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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제자 모집, 구인 광고
(제1복음 마가복음 1, 16-20/ 제2복음 요한복음 21, 12-14)/ 임의진
예수님 당시 시대상은 어땠을까요. 1. 유대교 종교 관습법 내에서(로마의 허용으로) 유지된 유대교 중심사회. 2. 민중들 속에서 곧 메시아가 오리라 그리하여 “이 죽음의 세상에서 구원받고 해방하리라!”는 묵시 문학, 묵시 예언, 묵시 종교가 성행했던 시대(묵시란 뜻의 그리스어 아포칼립테인(Apokalyptein 폭로한다는 뜻. 칼립테인은 ‘감추다’ 반대접두사 아포가 쓰임). 3. 팍스로마나(Pax Romana) 시대였어요. ‘로마의 평화’란 뜻으로 옥타비아누스가 내전 이후 펼쳐진 힘의 지배기, 강제 억제의 평화를 얘기해요. 당시 모든 길은 로마와 통한다고 했죠. 성경에 자주 여러 번 평화(에이레네)를 언급하는 까닭은 그만큼 평화가 절실한 시대상을 대변하는 부분입니다.
예수 시대에는 조선시대 서원의 학파처럼 제자를 두는 그룹들이 있었죠. 먼저 1. 사두가이파입니다. 유대 성전 체제의 옹호자들이죠. 솔로몬왕의 대제사장 사독을 우두머리로 삼아 시작된 뒤 ‘73인 산헤드린’ 최고 종교위원회 대부분이 사두가이파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부활을 믿지 않고, 현생을 향유하자는 주의예요. 2. 바리사이파입니다. 이들은 이를테면 근본주의 청교도라고 보면 됩니다. 기원전 2세기 때 하시딤 경건주의자들이 등장하고, 예수 시대엔 6천명 정도가 있었죠. 내부 분파로 샴마이와 힐렐 2개파가 있습니다. 스승 랍비를 두며 엘리트주의가 팽배했고, 부활을 믿었는데, 까다로운 율법 준수가 선행되야 한다는 조건부였어요. 숨 막히는 경건주의, 고행주의가 그것이죠. 오늘날 유대교란 이 랍비들이 중심된 랍비 유대교입니다. 3. 에세네파입니다. 이들은 변두리 사막, 광야의 은둔 수행으로 유명하죠. 급박한 종말을 신봉하고 매우 진보적 그룹이었어요. 이들은 메시아 해방을 믿었어요. 요르단강에 자리 잡은 세례자 요한 공동체도 에세네의 일파라고 봅니다. 친척인 예수님도 이 그룹과 교류했죠.
4. 젤롯당입니다. 이들은 독립쟁취를 위한 무장투쟁 그룹으로, 사회정치적 메시아를 대망했어요. 그러니 로마의 큰 탄압을 받았죠. 이들 또한 예수님의 동선과 행적이 유사합니다. 다만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과 자당 우월주의는 예수 운동과 다른 점이예요.
예수님은 그리스 견유 철학자들(라틴어 Cynici/ 견유학파 (犬儒學派)는 자연과 합일하는, 그래서 자연스런 존재로 살아감을 배우는 그리스 철학과 철학자. 견유란 개를 의미하는 Κύνος를 말함)과 비슷해요. 예수와 제자단은 ‘떠돌이개’처럼 유랑하며 말씀을 전했지요. 길에서 만난 제자들이 하나둘 꼬리를 물며 늘게 됩니다. 부활 후 권하시기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 20), 이 말씀은 철저히 랍비다운 말씀이지요. 우리 속담에도 ‘배워야 면장을 한다’는 말이 있어요. 현재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반지성, 무식쟁이들에게 지배받고 있단 사실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라라지만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 박둑합니다. 교회의 반지성은 또 어떻습니까. 이단사설에 불과한 ‘근본주의 축자영감설’을 신봉하고, 기복적인 값싼 은혜를 찾죠. 이적 은사에 빠진 유아적 신앙, 성소수자와 이웃종교를 향한 거침없는 혐오와 차별발언 등 참으로 심각한 폭력 숭배자들입니다. 예수와 따름이(제자)들이 노동계급이라서 죄다 반지성이고, 산기도 출신 은사 운동파다? 이들은 무려 3년간 먹고 자고 합숙 훈련을 받으면서, 복음과 실천행으로 알찬 배움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보통 순례길에서 제자를 부르십니다. 순례길에선 앞서 말씀드린 목줄 풀린 개와 같은 존재들을 만나게 돼요. 구약엔 ‘치이들’ (이사야 13: 21)이라고, 사막의 짐승들이 나오는데, 불길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이 꼭 들개와 같죠. 마태 7장 6절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란 말씀이 있죠. 루가 16장 21절엔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핱았다” 부자와 라사로 비유에서도 개를 예화로 드십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도그 Dog ‘개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요. 도미니코 수도회는 라틴어로 ‘도미니카누스’(Dominicanus)라 하는데, 이를 ‘주님의 사랑스러운 개’란 라틴어 ‘도미니 카니스’(Domini canis)에서 유래했다 소개합니다. 어디 시골 마을에 가면 목줄 풀린 개들이 졸졸 따라오잖아요. 뭘 먹을 걸 바라고 호기심에 좇아오는 것이겠지요.
