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0일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조명연 신부 인류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이며 시련의 역사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선사 시대에 인간은 정말로 최약체 동물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빠르게 달려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물속에서 살 수도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약함으로 인해 지금 인류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을 형성했던 공룡, 맘모스 등이 멸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고통과 시련이 없었기 때문이라 고 말합니다. 이렇게 인류의 발전은 고통과 시련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고통이 있기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통을 싫어합니다. 스스로 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마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자기 안의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이 생각이 가까운 사람에게도 확장되어서, “내 아이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 가족은 고통이 없어야 한다.”라고 생 각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요? 고통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 집착하고 따라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고통과 시련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건강검진 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운동하지 않았지만, 건강을 위해 하루 1시간 만이라 도 운동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첫째 날 운동하기가 쉬웠을까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둘째 날, 온몸이 뻐근하고 힘듭니다. 그래도 버텨서 해 봅니다. 셋째 날, 작심삼일을 떠올리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 다. 왜냐하면 의사 선생님께서 운동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으니까요. 힘들어도 목표가 있으면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처음에는 멀고 힘들어도 점차 기쁘 고 행복해집니다. 고통과 시련도 목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에게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며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라 는 목표를 갖게 되면서, 고통과 시련 너머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 앞에 나타납니다. 그때 거부하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닌, 우리의 목표인 주님을 떠올리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을 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스탕달). 사진설명: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인천가톨릭대 성 김대건 안드레아성당/조명연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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