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와 노닐던 강변 정자, 압구정(狎鷗亭)
서울의 지명 중 가장 시적인 이름이 압구정(狎鷗亭)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자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한강변의 멋드러진 풍광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의 현대아파트, 한양아파트 등 고층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인데 지형이 온통 바뀌었지요.
보통 정자란 사람 대여섯이 올라갈 수 있는 정도의 작은 크기인데, 당대 최고 실세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지었기에 그 규모가 대단했다고 전합니다. 정식으로 명칭이 붙여지기 전에 그냥 누정(樓亭)이라 불렀다는데, 이 '樓' 란 2층이상의 큰 건물에만 붙이는 이름이라네요.
당시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倪謙)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이 정자에 들러 붙여 준 이름이 狎鷗인데, 중국까지 알려져 많은 明의 문인들이 찬시를 지어 보내 주기도 했답니다. 그 후 몇차례 난리를 겪고 주인도 여러번 바뀝니다. 마지막으로 철종의 외동딸 영혜 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衛)가 된 박영효(朴泳孝, 1861~1939 : 필자의 작은 증조부)에게 하사됩니다. 그러나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려 몰수되었다가 고종 말년에 되찾았다고 하나 그 후의 일은 확실치 않습니다. 애초 임금의 장인(府院君)이 지은 정자가 마지막으로 왕의 사위(駙馬)가 주인이 되었다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런지요?

압구정 / 겸재 정선이 육십대 중반에 그림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설명 : 잠실 쪽에서 서북으로 흘러내려오던 강 줄기가 서남으로 꺾이는 지점, 그 물가 언덕 위에 높다랗게 세워진 정자가 압구정이다. 정자에 오르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한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강 건너로 옥수동·금호동 일대가 바로 보이는데, 그 뒤로 짙은 초록빛 산은 남산이고 저 멀리 삼각산(북한산) 연봉들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좌 상단에 보이는 산은 청계산과 우면산일 것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 때(영조 대)는 누가 압구정의 주인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압구정이 서있는 높은 언덕 아래 층층이 이어진 강변 구릉 위로는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마을을 이루듯 들어서 있는데, 이 중에는 당시 한양 고관대작의 별장들도 있을 것이다. 화면 우측 상단에는 ‘千金勿傳’ 즉, ‘천금을 주더라도 남에게 주지 말라’ 는 내용의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겸재가 찍은 것인지, 아니면 후대 이 그림을 소장했던 사람이 찍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그림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짐작이 간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압구정(狎鷗亭)

압구정이 있던 자리 /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72동 앞(남쪽)중앙
두 딸을 두 왕(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내고 영의정을 두번씩이나 역임하면서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던 한명회는, 말년(성종 7년)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 보내려고 풍치 좋은 강가에 정자를 짓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의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게 될 줄은 누가 알았으리오. 압구정이 완성되는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시를 직접 지어 내렸는데, 이는 당시 젊은 관료들의 반발로 철거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지요. 워낙 풍광이 수려한 명승처라 중국까지 알려져 明에서 사신이 오게 되면 반드시 거치는 코스가 되었다고 하네요.
성종 12년, 역시 명나라 사신이 와서 압구정을 관람하기를 청하는데, 한명회는 좁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방문을 허락합니다. 다만 자신의 정자가 좁아서 사신들을 위해 잔치를 열 수 없으니 정자 밖 평지에서 할 수 있게 대궐에서 사용하는 차일을 보내 줄 것을 청합니다. 성종은 이를 괘씸하게 여겨 불허하고 다른 곳에서 연회를 열라고 하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궁전 처마에 잇대는 장막(補簷幔)이라도 내려 달라고 요구하지요. 이에 승지나 대간의 비난이 빗발치는데 그때마다 성종은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매듭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상소가 계속되자 국문까지 하게 되고, 결국 정치 일선에서 아주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압구정(狎鷗亭) / 최경지(崔敬止, 조선 전기)
三接殷勤寵渥優(삼접은근총악우)
임금님을 하루 3번 접견하는 은근하신 은총 두터우니,
有亭無計得來遊(유정무계득래유)
정자가 있어도 가서 놀 겨를 없으리.
胸中自有機心靜(흉중자유기심정)
가슴 속 고약한 기심이 절로 고요해지면,
宦海前頭可狎鷗(환해전두가압정)
벼슬 중에도 가히 갈매기와 친해질 수 있으련만..