남성, 여성 많이들 예수를 따라다녔는데, ‘좇아, 따라와’라는 아콜루데인( ἀκολουθεῖν akolouthein)은 넓은 의미로는 ‘제자도(제자로서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건 예수를 그리스도로 생각한다는 것, 그 결과는 십자가를 진다는 은유다. 로마 주권자들이 유다 땅에 실시했던 무수한 십자가 처형을 제자들도 알고 있었다”(구티에레즈) 곧,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뜻을 행하는 자가 천국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죠. 주님과의 인연은 ‘따름’ 곧 ‘행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쯤해서 여성 제자 이야길 해야겠어요. 로마서 16장 7절의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에서 ‘유니아’는 사실 ‘유니아스’가 맞거든요. 성서 필사가가 여성을 남성으로 둔갑시켜 억지를 부린 케이스입니다. 여성을 무시하고, 차별했던 때니까요. 성모님 마리아 말고도 초대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유니아스 같은 유능한 여성 지도자가 있었음이 명백합니다.
한편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수군거리고 배반하는 제자들이 나오는데, 66절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 중 많은 이가 돌아서서 물러가고 더이상 당신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기술합니다. 등 돌리고 떠난 제자들이 곱빼기로 많았다는 얘기죠. 남성 위주 열두제자 곧 ‘도데카’는 숫자 12를 가리키는데요, 7과 더불어 12를 완전수라 보았거든요. 12제자 말고도 그 외에 여러 많은 제자가 있었다는 것. 거기에 여성들도 여럿입니다. 거론하자면, 엘리사벳(유년기에 등장. 세례요한의 어머니)도 가까운 주님의 빽이자 인맥이요. 또 성 안나는 84세 된 과부로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봉헌할 때 기뻐해준 분이죠. 성모 마리아도 큰아들인 예수에게 순종하며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막달레나’라고도 하지요. 일곱 악령이 들었는데 이를 물리치고 주님의 공생활을 함께합니다. 그녀는 최초로 부활 메시지를 들고 내려왔지요.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마르타의 자매입니다. 향유를 드린 여자로 나오지요. 요안나는 헤롯의 신하 쿠자의 아내죠(루가 8, 3), 살로메는 마가복음에만 등장해요. 수산나는 루가복음에만 언급됩니다.(루가 8장 3절) 많은 다른 여자들 속에 수산나, 곧 백합이란 뜻이죠. 톺아보면 시몬 베드로의 장모도 예수를 따른 여성 그룹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은 시꺼멓게 그을린 어부들을 처음 제자로 맞아들입니다. 과거에는 철선이 아니라 목선 배의 항해 시대여서 갈릴리 바다의 배도 목수들이 제작에 관여하였습니다. 수리 수선하는 일도 큰 벌이였어요. 목수 예수와 어부들의 조합은 노동계급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는 인간적 매력, 신의,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지녔기에 운동으로 확대되었지요. 이들은 늙은 아버지 세베대와 일꾼들 빼곤 모두 예수를 따라 순례에 나섭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사후 비록 한때 배신하고 떠났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와요. 어떻게든 오늘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참 친구입니다.
일자리가 없는 요즘, 구직 란에 정직원이 아닌 알바 정도를 구하는 세상입니다. 오랜 우정이기 보다, 오랜 지분의 동반자보다 지금은 인스턴트 관계를 선호합니다. 껌을 씹듯 단물만 빼먹고 툭 버립니다. 인스턴트 패스트푸드 같은 짧은 인연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또 주님의 사역을 구인 구직으로 보는 이들도 있어요. 이 거룩한 제자됨을 그저 밥벌이로 삼게 되면 항상 더 좋은 월급받는 곳을 찾게 되요. 돈 많이 주는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라 물신 맘몬을 따르게 되는 것이죠.
