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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 시무(時務)의 역사학자 강덕상 스토리
만주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사와 이민사, 교육사 등의 글을 쓸 때 연변의 학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고 있는 책이 현규환의 ⌜韓國流移民史⌟상권과 강덕상의 ⌜현대사자료집 1~6권⌟이었다. 연변의 학자들이 인용하는 빈도를 보면서 그분들의 책이 보통 권위가 있는 책이 아니라고 감을 잡았다. 그러나 현규환이나 강덕상이나 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독립운동사에 관심은 있지만 재미로 읽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보니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사를 보는 나의 관점이 생겨서 하나 둘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럴 때 마다 학자들이 인용한 그들의 글을 그대로 재인용하면서 그 분들에게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코로나로 외부활동을 삼가고 집에 들어앉으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분들의 책을 차분히 찾아볼 여유가 생겼다.
현규환의 ⌜韓國流移民史⌟상하권은 한 달 정도 수소문해서 1967년도와 1976년도에 출판된 중고책을 간신히 찾았다. 책을 찾은 기쁨이 참으로 컸다. 그러나 순 한글 책이 아니고 국한문 혼용이 반반이어서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더듬거리며 읽을 수 있을 수 있어서 저자와 책에게 감사를 드렸다.
현규환은 ⌜韓國流移民史⌟ 상권에서 권두언을 이렇게 시작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사중 고래로부터 적지 않은 수가 사정은 여하간에 우리 민족이 자리잡고 있었던 만주나 한반도를 벗어나 유리하였다.
이들 유리자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민족본사에서 떨어져 나가 영영 망각되고 타민족 속에 파묻히어 그 기구한 생을 외방에서 마치었으며 대부분이 이름 없는 그대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 또한 우리 한민족임에는 틀림없고 그네들의 피는 중국 일본 등 동야사회의 어느 곳엔가에는 가냘프게나마 스며있을 것을 의심치 않는 바다.
이들의 문화가 가장 뚜렷이 빛을 발한 곳은 일본의 예를 찾아 볼 수 있으니 고구려 신라 백제의 유민이 당시 일본에 가져다 준 문화적인 공헌은 일본의 문화적 각성에 신기원을 이룩했으며 문화발전에 원천적이면서도 주도적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귀화인문화 한래문화로 불리어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 생략 …
우리 민족이 공공연히 쇄국의 사슬을 풀고 흘러 나간 것은 1860년 이후의 일이며 그 주류는 만주에 갔고 (약 이백만 이상) 노령에 갔으며 (약 사십만) 후에는 일본으로 갔다.(약 2백만).
… 생략 …
본서가 목적한 바는 이러한 민족지류에 대한 기록이 민족본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점과 과거 분산상태에 놓여진 수많은 우리 민족을 다시 유기적인 민족 발전단위를 규합하는데 기본 자료를 제공하는 것 등에 있으며 이것은 현하 한국이 처해있는 시점에서 볼 때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 생략 …
현규환 저 ⌜韓國流移民史⌟상권 7,8쪽
권두언을 읽으면서 가슴이 울컥하였다. 저자의 뜨거운 민족애와 남북화해와 일치에의 간절한 염원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는 민족의 주류에서 떠난 이민자들이라 하여도 한민족은 어디에 살든지 민족유기체,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천명하면서 우리민족에게 언젠가 화합과 일치, 통일의 날이 올 때 자신의 자료가 민족의 대동단결, 규합에 필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는 민족의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글을 썼던 것이다.
의사로서 민족의 이합집산에 관심을 가지고 엄청난 분량의 글을 남긴 현규환은 1901년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청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의과대학에서 위생학을 연구하였으며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만주의과대학 소속 개척의학연구위원으로 종사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적십자사 보건부장과 서울적십자병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한의학협회 상임이사, 대한산업보건의학협회이사, 대한결핵협회 서울지부장으로서도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재만조선인의 생활 재건축⌟, ⌜우리의 신생활 설계도⌟, ⌜항급온돌의 위생학적 연구⌟, ⌜韓國流移民史 상하권⌟ 등이 있다.