한명회와 같은 시대를 산 최경지(崔敬止, ?∼1479)는 압구정을 시제로 하여 이렇게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그는 기개가 높고 시문를 잘 하는 걸로 정평이 났는데, 술을 좋아하여 술탈(酒病)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혹 한명회의 국정농단에 울화가 치밀어 밤낮없이 통음(痛飮)한 건 아닐지..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물을 더럽히고
세조의 왕위찬탈에 맞서 직접 부딛치며 죽어 간 사육신(死六臣)이 있었다면, 따라 죽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세조와 그의 권신들을 괴롭힌 생육신(生六臣)도 있지요. 그 중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비아냥거림은 지금도 뭇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명회가 압구정을 짓고 현판을 하나 내다 걸었는데, 이를 못마땅히 여긴 김시습이 한 구에 한 글자씩 바꿉니다(痛快無比!!).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 한명회 원래 현판
젊어서는 종묘사직을 떠받쳤고, 늙어서는 江湖에 누었도다.
靑春危社稷 白首染江湖 - 김시습 개작
젊어서는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했고, 늙어서는 강 물을 더럽혔도다.
압구정 부근을 지나가던 한 선비(李尹宗)는 한명회를 '머리감은 원숭이(沐猴)'란 심한 욕설을 글로 남기는 등 이곳을 지나는 뜻있는 선비들이 모두들 못 마땅해 합니다. 그 후대에도 압구정을 읊은 곧은 시인들이 많았지요.
압구정 / 김성일(金誠一, 조선 중기)
一生名利較銖錙(일생명리교수치)
평생의 名利를 저울에 달아 보면,
多少機心爾自知(다소기심이자지)
기심이 얼마였는지 너 스스로 알리라.
莫以虛名過末俗(막이허명과말속)
헛된 명성 하찮은 세속 일 자랑하지 마시게.
白鷗元不被人詐*(백구원불피인사)
갈매기는 본디 사람에게 잘 속지 않거늘*..
*열자(列子)에 나오는 이야기로, 바닷가에 갈매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었다.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가 갈매기와 함께 놀았는데, 그에게 다가오는 갈매기가 수없이 많았다. 그 아버지가, “듣자니 네가 갈매기와 함께 노닌다는데 하나 잡아 오너라.” 라고 했다. 다음날 그가 바닷가로 나가자, 갈매기들은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서에 김성일(金誠一, 1538~1593)처럼 저평가된 인물도 많지 않을 겁니다. 일본에 함께 다녀온 황윤길(黃允吉)과 달리 왜군이 조선을 침입하지 않을 거라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지요. 이는 당시 東·西 당쟁의 와중에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동인에 의문을 제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파직되지만,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관군과 의병가의 다리 역활을 합니다. 그 후 경상관찰사로 임명되어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모으며,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진주성을 왜군으로부터 지키도록 합니다. 순찰사로서 각 고을의 항전 상태를 살피고 독려하다 전란 중 과로로 병사하지요.
압구정을 바라보며
(望狎鷗亭)
/ 이서구(李書九, 조선 후기)
危亭縹渺枕湖雲(위정표묘침호운)
높다란 정자 아련히 강물 위에 구름을 베개 삼고,
無限晴沙眺望紛(무한청사조망분)
끝없이 청정한 모래밭 아득히 보이는구나.
冽水風帆橫岸去(열수풍범횡안거)
한강 돗단배는 강안 저편으로 가로질러 가는데,
廣陵烟樹隔江分(광릉연수격강분)
광릉은 안개 속에 강을 사이에 두고 숲으로 나뉘어 있네.
靑山眼冷皇華使(청산안냉황화사)
(당시 정자를 찾았던)중국 사신들은 청산에 묻히고,
芳草魂銷上黨君(방초혼소상당군)
상당군 한명회의 넋도 방초 속으로 스러졌네.
文物豪華俱寂寞(문물호화구적막)
당시 호화스럽던 문물은 다 사라져 적막한데,
至今惟有白鷗群(지금유유백구군)
지금은 다만 흰 갈메기 떼만 노닐 뿐.
앞서 여러번 언급했듯이 이서구(李書九, 1754∼1825)는 이덕무·박제가·유득공과 함께 조선 르네상스期(영·정조대)의 실제 주연들로, 북학파 실학자이며 사가시인(四家詩人)이지요. 먼 왕손(전주 이씨)인 그는 이 4인방(?) 중 막내로 유일하게 서얼이 아닙니다. 같은 전주 이씨 가문인 이덕무와는 13살 차이가 나나 하대하는 일이 없었다는데, 이는 서얼 여부를 떠나 이서구의 학문적 깊이를 존중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