예수는 직업으로 제자들을 모은 게 아니고 ‘엘까미난떼 필그림 순례단’을 모집한 경우입니다만, 이것이 장차 제자, 교부를 두는 성직 직업이 될지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물론 목회도 거룩한 노동이죠. 그러나 목회자 가운데 삯꾼도 있어 부름은 받았으나 심부름 정도로 그저 여기고, 낮은 곳에 가겠다며 ‘어디든지 가오리다’ 찬송만 흥얼댈 뿐이죠. 아버지를 잘 둬서 교회까지 부의 세습을 하는 걸 보면 더욱 기가 막힙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뿐 아니라, 형제나 친척의 돈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 입김을 교회에 휘두르며 주님의 공동체를 사적 소유물로 욕보입니다. 거룩한 공교회가 일개 가족의 전횡에 포위되고 붕괴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 하느님께서는 독신 바울과 같은 친구를 따로 후계자로 모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막 수행과 긴 순례여행을 다녀온 예수님은(40일 광야수행도 유대인들의 완전수 40을 기록에 남긴 이야기) 본격적인 카리스마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소설가 한강은 소설을 통해 광주와 제주의 슬픈 과거사를 영구히 기록한 ‘복음사가’입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처럼 두고두고 역사의 증인이 된 것이죠. 예수님도 그런 증인될 제자들을 구한 것입니다. 광주민중항쟁을 그린 소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 부분, ‘눈 덮인 램프’는 놀라운, 아름다운 문장과 서술에 담긴 명백한 오월의 증거입니다. 헤밍웨이, 타고르, 에이츠, 버나드쇼, 토마스만, 앙리 베르그송, 펄벅, 헤르만 헤세, 버틀란트 럿셀, 알베르 카뮈, 파블로 네루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귄터 그라스, 쉼보르스카, 파묵과 같은 레벨의 소설가가 바로 우리 전라도 광주 출신 소설가 한강입니다. 앞으로 광주와 여순 항쟁, 그리고 제주 항쟁을 세계가 주목하겠죠. 예수의 제자들은(우리들은) 바로 그런 역사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불굴의 정의와 생명의 역사, 하느님나라 나눔의 잔치, 제국과 물신의 체제가 아닌 하느님과 백성들의 희년 체제, 예수님 사역의 목격자로 우리는 초대받은 겁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땅엔 로마의 조직 단체들로 넘쳐났어요. 로마제국은 군산복합체 성격을 띠고 있었어요. 원로단과 기사단, 로마의 군사령관들과 장교들, 총독과 고위 세리들이 뭉쳐 전리품을 나눠 잦는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조직은 일사분란했습니다. 그러나 그 조직의 충성도란 결국 이권과 관련되어 있었지요. 그들의 연회엔 레기온 군대만큼의 돼지고기가 제공되고, 무참히 성착취를 일삼았습니다. 그사이 태어난 미혼모 아기들을 무참히 죽이기도 했고요.
예수님의 조직관리(?)는 오로지 동지애,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경험한 이들의 사랑에 기댔습니다. 내일, 모레 어쩌고 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미래를 오늘 보여주셨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 운동의 위대함이었어요. 예수님의 사랑은 또 지고지순, 연속성, 끈기를 가집니다. 그 큰 마음을 읽은 바울로는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편지 말미에 밝히지요.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방문(두번째 제자 소집)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밥은 드셨소?” “밥은 먹고 사니?”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마련하신 식탁이야기는 그만큼 절절한 제자 아낌, 안부의 마음, 희망의 전위적 건설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깨뜨러진 것을 다시 수습하고, 재조직하는 그 마음. 한편 죄송스럽게 여기며 재차 회심하고 순종하는 제자들. ‘부활 항쟁’의 출발점입니다.
도무지 잊히지 않는 주님. 소설가 한강이 좋아한다는 김광석의 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문득 떠오르네요. (한강 산문집-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 안에 가득한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 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연주)
오늘 우리는,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긴긴밤을 새우듯 모인 친구요 제자들입니다. 영광스럽게도 예수의 영이요 위격이신 성령님이 친히 감동으로 함께하는 순간입니다. 유명한 ‘전주’ 비빔밥보다 맛있는 것은 ‘이번 주’ 비빔밥이라고 하죠^^. 이번주, 바로 지금 우리는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본받고 그분을 살아내며 그분의 제자들로 단단히 뭉치길 소원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들이여! 남은 인생길을 그분과 함께 뚜벅뚜벅 걸으시길 두 손 모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