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유례가
드문 장흥 척사윤음비(斥邪綸音碑),
1881
김희태
장흥향교 앞에
27기의 비석군이 있다.
이 가운데 특이한
비석은 1881년(고종 18) 10월에 세운 척사윤음비(斥邪綸音碑)이다.
아마도 전국적으로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1985년 첫 대면한 이래 언젠가
자세히 보려니 하다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 비는 앞면에
비문이 있고 뒷면에 세운연대가 표기되어 있다.
비제는
‘御製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碑’이며 17행의 본문이 있다.
‘척사’란 정학(正學)과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것이다.
정학은
주자학,
사학은 서학을
이른다.
윤음이란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로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을 지닌다.
끝에
‘通訓大夫行長興都護府使兼長興鎭兵馬僉節制使臣---“이라 하여 당시 장흥부사 직이
보인다.
비석 아랫부분은
훼손되어 인명은 알기 어려우나 <장흥읍지>에 따르면 이학래(李鶴來)이다.
1880년(고종 17,
경진)
8월 도임해
1882년(임오)
12월까지
재임했다.
뒷면에는
’聖上卽阼十八年辛巳十月
日 立‘이라는 세운 연대를
새겼다.
임금이 즉위한지
18년 신사년으로 고종 18년,
1881년이다.
이 비를 세우게 된
것은 당시 시대배경과 연관이 있다.
사교(邪敎,
서학)가 들어 와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들을
물들게 하는데 이를 배척하여 민심이 스스로 안정되어 편안해지고 순박한 풍속이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염원한 것이다.
<고종실록>(18권)에 따르면 1881년(고종 18)
5월
15일(병자)에 척사 윤음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내려 보내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내려진 내용을
빗돌에 새겨셔 10월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척사윤음은
1839년(헌종)
때 처음 내려지는데
언해본을 포함하여 책으로 간행되어 배포된다.
이후 몇 차례
척사윤음이 내려지는데,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장흥향교 앞에 소재한
1881년의 척사윤음비는 조선후기 서학의 대두에
대하여 이를 극복하려는 정책방향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또한 국왕의 윤음이
지방 고을 현지에 세워져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경과를 알 수 있는 금석문 실물 자료로서도 중요하다.
장흥향교 앞 비석군
27기 가운데 세운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은
2기이며,
1945년 이후에
건립된 것은 6기이다.
이 가운데 조선시대
장흥부사 선정비(불망비,
거사비,
애사비)
13기,
조선시대
말기~대한제국기 장흥군수 선정비
5기가 있다.
이희익군수는
3기(1902년 1기,
1904년
2기)가 있다.
향교 중개수와
관계되는 것은 1971년에 세운 대성전 중건기적비와
의연비,
1997년에 세운
명륜당 중건비이다.
척사윤음비[국역문]
어제
유 대소신료와 중외민인 등 척사윤음비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너희들 모든 관리와
온 나라의 백성들은 나의 말을 똑똑히 듣도록 하라.
널리 생각건대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는 현명한 정사와 밝은 교화로 백성들을
잘 다스리어 백성들에게 악행이 없었으며 추향(趨向)이 바르고 풍속이 순박하여
삼대(三代)
때에 비해 손색이
없어서 온 세상에 소문이 났었다.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모두 공맹(孔孟)의 거룩함을 존중할 줄 알았고 마을의
수재(秀才)와 어린 선비들은 정주(程朱)의 학문을 숭상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이것은 어진 이를
친히 하고 이로움을 즐겨하여 놀면서도 잊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백성들아!
내가 외람되게
열성조의 큰 기반을 이어받고 열성조가 물려준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중단 없는 일념으로
어찌 감히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선대 임금들을 계술(繼述)하는 방법으로 삼지
않겠는가?
불행하게도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식이 있으니,
양편 사이에서 처음
보는 일종의 사교(邪敎)가 태서(泰西)로부터 들어와 세상을 미혹시키고 사람들을
속여 백성들이 더러 물든 지가 이제 100년쯤 되었다.
이전에
정묘(正廟)의 융성할 때 그 기미를 막고 그 침잠하는
것을 막은 것이 실로 이미 뿌리를 없애고 덩굴 풀을 제거한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종자에서 또 종자가 생겨나고 소멸하였다가는 이내
성해졌다.
