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는 화려함이 없다. 대신 추운 겨울에도 모습 그대로 꿋꿋하다.

* 가을을 등 떠밀고 싶은 눈 썰매장이 채비에 바쁘다.

가을의 意味, 소운/박목철
우리나라같이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나라에 태어난 것도 하나의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꽃이 만발한 하와이를 찾거나, 눈 구경 하겠다고 알래스카를 찾지 않아도 기다리기만 하면 어김없이
온갖 꽃으로 강산을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고, 하얀 눈꽃이 천지를 하얗게 동화 속의 나라로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자연의 변화에 감동하게 된다. 당연히 그러려니 무심히 스치듯 지나가던 계절의
변화가 문득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야, 아름답구나! 감탄하게 될 때쯤이면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난
나이임을 깨닫게 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될까? 가을이 가슴에 닿는 까닭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이 있게 마련이다.
소운도 젊은 시절엔 여름을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춥거나 더운 계절이 싫어진 것을 보면, 이도 체력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좋긴 하지만 봄이면 유난히 부는 바람 탓에 봄보다는
가을을 좋아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계절의 선호도 나이와 체력에 따라 변하게 되나 보다.
가을이면 왠지 울적해진다는 분들을 주변에서 보게 된다.
소운이 아는 어떤 분은 겨울이 문턱인 늦가을 해 질 녘이면 외출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산한 분위기에 우울증이 생길 것도 같다고 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을이 주는 느낌은 외로움과
허전함이 가득한 느낌인 것은 맞는 것 같다. 길가에 가득한 코스모스도 화려함하고는 거리가 머니 말이다.
가을은 풍요와 공허함이 교차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들판을 가득 메운 오곡 하며, 탐스럽게 익어가는 온갖 과일까지 먹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지는
풍성함이 가득한 계절이 가을이다. 높아진 파란 하늘,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따가운 햇살, 풍요가 가득한
들판, 사람의 마음이 가장 넉넉해지는 계절이 가을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가을이 가져다준 풍요를 고마워했다. 재잘대는 꼬마들이 운동회가 펼쳐지는 계절도 가을이고,
온갖 축제가 주변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도 다 가을이 준 풍요함 덕이다.
추수가 끝나고 난 빈들엔 허수아비 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풍성하게 달려있던 과일은 다 사라지고 까치밥 한둘이 외롭게 달려있고, 화려하던 단풍은 바람에 휘날려
색동 꽃비되어 날리고 나면, 앙상한 가지만이 스산한 바람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늦가을의 凄然한 모습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풍요는 자취를 감추고, 추운 겨울을 맞으려는 불안한 준비만이 분주하다.
가을은 이렇게 풍요와 공허함이 교차하는 계절이기에 憐憫이 깊어지나 보다.
사람은 처한 환경에 따라 주변 사물을 다르게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가을이 서러운 계절이라 하지 않음은 아직 살 날이, 가을을 볼 날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선 분들은 가을이 더욱 애잔하게 마련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가을을 깊게 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법정 스님께서 쓰신 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날씨가 덥다고 부채질을 하다 문득, " 이런 더운 여름을 몇 번이나 더 살아서 맞게 될까?" 더위가 정겹게 느껴
지셨다던 그 스님은 더운 여름을 몇 번 더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마음이 시린 계절 가을도 이제 막바지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공허함 만이 가득하다.
따뜻한 시선으로 다시 떠나는 가을을 보기로 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떨고 있는 잎새도 정답게
바라보고 빈 들판에 외롭게 자리한 억새도 정답게 보기로 했다.
가을, 풍요를 가슴에 채우는 멋진 계절이 아닌가?
가을이 진다. 소운/박목철
지는 아쉬움
울긋불긋 치장 다 연민일세
등 떠미는 세월 눈 흘겨보지만
넌 가야 해!
대롱대롱
앙상한 가지 잡고 힘겨운 버팀이라니,
스산한 바람에
한겨울 시련이 걱정되나 보다
몸 떠는 억새의 물결
슬며시 자리한 겨울 앞에
내줘야 할 미련
그렇게
가을이 힘겹게 지고 있다.