강덕상의 책을 찾으면서 그가 한국인이 아니고 재일한인, 자이니치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 근대사 엄밀히 말하면 일본의 식민지 지배사를 조선인 관점에서 연구한 학자로서 모든 글을 일본어로 썼다. 한글로 인쇄된 그의 책 원본을 구해서 마음껏 공부하며 글을 쓰려는 생각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데다 그의 저서 ⌜현대사자료집⌟이 워낙에 방대하여 어떤 것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는지도 모르니 답답하다. 무엇보다 ⌜현대사자료 27,28⌟ 조선독립운동 편을 구하고 싶은데 전문가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니어서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인터넷 중고서점에 광고를 띄우고 기다리는데 일본어로 쓴 책들만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겨우 ⌜현대사자료집⌟의 일부인 ⌜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은 표지만 구경하였고 그의 필생의 역작인 여운형 연구서 4권 중 2권⌜여운형평전2-상해임시정부⌟만 김광열이 번역한 것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정말 운 좋게 11월 말에 ⌜시무(時務)의 역사학자 강덕상⌟를 만나서 자이니치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스토리를 만났다. 좀 더 일찍 독립운동사 책을 관심 있게 읽었으면 그의 생전에 만났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컸다. 관동대지진에 대하여 일찍 눈을 뜨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
⌜시무(時務)의 역사학자 강덕상⌟은 저자가 일본의 황민으로 성장하여 많은 방황과 고민 끝에 ‘조선인 선언’을 하고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서도 속하지 못한 자로, 온갖 차별과 소외를 당하며 자이니치 역사가로서 한국 현대사 자료 발굴과 연구를 통하여 자신과 재일한인 사학자들이 감당한 時務 즉 ‘시대의 의무’, ‘역사가의 사명’을 절절하게 그러나 절제된 태도로 말하고 있다.
강덕상은 1934년 12월 그가 태어난 지 2년 10개월이 되었을 때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 창씨개명령 공포에 따라 ‘신노 도쿠소’로 성장하였다.
1945년 조선이 독립의 날에 그는 태극기를 처음으로 보았으며 초상집이 된 일본인들의 거리와 잔치집이 된 조선인 거리를 경험하였다.
해방 당시 240만 명의 재일조선인들이 1년인가 1년 반 사이에 65만 명으로 줄어 들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떠나지 않았고 그는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청년으로 조선어를 모국어 가진 청년들이 알 수 없는 고독과 고뇌, 불안에 시달렸다.
그는 대학을 진학하면서 일본의 조선인 차별의 실체를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수산학교에 가고자 했으나 입시 원서를 낼 자격이 없었다. 비행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학을 포기하고 NHK 방송국에 지원하였지만 채용창구에서 거부를 당했고 아사히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소방관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모든 길이 막힌 상태에서 역사 공부를 선택하였고 와세다대학교에서 중국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와세다대학교 1학년 재학 시절에 레드퍼지1) 반대투쟁으로 퇴학당했으나 다음 해 봄에 복학이 허용되어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재학 중에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졸업논문을 쓰면서 훗날에 ⌜일본의 한국병합⌟, ⌜일본 통치하의 조선⌟ 등의 책을 쓴 야마베로부터 “조선인이면 조선을 공부해야지!”라는 충고를 듣고 일생의 교훈을 삼게 되었다. 또한 그의 ⌜조선사는 일본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거울이다“ 말과 “그러니 너는 조선사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일본과의 다리를 놓는 그런 중개 역할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말에 자이니치 역사학도로서 심지를 굳혔다. 그는 ‘이토가 조선에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면 죽음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말한 도쿄대학교의 철학교수인 이데 다카시에 의해서도 조선사 공부에 등 떠밀렸다.
그는 와세다 마지막 학년에서 평생의 조선사 연구의 동반자가 되는 미야타 세츠꼬를 만났고 함께 역사부회라고 부르는 연구회를 조직하여 중국어 원문을 읽고 중국사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원하는 취업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남과 북의 조국도 재일민족단체들도 차별당하는 자이니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는 당시 민족단체들이 일본정부의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과 배제와 탄압을 비판하였으나 함께 연합해서 일본 정부와 치열하게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항상 시선을 조국에 두고 남북의 나라에 공헌할 것과 훈장 받을 일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였다.