중간에 크게 징계한
것이 또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형상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므로 보이지 않는 근심은 언제나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추향이 점점 어그러지고 백성들의 풍속도 점점 물들게 된 것이 일찍이 이것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아!
저것이 종교가 되어
말로는 하늘을 공경한다 하지만 그 귀결은 신을 업신여기고,
말로는
선(善)을 권장한다 하지만 결국은
악(惡)을 전파시키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금수(禽獸)만도 못하고 독사와 같은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성품을
가진 자라면 누가 그것이 짐독(鴆毒)과 같아 가까이 할 수 없고 쏘는 물여우와
같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저 너절한
것들은 언제나 머뭇거리며 도사리고 있으며 근래의 무뢰배들은 때를 타서 몰래 발동한다.
어두운 밤에 담을
뚫고 곳곳에서 사건을 자주 일으키며 대낮에 약탈하여 왕왕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뜬소문을 퍼뜨려 민심이 편치 못하다.
또 인심이 점점
어그러지고 점점 오염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사당(邪黨)을 모조리 제거하지 못한 탓으로 말미암아
그러지 않을 줄을 알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보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대체로 이것을
반복하여 생각해볼 때 오늘날 거짓을 없애고 도적을 없애 우리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방도는 진실로 사당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데
있다.
그러나 만약 완전히
청산해버리는 방도는 옛날에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지금이라 해서 어떻게 더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또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할 뿐이다.
병이 침노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은 원기(元氣)를 보충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고 더러운
때를 없애려는 사람은 몸을 깨끗이 씻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
지금
사교(邪敎)의 오염을 씻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의
유술(儒術)을 더 잘 닦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
무릇 선비의 갓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고 공맹의 가르침을 강론하고 정주의 학설을 외우는 사람이 진실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할 때에 성인의 훈계를 떠나지 않고
급한 때나 위태로운 때에도 반드시 성현의 경전(經傳)을 따르며 정도(正道)를 행하고 좋은 풍습을
일으킨다면,
이른바 사교에 물든
무리들을 비록 적발해내고 소굴을 파괴하지 않더라도 머리를 쳐들고 지나가지 못할 것이고 올빼미 같은 소리도 변할 것이며 짐승 같은 마음도 고쳐질
것이다.
도적질하는 무리와
같은 이들도 본래는 모두 선량한 백성들이니 토벌하지 않아도 그만둘 것이고,
민심을 소란시키는
거짓말도 원래는 근거 없는 말이니 반드시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없어질 것이다.
이에 민심은 스스로
안정되어 편안해지고 순박한 풍속이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맹자(孟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척하여 마침내 원칙으로 돌아오게 했을
뿐이다.
원칙이 바로잡히면
백성들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일어나면 사특한 것이 없어지는 것이니,
의미가 있지
않은가?
아아!
나의 대소 신하들과
백성들은 위를 향하는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아 나를 도우려고 생각 하면서,
어찌 원칙을 바로잡아
백성들을 일어나게 하는 것을 모든 말의 으뜸으로 삼지 않는가?
이후로부터 만약 다시
사교에 깊이 물들어서 자기 습성을 고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고 유인하여 깨끗한 것을 더럽히는 자가 있다면 가족과 종족을 멸살시키는 처벌이
또한 부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법을 쓰는
것은 가라지를 제거하여 곡식의 싹을 보호하듯이 악을 제거하여 덕을 심는 것이 곧 우리 열성조의 유민(遺民)을 보호하는 지극한
뜻이다.
이에 분명히
하유(下諭)하니,
모두가 나의 애통한
마음을 잘 알아주기 바란다.
통훈대부
행장흥도호부사 겸 장흥진 병마첨절제사 신----
1881년(고종 18,
辛巳)
10월 일
세우다.
척사윤음비[원문]
御製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碑
若曰
嗟!
爾凡百有位
粤我八方有衆,
明聽予一人誥.
洪惟我列聖朝聲明之治
熙洽之化,
陶鑄斯民,
民無衰惡,
趨嚮之正
風俗之淳,
無愧三古,
而聞於天下.
