났습니다. 그러면 그 원인 중 하나가 A가 될 개연성이 생깁니다.
그 시간대에 뉴욕 맨하튼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나타났다면? A와의 연관성(인과관계)를 찾기는 불가능하겠죠? 인과관계는 가까이에도 멀리에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즉, 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추론을 해 봅니다. A가 16층에 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를 탔을 것이다. 그래서 cctv를 조회합니다. 그런데 A가 찍힌 영상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A의 행동 반경과 16층 사이에서 어떤 접근 통로와 수단이 있는지의 경우의 수를 따집니다. 이렇게 계속 인과성을 따지고 논리적 추론을 해 가면서 분석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실도 명확치 않고 분석도 한계에 부딪칩니다. A가 왜 16층으로 갔는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또 배제시킨 다른 원인들 B, C, D와 비교해서도 A를 범인으로 지목할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심(합리적 의심)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10가지 근거(이유)를 들어 A를 살인범으로 기소합니다.
그런데 판사는 이런 걸 지적합니다.
10가지 이유는 나름 기각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입증된 사실은 하나도 없고, 분석을 통해 상당히 실체에 접근한 것 같으나, 딱 집어 A를 범인으로 단정할 근거로는 불충분하다. 또한 3번 7번 근거는 분석 자체가 틀렸다. 따라서 10가지 증거는 모두 해석에만 의존했다. 즉, 증거의 객관성을 보증할 수 없다.
저의 즉흥적 상상에 따른 예시이므로, 다소 부정확한 설명일 수는 있으나,
기준을 세우는 순서는,
사실> 분석> 해석.... 이라는 순서로 정해질 수 있고, 과학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헌대과학은 이 조차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실, 진리, 참, 실체라는 것도 불완전하다고 봅니다. 즉, 절대적 객관적 기준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가령, 장님 열 명이 각기 직접 만지고 냄새맡고 소리를 들어 실체적 접근을 했고, 열 명의 일치된 의견을 봤어도 코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한다는 것이죠. 그게 우리가 철썩같이 믿는 과학이라는 거죠.
어쨌거나, 하나 더 덧붙이자면,
A가 경기도에 있었다는 건 의미있는 증거가 아닙니다. A가 그 아파트 내에 있다고 해서 범인으로 추정할 수 없습니다. 또 A가 16층에 있었다고 해도 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A가 그 시간에 3호에 있었어도 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 A가 칼을 들었어도 범인이 아닙니다. 이걸 다 모아도 범인이 아닙니다. 살인 피해자는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기준을 정합니다.
무죄추정의 원칙!!
답변이 되겠습니까? 다소 부족해도 저로선 성의를 다했습니다만..^^
3. 덧붙임
기준에 대해서 다시 덧붙이겠습니다. (2021.5.30)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기준을 요구합니다. 특히 부당한 피해를 입었을 때엔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항상 늘상 가해자는 기준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기준이 처음부터 없거나 밝히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가령 사이비교주가, "A는 천국에 갈 것이요, B는 지옥에 갈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B가 기준이 뭐냐고 항의를 합니다만, 어떻게 창피하게 "A는 B보다 헌금을 많이 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니 딴 이유를 대는 거지요.
검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준이 뭐냐고 물으면, "내부 규정상 기밀이므로 알려줄 수 없다."라고 합니다. 지들끼리 만든 규정입니다. 창피하게 어떻게 "A는 부자니까 집행유예고, B는 가난하고 힘 없으니까 징역 7년이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니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이거나 아예 대꾸도 안 해주는 거죠.
또 하나 예를 들어, 범죄자나 범죄를 의심받는자나 잠재적 범죄자의 돈을 받으면 뇌물이고, 가족이나 친구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돈을 받으면 뇌물이 아니라고 기준을 세웁니다.
그런데 검사들 지신에게 불리하면 이 기준을 빼버리고, '99만원 불기소세트 규칙'을 적용합니다. 즉, 원칙과 기준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자기 이익과 안전을 꾀합니다.
그러니 기준은 있으나마나 한 게 되죠. 그래놓고 자기들은 원칙과 법대로 했다고 우깁니다.
물론 그래서 국회 법사위에서 의원이 "그 원칙이란 게 뭡니까?"라고 물어도 대답을 못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실대로 말하면 얼마나 쪽팔리겠습니까.
상식있는 사회,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가 되려면, 기준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기준은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이고, 가해자의 편이 아니라 피해자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죄추정의 원칙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묻습니다.
조국과 윤석열,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입니까?
그리고 지금 누가 기준을 묻고 있고, 누가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상황입니까?
4. 전제와 가정
아직 머릿속에만 들어 있습니다. 한가할 때 정리해서 따로 올려보겠습니다.
kjm / 2024.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