그는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중국연구회 안에서 조선사 연구를 시작하였고 마침애 조선인 선언을 하였다. “지금까지 일본인으로 살아왔고, 일본인으로서 너희들을 사귀어 왔어. 그러나 그것은 나의 나약함이었어. 사실 난 조선인이야. 내 본명은 강덕상 이다!” 그리고 그는 중국사와 결별하였다.
와세다 역사부회 동료였던 미야타가 우방협회2) 호즈미 신로쿠로3)의 도움으로 조선의 3•1운동을 졸업 논문으로 쓴 것이 기회가 되어 그는 시미즈 다이지, 미야타 세츠코, 권영욱 외 1인과 함께 우방협회의 조선근대사료연구회 발족에 참여하였다. 우방협회에서는 호즈미 신로쿠로, 곤도 겐이치, 시부야 레이지 3명이 참여를 하였다. 물론 우방협회는 조선인인 우리가 생각하는 자료를 남기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자료를 우리가 이용하고 그들도 우리를 이용하는 상호 관계 속에서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는 조선 침략자, 관료들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조선 근대사를 마스터하였다.
우방협회 스터디 모임은 주 1회 강사를 정하고 제목에 맞는 공부를 하고 강사에게 질문을 던지는 형식의 세미나였고 시작한지 얼만 안 되어 도쿄대학의 가지무라와 다케다와 기타무라가 참여하여 호즈미 세미나는 와세다와 도쿄대학교의 동아리 세미나가 되었다. 세미나는 500회 정도 계속되었고 그러는 동안에 금병동, 야마베 겐타로, 박경식 선생님도 참여하였고 한국 유학생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기록은 모두 녹음 되어 가쿠슈인 대학에 보관되었고 중요한 것은 활자로 출판하였다.
1959년 우방협회의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모체로 하여 그는 미야타와 가지무라와 함께 셋이이끌어 가는 조선사연구회4)를 만들었다. 그리고 1960년 메이지대학의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1963년 메이지 대학교에서 박사연구과정을 수료하고 ⌜현대사자료 6 관동대진재와 조선인⌟을 발표한 이래 줄기차게 조선근대사료연구회가 발굴한 현대사 자료를 통하여 역으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지지른 만행을 고발하며 일본 측 그리고 남북과 다른 견해와 주장으로 식민지 역사를 읽었다.
그는 3• 1독립운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박경식과 논쟁을 벌였다. 박경식은 3•1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 대표 33인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33인의 전 생애를 보았고 그들이 조선 백성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3•1운동으로 독립이 달성된 것도 아니고 33인 민족대표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2명을 제하고 다 전향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박경식은 3•1 독립선언으로 역사를 일단 구분하고 3•1운동에만 한정해 33인을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3•1운동은 한민족의 위대한 거사였다. 3•1운동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그들의 논쟁은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는 3.1운동이 일본 2•8선언에서 출발했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반박한다. 3•1운동은 상하이에서 출발한 것이 명명백백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도쿄 간다의 YMCA에서 이루어진 2•8선언을 중시하여 3•1운동의 출발이 도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나 그는 2•8선언이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도쿄를 경유한 것으로 본다. 그는 상하이의 신아동제회를 바탕으로 하여 결성된 신한청년당을 3•1운동의 모태로 본다. 여운형이 주도한 신한청년당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의 자격으로 파송했다. 미국에도 유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서 대표를 보냈고, 도쿄에도 장덕수를 보내서 유학생을 조직하였다. 그들이 조직한 유학생회가 2.8선언의 주역이 되며 2.8선언에 참여한 후, 대부분이 상하이로 떠났다. 뿐만 아니라 만주와 조선 국내에 대표를 파송하였다. 여운형은 3월 1일 이전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을 만나서 거국적인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결코 3•1운동은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여운형이 독립운동사에서 북두칠성처럼 빛나는 존재임에도 남북 양쪽이 그를 올바르게 평가하지 않는 불편한 사실에 직면하여 사실과 진실의 역사 규명을 위하여 그에 대한 평전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북쪽에서는 김일성으로 모든 것이 수렴되고, 남쪽에서는 김구와 이승만으로 수렴되며 여운형은 조선사 속에서 마치 반역자 같은 위치에 놓여 흔적이 사라졌다. 그는 여운형이야말로 남북한이 함께 공유하며 분단의 심리적인 통일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생각하였고 그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4권의 여운형 평전을 썼다.