童孺
婦妾,
皆知尊孔
孟之聖,
村秀
蒙士,
莫不崇程
朱之學.
此所以親賢樂利於戲不忘者也.
惟予小子,
猥承列聖之丕基以拊列聖之遺民,
則孜孜一念,
曷敢不以容保民爲繼述之圖乎哉?
不幸有往牒所未聞,
兩間所創覩之一種邪敎,
來自泰西,
惑世誣民,
民或染汙者,
于今百許年矣.
粤在正廟盛際,
其所防微杜漸,
固已斬根除蔓.
而不意種下生種,
旋滅旋熾,
中間大懲創者,
又非止一再,
而潛形匿影,
隱憂常在,
民趨之漸乖
民俗之漸漓,
未嘗不由乎是.
噫!
彼爲敎,
自以爲敬天,
而其究也慢神,
自以爲勸善,
而其終也播惡,
寔禽獸之不若
蛇虺之是同,
則苟具人性者,
孰不知其不可狎如鴆毒
不可邇如蜮射.
而惟彼蟠結之醜,
恒有蹢躅之孚,
邇來無賴勺徒,
乘時竊發.
昏夜穿窬,
在在頻警,
白晝剽奪,
往往駭聽,
浮言胥動,
民心未靖.
又不啻漸乖漸漓而已者,
安知不由於邪黨之未盡薙獮而然歟?
言念及此,
寧不寒心?
蓋以是而反復思惟,
顧今日息訛戢盜,
以靖吾民之道,
亶在乎邪黨之廓淸.
而若其廓淸之方,
昔非不足,
今何加焉?
抑亦反其本已矣.
欲病之無侵者,
莫若補其氣,
欲垢之無汙者,
莫若澡其身.
今之欲滌邪者,
莫若加修吾儒術.
凡冠儒服儒而講鄒魯之敎,
誦洛閩之說者,
苟能視聽云爲,
不離聖訓,
造次顚沛,
必遵賢傳,
正道斯行,
善俗斯興,
則所謂染邪之徒,
雖不抉隱而破藪.
莫能容頭而過身,
梟音固可變也,
獸心亦可革也.
至若竊發之徒,
本皆良善之民也,
不待勦討而可戢,
胥動之訛.
元無根蒂之言也,
不須盤覈而可息.
於是乎民心自迪於吉康,
淳風可返於斯世.
鄒
孟氏之闢楊 墨 終則曰 ‘反經而已矣.
經正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有味哉,
斯言乎!
嗟!
我大小臣庶,
向上匪懈,
思裨予寡躬者,
盍以經正而民興,
爲群言之首哉?
過此以往,
如復有深染於邪,
不悛其習,
誑誘愚蒙,
滓穢淸明,
則屋誅族滅,
亦有不得已.
而用法者,
去莠以培苗,
除惡而樹德,
卽保我列聖朝遺民之至意也.
爰玆洞諭,
庶有體悉乎予哀者.
通訓大夫行長興都護府使兼長興鎭兵馬僉節制使臣----
聖上卽阼十八年辛巳十月
日 立
*<고종실록>(18권)
고종
18년(1881)
5월
15일(병자)조 참조
척사윤음비 세부. 끝에
장흥도호부사가 보인다. 1881년(고종 17) 5월에 전국에 '척사 윤음'을 내리도록 하는데 장흥에서는 도호부사가 주관하여 10월에 비석으로
세운다. 척사윤음비로서는 전국적으로 유례가 드물다.
전경
1985년 장흥향교 앞 비석군
전경. 당시 목포대박교박물관 조사단일원 조사보조원으로 참여 했다. 연구 책임은 이해준교수. 이 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중서부고도문화권
지표학술조사의 일환이었다. 1983년에 처음 시작해 해남군, 완도군, 진도군을 조사하였고 1985년 3년째에 장흥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책으로 간행되지는 않았고 조사카드에 설명을 쓰고, 필름과 함께 사진을 제출하였다. 사진은 원색 6매, 슬라이드 3매, 흑백 3매 였는데, 뒤에
문화재연구소에서 디지털 작업을 하여 누리집에서 제공하고 있다. 슬라이드 필름을 스캔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보니 사진의 좌우가 바뀌어
'반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