그도 현규환과 같은 마음으로 남북과 중국과 러시아, 일본에 나뉘어 있는 한민족이 멀지 않은 미래에 화해와 일치. 대동단결하기를 염원하며 그에 필요한 기본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바쳐 ⌜여운형평전 1,2,3,4권⌟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그의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기록은 남다르다. 181쪽에 몇 줄 밖에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기성의 것과 아주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갑오농민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는 용어가 약간 바뀌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동학당의 난’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는 종교의 난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어찌 보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혁명사입니다. 그걸 일본군이 토벌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문제를 제기하지요. 일본군은 농민군을 도둑이라고 말했지요. 동학비(東學匪) 또는 비적(匪賊)이라는 인식 위에서 학살을 감행한 거예요. 그게 무슨 일인가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일본에 미군이 진주한 다음 일본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미군이 출동해 죽인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시무(時務)의 역사학자 강덕상⌟, 181쪽
그는 여러 대학교의 강사를 전전한 끝에 아주 늦게 은퇴할 나이가 다 되어가는 59세, 1989년에 자이니치로서는 최초로 정식으로 히토쓰바시 대학 사회학부 교수가 되었다. 1995년, 65세에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정년 퇴직을 하고 시가현립대학 인간문화학부의 교수가 되어 2002년에 은퇴를 하였다.
그는 1992년에 히토쓰바시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는 동안에 자이니치로서 외롭고 아픈 삶을 살아온 자이니치 박재일과 의기투합하여 자이니치로서 살아야하는 후예들에게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제공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는 박재일과 함께 1992년 11월, 제삼자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자이니치를 위한 문화센터 아리랑을 만들었다.
당시 그는 자이니치로서 자란 자신과 문화센터 아리랑을 구상한 박재일의 심경을 피력하였다.
우리는 찌르는 듯한 민족 차별의 대상이었고, 그것을 파하기 위해 어쩌다 어머니와 거리에서 만나면 도망쳐 자취를 감추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이름을 불러도 모른 체하면서 마치 남처럼 행세한 적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비숫한 체험을 갖고 있었지요.
‘천황의 강한 방패가 되어 길을 떠나는 우리!’, 황국 소년으로 살았던 중학교 시절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충격, 민족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소년이 해방 후의 민족과 모국을 눈부시게 바라보면서 느낀 좌절감, 자이니치의 앞을 가로막는 벽과도 같은 일본사회와의 갈등, 자신이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 스스로를 찾는 과정에서의 방황 등 살아온 시기와 경험도 겹쳐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민족적 소양을 지닌 모국 출신의 선배들과 남다른 감회로 다가왔지요. ⌜시무(時務)의 역사학자 강덕상⌟173쪽
그는 2002년 자이니치를 더 알리기 위하여 자이니치 1세대들의 유물을 확보하고 그들의 생활문화를 전시할 장을 만들기 위하여 민단에서 제시하는 ‘역사자료관’을 만드는 일에 위원장으로 협조하였으며 완성 후에는 관장이 되었다. 자료관의 명칭을 ‘재일한인역사자료관’으로 결정하였다. 그는 자료관의 이름 결정과 유물 수집 과정에서 일어났던 아픔을 토로한다.
국가가 아니니 ‘한국’이라고 붙일 수 없었지요. 그렇다고 조선자료관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한인’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한인’이라면 남북한을 포섭할 수 있습니다. 이 결정에 대해 주변에서 상당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수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은 파랗지만 속은 빨갛다는 것이지요.
자이니치의 입장에서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면 국가와 민족을 나누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료관에는 일본의 민족학교에 대한 탄압 자료 등 조선학교 관련 자료도 많이 있습니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왜 자료관에 조선학교 것을 가지고 오느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료관은 민단과 별개의 단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자료관은 민단을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습니다만, 민단하고는 다른 단체니까 간섭하면 안 된다고 판단합니다. ⌜시무(時務)의 역사학자 강덕상⌟, 193,194쪽
그는 관동대진재와 조선인에서 일본의 계엄령 선포를 일본 정부의 조선인에 대한 선전포고로 규명한다. 내란 또는 전쟁 때만 발령되는 계엄령이 자연재해에 대해 발령되고 내란을 일으키는 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가 “적은 조선인이다”라고 말하며 9월 2일 오후 6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엄령은 9월 2일 오전 8시 무렵에 열린 내각 회의와 그 후 섭정이 계엄령을 재가했다는 사실과 내무성 경보국장 이름으로 발신된 전문에 “이미 도쿄에는 일부 계엄령을 시행했다”라는 내용을 감안하면 조선인은 아침 8시 소집된 내각회의에서 반란자로 조작됨과 동시에 선전포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관동대진재의 일본군관민에 의한 조선인학살을 갑오농민전쟁, 조선인 의병 학살, 3•1운동의 학살, 간도의 조선인 대학살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보며 ‘차별과 폭력’이 지배하는 식민지 정권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우방협회의 조선근대사료연구회에 참여하여 수많은 한국의 현대사자료 발굴과 정리에 참여하였으며 한국현대사 관련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현대사자료6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현대사자료25 조선1 3•1운동1⌟,⌜현대사자료26 조선2 3•1운동2⌟, ⌜현대사자료27 조선3 독립운동1⌟,⌜현대사자료28 조선4 독립운동2⌟, ⌜현대사자료29 조선5 공산주의운동1⌟, ⌜조선독립운동의 혈사1⌟, ⌜조선독립⌜현대사자료28 조선4 독립운동2⌟, ⌜조선독립운동의 혈사2⌟,⌜관동대진재⌟,⌜현대사자료30 조선6 공산주의운동2⌟, ⌜방귀달 어머니 생각⌟⌜독립운동의 군상⌟,⌜전후보상문제자료집 제8집⌟, ⌜조선인 학도출진⌟, ⌜여운형평전1 조선 3•1독립운동⌟, ⌜관동대진재•학살의 기억⌟⌜여운형평전2 상해임시정부⌟,⌜우키요에 속의 조선과 중국⌟ ⌜여운형평전3 중국국민혁명의 친구로서⌟,⌜여운형평전4 일제말기암흑시대의 등불로서⌟등이 있다.
번역된 책은⌜여운형과 상해임시정부⌟, ⌜일제 강점기 말 조선 학도병의 자화상⌟,⌜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우키오에 속의 조선과 중국⌟, ⌜여운형평전 1⌟,⌜학살의 기억, 광동대지진⌟, ⌜근현대 한일관계와 재일동포⌟, ⌜조선인의 죽음⌟,⌜조선독립운동의 군상⌟ 등이 있다.
그는 ⌜여운형평전3, 4권⌟으로 한국독립기념관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독립기념관은 수상의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강덕상 선생이 저술한 ⌜여운형평전⌟은 총 4권으로 제 1권은 2002년에, 제 2권은 2005년에, 제 3권이 2018년에, 제 4권이 2019년에 발간되었습니다. 평전 완간까지 20년이 걸린 것입니다. 대상 저서는 ⌜여운형평전⌟3권과 4권입니다.
학술상 선정 심사위원회는 한국 근대사 연구자로서 강덕상 선생이 펴낸 ⌜현대사자료 1~6⌟을 읽지 않고는 연구를 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애당초 학계에 끼친 강덕상 선생의 공적은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극찬했습니다. 더욱이 이번 수상자작은 단순한 이야기식 인물 평전이 아니라, 여운형을 통해 독립운동의 전체 모습을 드러내고 해방 정국 당ㅅ 좌우 합작을 위해 힘쓴 활동상을 밝히기 위해 원전 자료를 풍부히 수록함으로써 여운형에 대한 학술 연구의 집대성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남북통일을 지향한 여운형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이 자이니치로서 저자의 평생의 염원을 담아내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점이 잘 드러나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시무(時務)의 역사학자 강덕상⌟, 257쪽
그는 2021년 6월 12일, 오랜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자이니치들과
화합과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한 한인들의 가슴에 별처럼 살아 있을 것이다.
그가 투병 중에 마지막까지 붙잡은 것은 남북에서 거세된 여운형이었다.
그는 남한에서는 이승만과 군사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 축소되었고, 북한에서는 독립운동이 김일성 개인의 혁명운동으로 일원화, 통합되면서 묻혀버린 탁월한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남북이 바르게 평가하며 함께 만나야 할 현재의 지도자임을 강조한다. 그는 남북한 조선인들이 해방 직후부터 저격을 당하는 순간까지 혼신을 다하여 남북통일을 위해 자신을 던진 여운형의 투쟁을 공유해야 민족의식의 심리적 통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세계를 무대로 삼아 ‘조선의 독립운동에 인생을 바친 운동가’ 여운형이 한국의 미래를 여는 현재와 미래의 지도자로 부활하며 그의 정신적인 영향이 한반도에 편만해질 때 화합의 희망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그의 여운형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 공감하며 자이니치로서 일상화된 소외와 폭력에 굴하지 않은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자이니치에 가한 일본사회의 차별과 배타, 고독과 단절에 병들지 않고 올곧게 자이니치의 정체성을 탐문한 그의 생애 앞에 옷깃을 여민다. 빈곤과 과로의 와중에서 한국 근대사의 방대한 자료와 여운형 선생을 통해서 보여준 독립운동에 대한 심원한 통찰과 기록에 감사를 드리며 기립 박수를 보낸다.
한국의 근대사를 정리한 강덕상 선생과 ⌜韓國流移民史⌟를 써주신 현규환 선생이 계시기에 한국의 근대사는 왜곡과 은폐, 과장과 위작을 극복하며 민초의 신음과 함성으로 펼쳐질 것이다.
2021.12.18.토. 새벽
우담초라하니 올림
미주
1) 레드퍼지-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를 공직이나 민간기업에서 추방하는 행위.
2) 우방협회 – 1950년 가을 호즈미 신로쿠로를 중심으로 한 동화협회 유룍자들이 한일 관계의 혼미를 염려ㅏ여 조선에 관한 제반 문제를 조사 •연구하고 이를 실천 보급할 목적으로 조선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에 있던 자가 자기의 과거 지식과 경험 그리고 오랜 경험에 대한 자기비판을 기초로 하여 일반인의 이해와 보급에 노력해 가기 위해”, “조선에 있던 우리 국가에 대한 마지막 의무로서 한일 양국의 문제에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 호즈미의 생각이었다. 젊은 학생 연구자들과 함께 조선 근대 사료의 기록 작성의 장이 된 ‘호즈미 제미’는 1958년부터 1970년까지 진행되었다. 이후 기록은 ‘우방 문고’로서 가쿠슈인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 소장되었다.
3) 호즈미 신로쿠로(1889~ 1970). 1933년 도쿄대학 법하부 졸업 후, 문관고등시험에 합격. 조선총독부에 들어갔고 1932년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밑에서 식산국장으로 9년간 근무. 이후 조선상공회의소 회장,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1945년 폐전 당시 조선인양동포세화인회를 조직하여 인양에 진력했다. 1947년 참의원 의원에 당선. 1952년 재단법인 우방협회를 설림하고 이사장에 취임. 1958년 젊은 학생연구자들과 함께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설리하녀 전 총독부 일본인 관료 129명에 관한 청취 조사를 실시하여 418개의 녹음 기록을 남겼다.
4) 조선사연구회 – 김종국이 1950년대 초반 도리츠대학 교수인 하타다 다카시를 찾아온 것을 계기로 도리츠 대학에서 ‘고려사, 식화사’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외부 연구자나 학생도 모여 창설기의 연구회를 만들었다. 이와는 별도로 1958년 5월 7일 우방협회 안에‘조선근대사료연구회’가 발족되었고, 가쿠슈인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서는 스에마쓰 야스카즈를 중심으로 ‘이조조실록을 읽는 모임’이 민들어져 점차 조선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런 동향을 배경으로 하타다 세미나 안에서 도쿄 근교의 조선사 연구자들이 모여 연구회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리하여 하타다를 중심으로 조선사의 과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도쿄에서 연구회가 설립되었다 이에 호응해 간사이에서도 연구회가 만들어지고 이후 모든 조직이 합동해 전국 조직이 되었다.
참고서적
1. 현규환저, ⌜韓國流移民史⌟, 어문각, 1967
2. 강덕상 기록 간행위원회 편집, 이규수 번역⌜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 어문학사, 2021.10.31.
3. 강덕상 저, 김광열 역,⌜여운형과 상해임시정부⌟, 도서출판 선인, 2017
첫댓글 강덕상
역사학자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